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시골부자 고차대3, 처남이 쓴 추도사 

에세이 제1178호(2020.12.8)

이득수 승인 2020.12.08 02:45 | 최종 수정 2020.12.08 03:00 의견 0

다음은 영결식 중에 제가 직접 쓰서 읽은 추도사입니다. 분위기가 숙연해지자 당시 80세의 사형(자형의 형님)이 
<선비집에 장가를 가서 장례식에서 최고의 글 호사를 했다>며 제게 감사의 뜻을 표했습니다.

추도사(追悼辭)
-고차대매형 발인제 극락왕생발원문(極樂往生發願文)-

 0. 일시: 2018. 5. 5
 0. 장소: 서울산 보람병원

維歲次(오늘)

무술(戊戌)년 3월 20일 경주인 이득수는 제주(濟州)인 고차대 네째 매형의 영전에 두 번 절하고 통곡(痛哭)하노니

자형, 제 나이 스무 살 때 코가 덩그렇고 인물이 좋은 자형을 만나 얼마나 기분이 좋고 방학이나 휴가로 장촌에 갈 때마다 고물고물 예쁜 미진이와 농사도 짓고 병아리도 키우고 산림조합에도 다니면서 해마다 살림을 불리고 땅을 넓히는 자형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데, 그리고 마침내 장촌바닥에서 손꼽히는 알부자가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존경했는데 말입니다.

제가 정년퇴직을 하고 고향에 돌아와 집을 지었을 때 놀러갈 처가집이 생겼다고 너무나 좋아하던 자형이, 가끔 안간월 장수마을에서 매운탕도 먹고 오리구이도 먹고 늦게나마 형제의 정을 나누는 게 얼마나 행복했는데 말입니다,

재작년 제가 병이 나서 수술을 하고 왔을 때 나이 어린 처남이 날 두고 아프면 어쩌냐고 많이 안타까워하시며 노랑통닭을 사오던 자형에게 고추를 심고 배추를 심는 농사일도 배우고 가끔은 정자로 칠암으로 회를 먹으러 가던 요 몇 년간이 얼마나 서로 행복한 시간이었는데

불과 한 달 전 자형이 병을 얻어 입원했을 때 우리 한 두 해만 잘 버텨서 자형은 일단 80을 살고 저는 70을 넘기자고 약속을 한 것이 눈에 선한데 어찌 이리 쉽게 눈을 감았단 말입니까? 차돌에 바람이 들면 석돌보다 못 하다더니 일평생 한눈한번 팔지 않고 야무지게 살던 자형이 외동딸 미진이와 태산 같은 김서방과 밤톨 같은 세 아들, 그 중에도 늘그막에 받은 선물이라고 십년간이나 끼고 살던 저 귀여운 막내손자 성범이를 두고 어찌 그리 쉽게 떠나셨는지, 근 50년이나 살아온 착한 아내 우리 누님은 이제 누굴 믿고 살라고 벌써 눈을 감았단 말입니까? 

꽃상여 이미지
꽃상여 

그러나 자형,
자형을 보내려고 곰곰 생각해보니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남자 나이 일흔여덟이면 평균수명도 살았고 근면성실하고 검소하며 겸손하고 소박한 시골농부의 미덕을 다 갖추고 상당한 살림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저렇게 잘 생긴 손자를 셋이나 두었으니 어디 내어놓아도 손색없는 참으로 훌륭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부디 이승에 대한 아쉬움을 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훌훌 떠나셔도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저 질펀한 논밭과 창고에 가득한 트렉터와 콤바인을 볼 때마다 또 장촌골짝에 진달래가 피면 자형을 생각하고 엉개를 따거나 홍시를 딸 때에도 그리워하고 언양장에서 붕디미만 쳐다봐도 그리울 것입니다. 그리고 자형 또한 아픔도 없고 슬픔도 없고 안타까움마저 없는 저 아늑한 하늘나라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 누님과 자식들, 세상 어디에 내어놓아도 빠질 것이 없는 키 크고 잘 생긴 세 손자와 그의 후손들이 자형을 닮아 코가 덩그런 얼굴로 언양은 물론 서울바닥을 채우며 살아가는 것을 보며 흐뭇하게 웃을 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손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참으로 열심히 일하고 참으로 알뜰히 아끼며 살아온 자형의 한 평생에 감사드리며 처남으로서의 존경을 바칩니다. 

아, 슬프고 슬프도다. 애써 잊으려니 새삼 더욱 슬프도다. 이렇게 쉬이 갈 길, 오기는 왜 왔으며 애달픈 이별의 법, 법구경(法句經)은 왜 읽었나?
아아, 이 슬픈 날에도 장촌 뒷산에는 하얀 아카시아 향기가 진동하고 진자줏빛 오동과 보라색 등나무꽃이 흐드러지는데 장촌마을 터줏대감 자형은 지금 무얼 하며 어디로 떠나려하시는가요?

사진2 주인도 없이 세월 속에 삭아가는 창고(19. 1. 23)
주인도 없이 세월 속에 삭아가는 창고

 

그러나 자형, 회자정리(會者定離), 생자필멸(生者必滅), 어차피 만나면 헤어지고 태어나면 죽고 마는 인생의 길에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다 잊어야 할 시점입니다. 평생을 함께 하며 자형의 그림자로 살던 우리 누님, 간병에 지쳐 파김치가 된 우리 누님이 다시 힘을 내어 자형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도록 마지막 손 한번 잡아주고 떠나소서. 그리고 딸과 사위와 세 손자와 그간 다정했던 일가친척과 이웃들도 눈길 한번 주시고 다시는 걸림도 없고 원망도 없는 부처님의 나라(佛國土), 손만 마주잡아도 향기가 난다는 도솔천 욕계제2천(欲界第二天) 어느 어름에서 다시 만나 영원히 함께 할 것을 기약하소서.

자형, 저도 이제 마지막 술잔을 채웁니다. 이 술 한잔에 그간의 정의를 다 풀고 우리가 자형을 잊으려 하듯 자형도 우리를 잊고 다정한 미소가 되고 따스한 손길이 되어 깃털처럼 가볍게 저 영원의 나라로 떠나소서. 부디 오래오래 영면(永眠)하소서.

상향(尙饗 자, 드십시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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