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짧은 만남, 긴 여운(윤정이 형님4)

에세이 ㅈ베1174호(2020.12.4)

이득수 승인 2020.12.03 21:11 | 최종 수정 2020.12.03 21:32 의견 0
 사진3. 떨어진 은행잎이 가득한 후리마을. 죽기 전에 한번 만나 이 길을 걸을 수 있을지...
떨어진 은행잎이 가득한 후리마을. 죽기 전에 한번 만나 이 길을 걸을 수 있을지...

그렇게 내 결혼식의 사회를 본 후 신랑신부가 신혼여행을 떠난 뒤 모처럼 그의 진면모가 한 번 발휘되었는데 우인대표로 나온 남여 8명을 혼주인 제가 준 얼마의 식대로 같이 점심을 먹고 술집을 가는(그 때는 밤에 음악이 나오고 춤을 추는 술집이 유흥의 극치였다) 모든 행사를 주관하고 얼마나 재미나게 좌중을 이끌어나가는지 그날 신부 측 우인으로 참석했던 처녀들 중에 그가 어떤 사람이냐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다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그의 일생을 일관해온 취생몽사의 젊은 시절을 끝내고 그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나도 모르게 아주 평범한 처녀와 결혼을 해 나의 첫 딸 <이슬비>가 태어날 때쯤 그의 아내도 배가 불렀다.

이어 오랜 생각 끝에 자신의 성격이나 생활습성으로 보아 그나마 행정공무원으로 들어오는 것이 제일이겠다고 생각을 고쳐먹고 다시 9급 공무원시험 공부를 했는데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서른 두 살의 나이에도 단번에 합격을 했다. 그리고 당시 자기가 노모를 모시고 동생들과 함께 대가족으로 지내는 감전동에서 가까운 사상구를 지원해 여러 동사무소를 전전했다. 그의 모친이나 고향친구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훈훈한 뒷마무리이자 멋진 전환이었지만 그 때부터 나와의 입장에 문제가 생겼다.

서른 두 살의 그가 다시 9급의 동직원 지방행정서기도 시보로 들어왔을 때는 나는 이미 7급으로 동사무소의 노른자위라는 민방위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다섯 살이 적은 7급 주사보와 서른두 살의 서기보가 만나 술을 마시고 같이 지내는 일은 남이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그냥 평범한 일인데 그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아무리 친한 친구, 설령 사촌이나 처남, 매부가 되더라도 그가 갑자기 돈을 벌거나 출세를 하면 그 날부터 왠지 서먹서먹해지고 가까이 하거나 만나기를 망설이는 소심한 성격(어쩌면 이게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혈액형a형의 성향인지도 모르지만. 또 나도 그런 성격을 못버려 평생 아부 한 번 못해보고 늘 아웃사이더로 돌았지만) 그렇게 죽고 못살던 윤정형님과 나 사이에 문득 계급갈등(제가 하사관이 되고 그가 일등병 같은)이 발생하며 자꾸만 서먹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주 맛있는 횟감이 있다거나 아주 중요한 의논꺼리가 있다며 윤정이 형을 억지로 불러내어 술자리에서 지나간 시절 그와 내가 함께 취생몽사하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회상하고 했다. 그런 하루는 억지로 아주 오랜만에 남포동과 자갈치에서 실컷 술을 마신 내가 많이 취한 척 하며 일부러  <완월동의 계단(술 취한 선원들의 천국의 계단, 홍등가 입구)>를 밟자고 해도 그는 완강히 거부했다. 주야장천 마시던 호기, 그 윤정이 형님이 그만 소심한 가장이 되고 만 것이었다.

그 후 내가 6급 주사가 되고 서구청으로 옮겨 6급의 꽃이며 최고의 권력을 쥔 감사계장이 되자 이제 겨우 8급이 된 그는 매번 동사무소의 숙직이라고 변명하며 한 번만 만나자는 나를 기피했다. 그래서 일부러 그를 찾아가 우리가 처녀총각이던 시절 나와 아내와 그가 코스모스가 만발한 사상의 국제화학 뒤 강변을 걷다 문득 강 건너 그의 고향 <도도리, 지금 김해 국제공항>라는 마을에 가고 싶다는 그의 말대로 그와 내가 발을 빼고(신발과 양말을 벗고 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나는 아직 처녀인 아내를 처음으로 업고 그는 나와 자신의 신발과 양말을 들고 낙동강을 건너 끝없이 펼쳐진 초록나라 김해평야의 한 가운데의 어느 나지막한 초가집에서 방금 텃밭에서 고추와 오이를 따온 늙은 주모 할머니가 팔았던 독한 농주에 취했던 이야기며 일부러 그의 생가와 친구 상수(지금의 현철)의 집과 골목을 돌던 이야기까지 하며 겨우 몇 번 만나기는 해도 소주 한두 병을 마시면 냉정하게 일어서 회포를 풀기가 힘들었다.

사진2. 억새가 핀 가을 들녘(호젓한 가을 길에 선 늘 그와 같이 걷던 대저읍 도도리 벌판(지금 김해비행장 일대가 생각남)
억새가 핀 가을 들녘(호젓한 가을 길에 선 늘 그와 같이 걷던 대저읍 도도리 벌판(지금 김해비행장 일대가 생각남).

그런 하루는 공무원교육원에서 만나 퇴근길에 내 아내가 윤정이 오빠가 보고 싶어 한다고 택시에 태워 납치하다시피 집에 데리고 오니 아내가 반색을 하며 술상을 차리는데 화장실이 어디냐고 묻던 그는 그길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부끄럼장이가 된 모양이었다.

그런 그가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은 우리 슬비가 결혼식을 하는 예식장이었는데 수백 명 하객 틈에서 아주 잠깐 악수를 하고 그대로 인파속에 사라져 다문 안부라도 묻고 싶은 나는 그냥 종종걸음을 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뒤 그의 청첩장이 와서 예식장에 가니 반갑게 악수는 하는데 여전히 뭔가 만만찮은 표정은 사라지지 않아 특별히 대화도 못한 채
“아이구, 오빠, 득수오빠!”

그 옛날의 또숙씨가 초등학교 교감쯤 되는 아주 곱게 늙은 풍모에 너름새 좋은 말투로 다가와 제 남편까지 내게 소개시켰지만 그게 끝이었다. 너무나 긴 세월이 흘러 너무나 먼 사람, 그냥 아득한 기억속의 사람이 되고 만 것이었다.

이후 내가 낸 시집과 수필집을 보내도 잘 받았다, 잘 보았다 말이 없이 묵묵부답이고 일부러 전화를 해서 “형님, 오늘 얼굴 한번 보입시다.”
통사정을 해도 그냥
“예, 과장님, 예, 실장님.”
어떤 때는 
“아이구, 국장님.”
마치 당번병인 상등병이 연대장을 대하듯 너무 공손한 말투에 긴 세월이 투영될 뿐이었다.

어떤 사람은 젊은 날 한순간 또는 하루 밤을 지낸 뒤 마치 <닥터지바고>의 오마샤리프나 그의 연인처럼 평생을 그리워하다 마침내 다 늙어 만나니 세월의 강이 너무 멀어 별 감흥이 없더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의 나이 이미 7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둘 중에 어느 하나가 죽기 전에 마지막 한 번 만날 수 있을지...
그냥 그의 건강을 빌어볼 뿐이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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