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우리는 죽어서 무얼 남기나(고차대1)

에세이 제1176호(2020.12.6)

이득수 승인 2020.12.05 20:42 | 최종 수정 2020.12.05 20:59 의견 0

 결실의 가을이 끝난 12월은 마감과 결산의 의미도 있는 달, 제 가까운 곳에 살다 고인이 되신 넷째 매형과 제 가형에 대한 삶은 반추(反芻)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재작년에 죽은 내 막내자영은 젊을 때 열심히 일해서 수많은 논밭을 사고 늙어 고속철부지로 편입되며 엄청난 보상을 받아 평생을 꿈꾸었던 부자의 꿈을 당대에 이루어 언양읍 일대에 알부자로 소문이 났다.

스무 살 면직원인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막내누님에게 중매가 들어와서다. 언양지서에 보충역으로 근무하는 고씨성 가진 총각의 사람됨을 알아보려는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지서에 찾아가 슬며시 얼굴을 확인한 나는 단번에 어머니께 합격신호를 보냈다. 이목구비가 또록또록하지 못한 몽골리안 우리가족과 달리 너무나 큰 코와 멀쩡한 인물을 가진 것이었다. 그래서 단번에 혼사가 성립되었는데 자영은 자영대로 당시 우리형제가 언양바닥에서 공부를 좀 한다는 소문을 듣고 공부 잘하는 자식 낳아 출세시키려고 아내 될 사람 얼굴도 안 보고 결혼했다고 했으니 평범한 우리 누님은 논에 모를 심다 뜸부기 알을 주운 셈이기도 하다.
 
처음 부모님의 아랫방에 기거 하며 제 못으로 병아리 20마리를 기르던 가난한 청년은 4H 클럽에 가입해 농촌개발 사업에 눈을 떠 장촌마을에서 처음으로 측간의 메탄가스로 취사를 하는 변화를 가져왔고 신실하다고 소문이 나 산림조합의 촉탁직원이 되고 누님은 농사를 짓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투잡>으로 해마다 조금씩 땅을 사 모았고 시골부자 소리를 들어도 밖에 나가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주말에도 농사일과 밤 따기에 골몰했고 비가 오는 데다 달리 일이 없으면 새로 지은 창고 안에 들어가 5층 높이로 쌓아놓은 볏가마니를 일일이 세어보며 아래 위를 바꾸어 쌓는 취미를 즐겼다.
 
비단 자신이 근면한 것은 둘째 치고 누님에게도 반찬값이나 생활비를 거의 주지 않아 우리누님은 장촌리에서 가장 잘 사는 집의 가장 가난한 안주인이었다. 나중에 농사가 너무 많아 관절에 무리가 온 누님이 이제 땅을 고만 사자고 했는데도 다시 사자 소문난 순둥이 아내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날부터는 일체 논밭에 나가지 않고 늘 달랑거리는 생활비도 포기해 시장도 자영이 보게 했다. 그러고는 아버지 제사 같은 날 자영에게 용돈을 받아오는데 부자라는 소문과 달리 겨우 한 5만 원이나 10만 원을 달랑달랑 들고 오는 것을 너무나 미안하게 생각했고 짓궂은 셋째 누님은 부자가 돈을 안 쓰면 죄를 받는다고 그래서 아들이 없고 딸만 하나라고 부아를 채우기도 했다.

사진1. 죽기 한 해 전인 2017년 가족외식을 하는 막내자영 고차대씨
죽기 한 해 전인 2017년 가족외식을 하는 막내자영 고차대씨

그 구두쇠 자영이 나에게 처음으로 거금을 쓴 일이 있었는데 내가 사무관에 합격하여 남부민동 동장이 되어 산소를 둘러보러 온 날 언양장터에서 만나
“처남, 봐라. 니가 지금 동장이니까 옛날로 치면 언양 현감택이지?”
“예. 그래 봐야지요.”
“그래 장하구나, 처남 오늘은 내가 술을 한 잔 살게.”
하고 당시에 한참 성가(聲價)가 올라가던 언양불고기 집으로 데리고 가 육회에 구이까지 실컷 먹게 했는데 그 가격이 5만 원이 넘었으니 지금 돈 으로 30만 원이 넘는데 평생 처음 기분을 한 번 낸 모양이었습니다. 달리 말은 안 해도 공부 잘하는 처남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모양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 슬하의 7남매 중에 가장 부유한 그는 장모인 우리어머니로부터 열심히 잘 산다고 칭송을 듣기는커녕 너무 야문 가죽꼴기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당시 언양지방에는 구두쇠를 소태(쓰디쓴), 약봉다리(쓰디쓴), 가죽꼴기(여문)로 불렀는데 장모 입장에서는 그 세 개가 다 해당되는 모양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막내자영은 또  절대로 돈을 안 빌려주는 사람으로 소문이 났는데 자신의 5남매에 처가의 7남매의 자녀가 많기도 하고 또 그중에는 사업하는 사람이 있어 돈을 빌리려 가면 아예 듣는 척도 않아 죽을 때까지 처가에서 돈을 빌려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가 명촌으로 집을 지어 이사 갔을 때 잔뜩 신이 난 누님을 태우고 가끔 오면 얼마 안 되는 채전 밭을 꼼꼼히 살펴보며 고추 순을 따거나 벌레를 잡아주고는 제 아내가 고등어를 구워 점심주기 만을 기다려 그 많은 돈을 두고 병을 앓는 처남에게 소고기 한 번 안 사준다고 누님이 타박을 해도, 심술장이 처형이 힐난을 해도 들은 척도 안했습니다. 처남댁 솜씨가 좋아 국도 장도 다 단 데 굳이 돈을 쓸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지요.
 

 사진2. 우리 자영이 비만 오면 취미삼아 세어보던 나락 창고 건물(왼쪽 19. 2.1)
우리 자영이 비만 오면 취미삼아 세어보던 나락 창고 건물

그런데 갑자기 하늘과 땅이 바뀌듯 우리가 밭을 살 때 처남댁이 빌려주라고 하면 돈 한 5천 만 원을 빌려줄 수 있다고 제의해온 것입니다. 이 경천동지할 일에 대해 곰곰 생각하던 아내가 아파트를 담보로 농협에서 대출을 받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자는 좀 비싸도 형제 간의 갈등은 없었는데 사실 돈 빌려준다는 말을 하고 우리가 다른데서 돈을 구했다는 말을 듣기까지 저녁마다 한숨을 푹푹 쉬며 걱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갑자기 간암으로 쓰러져 한 달 만에 퇴원하여 명촌리로 돌아오자 열 살이나 적은 처남이 먼저 죽으려는 것이 괘심해 문병조차도 안 온 자영이 한 달쯤 더 지나서 노란통닭 두 마리를 튀겨 문병을 왔습니다. 세상에 처남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왔는데 한 마리 6천원, 두 마리에 만원을 하는 노랑통닭을 사왔다고 셋째 누님이 깔깔 웃었지만 그는 평생에 단 두 번째로 처남에게 돈을 쓴 것입니다. 물론 그날도 고등어를 구워 점심을 먹였는데 하필 지인이 택배로 고등어 두 상자를 보내오는 바람에 셋째 누님에게 반 상자를 주자 자영의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아 아내가 나머지 반 상자를 주자 금방 기분이 좋아져
“가자!”
큰 소리로 집으로 가자고 누님을 졸랐습니다. 귀한 것일수록 당장 자기 집에 끌어다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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