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生涉世本爲口(아생섭세본위구) 세상 살아가는 내 인생은 본디 입을 위한 것이어서
一官久已輕蓴鱸(일관구이경순로) 관직은 오래 전부터 순채와 농어보다 가볍게 여겼네.
人間何者非夢幻(인간하자비몽환) 인간사 꿈과 환상이 아닌 것이 무엇이던가?
南來萬里眞良圖(남래만리진량도) 남쪽 멀리 온 것은 참으로 잘된 일이네.
소식(蘇軾, 1037~1101)은 북송 시대 시인이자 문장가, 정치가이다. 호가 동파거사(東坡居士)여서 흔히 소동파로 불리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한 사람이다. 아버지 소순과 작은아버지 소철도 역시 유명한 문인으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든다. 하여 당대 사람들은 이 셋을 ‘삼소’(三蘇)라 불렀다.
소동파 자신은 벼슬을 매일 먹는 나물 반찬이나 별미로 가끔씩 즐기는 농어회보다 가볍게 여겼다. 그러나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벼슬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길은 출셋길이 아니라 고행길이었다.
정쟁(政爭)에 패배하여 중앙정치 무대에서 멀리 떨어진 최남단 해남도로 폄적(貶謫)을 당했다. 귀양살이를 하다 보니 외려 인생의 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인간사 세상사는 본디 꿈과 환상처럼 덧없는 것이다. 인생사에서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게 뭐가 있더란 말인가!
이런 깨침인지 자위(自慰)인지를 시로 읊은 것이 위의 ‘四月十一日初食荔支(사월십일일초식려지, 4월 15일 처음으로 과일을 먹고)’이다. 소동파의 사상적 기반은 불교의 공(空)사상이다. 일체의 존재는 공(空)이어서 실체가 없고, 헛된 것이라는 입장이다.
‘행복, 채움으로 얻는가 비움으로 얻는가’를 경제학적으로 풀면, 폴 사무엘슨의 행복방정식, ‘행복=소유÷욕망’이 된다.
사무엘슨의 행복방정식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공식에서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전제를 감안해야 한다. 곧, 다른 조건이 같다면,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소유와 욕망의 관계식이라는 것이다.
배부른 돼지보다 고뇌하는 소크라테스 쪽을 택하는 게 사람이다. 행복에는 건강, 인간관계, 가치관 등이 크게 작용함을 누구나 안다. 사무엘슨은 경제학자로서 사람의 다면적 행복 요소 중에서 그 한 부분인 경제적 문제에 한정해서 행복방정식을 만든 것이다. 중요한 점은 ‘소유’보다는 ‘욕망’에 더 방점을 찍었다는 것이다.
사무엘슨은 경제학을 통해 합리적 선택을 설명했지만, 그 선택이 항상 도덕적이거나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봤다. 그는 탐욕(greed)이 시장을 움직이는 동력이 될 수 있지만, 절제(restraint) 없이는 사회적 파국을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하기도 했다.
따라서 사무엘슨의 행복방정식은 단순히 소비(소유)의 극대화가 아니라, 사회적 안정을 위해 개인 욕망의 절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무엘슨은 공공재, 외부효과, 불완전 시장 같은 개념을 통해 ‘시장의 실패’를 설명하며, 정부 개입과 제도적 설계를 강조한 것이다.
대체로 아담 스미스 하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한 『국부론』을 떠올린다. 하지만 스미스가 이 책보다 먼저 쓴 책이 『도덕감정론』이다. 곧, 스미스는 경제학자일 뿐 아니라 도덕철학자였던 것이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타인의 감정에 공감(sympathy)하는 존재이며, 사회질서는 공감 능력과 도덕적 판단을 통해 유지된다고 주장한다. ‘공정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라는 개념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도덕적으로 평가하려는 내면의 기준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시장을 설명하되, 인간이 도덕적이라는 전제를 앞세웠다는 점을 놓치면, 스미스 경제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경제학 이론은 대개 구체적 맥락과 윤리적 전제를 담고 있다. 사무엘슨의 행복방정식과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은 시장(경쟁)의 전제가 되는 인간 본성, 곧 욕망 통제와 도덕심을 강조한다.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도덕적 인간이란 전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유를 통한 행복의 극대화’, ‘보이지 않는 손’ 과 같은 은유는 강력하고 직관적이다. 이런 은유가 제도 설계, 외부효과, 도덕심 연구 같은, 복잡하고 이해하는 데 에너지가 많이 드는 내용보다 머릿속에 더 쉽게 자리 잡는다. 그 결과로 핵심 메시지는 사라지고 그릇된 이미지만 남게 된다.
진화론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을 해석하는 데 있어, 신념 체계(종교나 신)보다 자연선택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본다.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생존과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한 성 선택(짝짓기)에 몰두하는 ‘이기적 유전자’의 대리자이다.
인간에게 소유욕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배우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넘칠 정도도 타고 난다. 소유를 통해 생존과 성 선택의 확률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소유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공기가 없으면 숨을 쉴 수 없어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과 같이 당연하여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폴 사무엘슨의 행복방정식(행복=소유÷욕망)은 욕망을 통제 혹은 조절할 때 비로소 행복하거나 행복이 커진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이런 해석은 불교의 공(空) 사상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러나 공사상이 탐욕에 대한 경계로서는 적합할지 모르나, 삶의 푯대로 삼기에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에 대한 너무 비관적인 세계관이다. 진화의 시간으로는 100만 년도 ‘눈 깜짝할 새’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는 생물종 전체의 역사에 관련될 뿐, 개체의 시간은 아니다.
인류가 아니라 인간 개인으로서 100년의 세월은 영원에 버금한다. 그 세월 속에서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生老病死). 나고 성장하고 늙고 쇠잔해진다(生長老衰). 가히 덧없다.
하지만 기적은 발생하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그 덧없음 속에서 의미나 행복을 찾아내거나 만들어 감은 자유의지를 가진 개개인의 능력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그 능력의 첫걸음은 소유 능력보다는 욕망 조절(통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