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우리는 죽어서 무얼 남기나(고차대2)
에세이 제1177호(2020.12.7)
이득수
승인
2020.12.06 20:20 | 최종 수정 2020.12.06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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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개도 넘은 통장에 30억도 넘은 현찰을 두고 처남에게 밥 한 끼도 안 산다는 공격거리가 생기자 순둥이 우리 누님이 시도 때도 없이 자영을 데리고 우리 집에 오면
“하긴 명촌동네가 잘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
하고 채전 밭이나 둘러보며 이미 이웃의 셋째 누님까지 제 명의 고정멤버가 다 모여도 자영은 절대로 먼저 식당에 가자는 소리를 않아 거의 대부분을 아내가 고등어를 구워 점심을 때우는 판이라 나중에는 누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카드를 만들어 달라고 졸라 카드를 내고 제가 사인까지 하나 개발해 주었는데 어쩌다 자영 몰래 우리 셋이 칼국수라도 사먹는 날이면 제 자리에서 자영의 폰으로 연락이 가서 자존심이 상한 누님의 불평이 쌓이자 마침내 자영이
“처남 너거 명촌사람들 준비해라이.”
하고 승용차로 우리 집에 와서 누님과 우리내외를 데리고 <해오름>이란 집에서 아구찜과 쭈꾸미를 가끔 먹었지만 소고기를 사는 일은 절대 없었습니다. 대신 우리 아들 정석이가 와서 고모와 고모부를 대접한다고 소고기를 사는데 구이보다 육회를 너무 잘 먹어 아주 거금이 들었습니다. 그렇게도 육회를 좋아하면서 차마 자기 돈을 주고는 단 한 번도 육회를 사먹지 못했지만 세 명의 외손자에겐 아낌없이 육회를 사는 이변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부터 77세의 시골부자가 한 번 지갑을 열기 시작해 제가 한 번 사면 자신도 한 번 사는 정도로 바뀌었지만 만약 제가 전날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묻고 이튿날 점심을 먹으면 누님을 포함한 네 사람은 당연히 부자 자영이 사는 것으로 아는데 자영은 제가 일어날 때까지 요지부동으로 앉았다가 그날 저녁 집에 돌아가 누님과 싸움이 벌어졌는데 안날 제가 안부전화를 하는 바람에 식당에 갔으니 당연히 처남이 내어야 된다는 원칙이었답니다.
하여튼 그렇게 오가면서 어떤 때는 부산의 민락동이나 울산 당사 항으로 회를 먹으러 가기도 할 정도로 조금씩 돈을 쓰기 시작하더니 차츰 외식의 맛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1017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우리는 아구찜과 생선회 낙지복음과 산토끼 탕에 냉면과 돌솥 밥을 먹느라 한주에 한번 이상은 반드시 만나 형편이 어려운 세 째 누님이 완전 발복(發福)을 한 듯 연일 할렐루야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2018년 연초부터 자영의 걸음걸이에 힘이 없고 자주 짜증을 내며 드러누웠습니다. 병원에 가도 뾰족한 병명이 나오지도 않고 외식을 가도 맛이 없고. 마지막엔 스스로 운전을 못해 제 아내의 차로 부산의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 마침내 그게 단순한 다리가 아픈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종합검진을 해서 병명이 이미 되돌릴 수 없는 폐암말기로 판정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소비패턴이 변했는데 우선 자기 때문에 고생하는 아내와 일행에게 아주 비싼 밥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제대로 삼키지도 못하고 말입니다. 또 자기 대신 운전을 하는 제 아내에게 움직일 때마다 기름을 넣어주고 도로비와 잡비로 몇 십 만원씩 주기도 하고.
한 번은 부산 민락동으로 회를 먹으러 갔는데 아예 처음부터 카드를 빼주는 바람에 그 비싼 방어 대짜를 실컷 먹으며
“봄에는 방어보다 도다리와 농어가 더 맛있다. 처남 다음에는 도다리 먹지.”
해서
“예. 자영 다음엔 제가 농어도 살 게요.”
했습니다. 대학병원에 병실이 없어 입원은 자꾸 늦어지고 이제 통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자영을 위해 세 째 누님이 자진해서 토종닭, 그것도 가장 큰 장닭을 한 마리 내어놓았습니다. 아마도 다시는 무얼 사 먹일 기회가 없을 것을 예견한 모양이었지요. 우리 집에서 닭을 푹 고면 내일 점심으로 먹기로 한 저녁에 너무 아프고 식욕이 없어 갈 수 없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닭고기를 너무 좋아해 그 큰 토종닭을 한자리에서 다 먹기 위해 맛이 덜한 가슴살, 엉덩이 살부터 먹기 시작해 마지막으로 뒷다리를 먹는다는 자영이 이제 닭고기도 못 먹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점심때 삶은 닭고기를 통째로 자영이 머무는 조카딸집으로 가져가니 오랜만에 닭다리 하나를 다 먹고는 피로하다고 바로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리고 한 열흘 뒤에 세상을 떠났는데 병원절차를 잘 모르는 누님 대신 제 아내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먹는 것도 다른 사람은 낙지돌솥밥 8천 원짜리를 먹이고 제 아내와 제게는 부산대 양산대 병원식당에서 제일 비싼 <낙지돌솥밥특> 11,000원짜리를 먹이며 자기가 죽으면 외숙모에게 용돈을 좀 넉넉히 주라고 딸에게 유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비로소 돈 쓰는 재미를 알았지만 이미 너무 늦었지요. 너무 외롭게 산 영감은 비록 열다섯 살이 적은 처남댁이지만 딸처럼 든든하게 믿을 수 있고(친딸은 유치원교사로 시간이 없었음), 제 아내는 꼭 20년도 더 전에 죽은 자기 아버지 같다고 몸을 사리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 몸을 못 가눌 때 아무도 엉덩이에 손을 못 대게 하다가 제 아내가 오면 순한 양처럼 맡기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그 자영이 남긴 막대한 현금으로 마음이 넉넉한 제 누님과 생질녀 미진이가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와 사촌 고씨일가들에게 몇 천만 원씩 고루 용돈을 나누어 주었는데 셋째 누님이 이종인 자기들도 줘야 된다고 주장해 쓴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농부가 그 어떤 잡념도 없어 오로지 돈만 모은 결과는 외손자 셋이 딸린 딸네집이 문화생활을 하기에 모자람이 없고(재산정리를 뒤에서 돌본 제가 모든 결산이 끝난 뒤 생질녀에게 이제부터 자동차도 그랜저로 사고 유복한 동창들과 다도나 고급 취미를 즐기며 세 아이를 비롯한 가족 전체가 품위를 몸에 붙이라고 당부하자 조카가 뛸 듯이 좋아했습니다. 또 우리 누님이 이제는 우리 형제들이나 장촌마을 경로당 멤버들에게 예사로 비싼 밥을 사기도 했지만 아직 아무도 우리 자영이 인심이 후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 자신으로서는 최선을 다해 꿈을 이루었지만 그의 사후는 그냥 평범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막내매형의 삶이 공무원을 하고 시집을 내어 외양만 그럴 듯한 저보다 몇 배나 알뜰한 생애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몸이 많이 아픈 날은 한 번씩 보고 싶기도 합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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