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 표준영정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저승을 헤매다가 염라대왕으로부터 퇴짜를 맞고 돌아온 한 사나이는, 이번에는 퇴계 이황 선생을 만났다. 한데 어찌된 영문인지 삐쩍 말라서 운신도 못하고 길바닥에 누워 있었다. 피골이 상접하여 몰골이 정말 형편없었다.

“제발 적선해 주이소.” 했는지 어쩐지는 확실치 않지만, 불쌍해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아니, 선생님. 도대체 어찌된 영문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퇴계 선생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글쎄, 이런 법이 어디 있소. 자손 놈들이 일은 안 하고 그저 나만 뜯어먹고 있으니, 내가 아무리 영양을 섭취해도 도무지 배겨낼 도리가 있어야지.”라고 하소연했다는 것이다.

수백 년 전 조상이 이루어 놓은 업적이나 명성만을 신주단지처럼 떠받들고, 그것만으로 호구(糊口)하려는 양반들의 정체를 재치 있게 풍자한 이야기다. 뼛속까지 갉아 먹히고 있는 퇴계의 처절한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 -윤학준/『나의 양반문화탐방기Ⅰ』(길안사, 1995)/p.70-

퇴계 이황(1502~1571)은 죽을 때 명정(銘旌, 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관직·성씨를 기록한 기)에 벼슬 이름을 일절 쓰지 말고, ‘처사이공지구’(處士李公之柩)라고만 쓰라고 유언했다.

처사란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 힘쓰며 조용히 살던 선비를 일컫는다. 퇴계는 처사가 아니었다. 고관 벼슬을 두루 거쳤다. 하여 이율배반적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다만, 번잡한 벼슬살이보다 산림의 처사로 일생 학문에 열중하면서 지내는 것을 동경한 의식의 발로로 그런 유언을 남겼으리라.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으로 오래 봉직한 탓인지 유학과 여론의 주도 세력인 성균관 학생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또 원만하고 합리적인 성품으로 조정에 나온 사림(士林)을 자기 세력을 끌어들였다. 그의 제자들은 대개 정계에 나와 활동했는데, 김성일·유성룡·정탁·정구·김우옹 등이다.

이들 일대(一代) 제자를 시작으로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한 퇴계학파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주리론적(主理論的) 명분론에 입각해, 상전과 노비, 양반과 평민의 윤리를 강조하며 향촌 질서를 잡아나갔다.(참고. 이이화/한국사이야기⓾/pp.141~2)

계급사회인 조선에서 고관대작을 지냄은 선비 개인은 물론 가문의 영광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를 안다고 자부한 주리론 철학자로서 퇴계는 죽음 앞에서 벼슬살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음은 쉬 이해할 수 있다.

조선은 ‘양반 중심의 신분제 사회’였다. 국가 통치 체제에 중점을 두면 ‘중앙 집권적 관료제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 역사에는 서양이나 일본, 고대 중국 사회와는 달리 봉건제(封建制)가 없었다.

봉건제란 천자(왕)이 제후나 영주에게 봉토를 나눠주고 다스리게 하는 방식이다. 영주나 제후는 각자의 영토를 다스리고 자기 영지 안에서 독자적인 재판권과 징세권을 가졌다. 대신 천자나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군사적 의무를 졌을 뿐이다.

이와는 달리 조선은 모든 토지는 왕이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고, 왕이 전국을 직접 통치하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지방을 다스렸다. 지방 관리는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는 관료일 뿐, 영주처럼 지역 백성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조선에서 출세길은 오직 벼슬길뿐이었다. 이 벼슬길, 곧 관료가 되는 길은 계급사회인 만큼 양반에게만 주어졌다.

양반은 고전적인 의미는 문관인 동반(東班)과 무관인 서반(西班)이다. 잡직을 제외한 모든 벼슬아치를 통틀어 양반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기로 내려와서는 현직 벼슬아치는 아니지만, 벼슬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 계층까지도 포함하는 신분의 명칭이 되었다. 곧 유림과 훈신, 충신의 후손이 이 범주에 들었고, 향반과 토반까지도 이에 포함되었다.

양반이라고 누구나 벼슬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 가지 길이 있다. 과거, 문음(門蔭), 천거이다. 과거에는 소과, 대과가 있는데 여기에 급제해야 임관이 된다. 문음은 고관이나 국가에 공로가 세운 이의 자손을 과거를 거치지 않고 임관시키는 것을 말한다.

명신, 충신의 자손을 비롯하여 청백리에서 효자, 열녀의 자손에 이르기까지 문음의 범위는 넓었다. 천거는 학행이나 덕망이 뛰어난 사람을 추천 받아 벼슬을 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인재 활용을 위한 제도이다.

양반의 혈통이라도 탐관오리의 자손, 개가한 여자의 자손, 서얼의 자손에게는 금고 또는 제한을 가하였다.

벼슬은 사회적 위상의 상징이자 정치권력의 보루이며, 수입의 원천이었다. 이처럼 보장되는 것이 많은 만큼 벼슬을 얻으려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특히 조선왕조는 관료사회였으므로 벼슬을 얻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따라서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여러 가지 부정한 방법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이러한 조선사회에서 명정에 고관의 작위를 마다하고 처사라 자처한 퇴계는 대유학자다운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라 평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명정에 대해 두 가지를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자손들이 퇴계의 유언대로 명정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확인된 사실이다. 다만, 명정에 어떤 벼슬자리를 썼는지는 알 수가 없다. 퇴계는 명종에 의해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현 장·차관 급)에 올랐다. 아마 이 품계를 명정에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사거 후 선조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글머리의 이야기에서 보듯, 문음으로 관료의 길에 들어설 수도 있는데, 그 기회를 후손들이 놓칠 리가 있었겠는가. 다른 하나는, 후손들은 그렇다 치고, 객관적인 평가는 어떠했을까?

퇴계의 명정에 대한 유언을 듣고서 남명 조식(1501~1572)은 다음가 같이 나무랐다고 한다.

“진짜 처사는 나지. 퇴계가 할 벼슬은 다하고 처사로 자처한다면 사리에 어긋나지.”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