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짧은 만남, 긴 여운(윤정이 형님1)

에세이 제1170호(2020.11.30)

이득수 승인 2020.11.29 18:20 | 최종 수정 2020.11.29 18:47 의견 0
사진2 해운대 밤바다의 젊은 술꾼들(좌로부터 포장마차주안, 필자, 동직원 윤정씨와 박경일씨.
해운대 밤바다의 젊은 술꾼들(좌로부터 포장마차주인, 필자, 동직원 윤정씨와 박경일씨.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마치 영화 <닥터 지바고>의 줄리 클리스티와 오마 샤리프처럼 한 순간 잠깐 만났다 헤어졌지만 일생을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사람과 결코 잊을 수 없어 그리워하며 방황하는 사람도 있다. 

만 19세 언양출신으로 연산동 동사무소에 다니는 야간대학생 내게 다섯 살 많은 한 사내가 문득 나타났고 그리고는 내 생애를 지배해버렸다. 그 <윤정이 형님>이 이야기를 며칠간 해보기로 하겠다.

나는 공무원 초기에 학교에 다닙네, 소설가가 됩네 하고 공직내부의 보직이나 승진에 별 관심이 없었다. 부산시 첫 발령지는 동래구 연산3동사무소였다. 초량역 대화재 이재민이 집단이주한 정책이주지로 서부영화의 금광(金鑛)촌처럼 성냥곽 같은 4각형의 건물이 끝없이 이어지고 연탄재가 질퍽거리는 도로는 한 낯부터 술 취한 사내들이 칼이나 목발을 휘두르며 싸우기나 하는 곳이었다. 이미 고3시절 울주군의 시험에 합격 9급 공무원 경험이 있는 내가 동료 하나와 같이 부임하자 동장은 무허가건물 수회(收賄)로 공석, 사무장은 교육 중이라 제대군인 2명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경험자인 내게 인감증명서 발급과 주민등록증 발급, 공문서 발송을 시켜보고는 입이 함박만큼 벌어졌다. 첫날이니 저녁이나 먹자고 동사무소로 돼지국밥을 배달해 소주를 마시고는
“이주사, 고생 좀 하소. 우리 둘이는 진작 사표내고 회사로 옮기려고 했는데 아무도 후임자가 오지 않아 동장 관인 넘겨줄 사람이 없어 기다렸는데 이제 이득수씨가 중요한 업무를 전부 볼 수 있으니 이상찬(같이 발령 받은 동료)이가 구청의 공문서를 처리하면 되겠네. 사무장은 한 일주일 뒤면 돌아올 테니 그 동안 인감증명, 주민등록증 발급에 조심하고 관인을 잘 챙기세요.”
하고는 그날 부임한 후배에게 사표서를 주고 가버렸다. 당시는 여러 가지 산업이 조금씩 발전해서 웬만한 회사는 공무원의 쥐꼬리 만 한 월급의 서너 배를 주니 굳이 공무원에 머무는 자가 없었다. 나도 물론 돈을 많이 받는 다른 회사에 취직할 것도 생각해보았지만 공무원이 아니고는 야간대학에 다닐 시간이나 배려가 없을 것 같아 그만 두었다.

이튿날 아침 동사무소에 들린 통장들이 깜짝 놀랐다. 듣지도 보 보지도 못한 스무 살짜리 두 청년이 민원서류를 발급하고 공문서를 수발하는 걸 보고
“당신 누구요?"
"예, 어제 부임한 동직원 이득수입니다.“
하는데 마침 연산3동 3공구에서 양복점을 하며 1통장으로 재직 중인 진외6촌 김화옥 형님이 나타나 12명 통장들을 모두 호출하는데 연탄장수를 하면서 12통장을 맡은 오봉구란 사람 역시 우리 버든마을이 외가라 피차 누구 집 아들인지 아는 사람이라 조무래기 둘이 동사무소를 운영할 1주일간 자신들이 좀 도와주기로 하고 필체 좋은 통장 4명이 오전오후 두 명씩 동사무소로 출근했다. 

사진3 필자혼자 운영하는 동사무소의 업무를 교대로 도와준 통반장들, 사진은 후일 범어사에 소풍을 가서 찍은 것 같음. 입대를 격려하러 구포다리를 찾은 농업고등학교 문예반후배 박관식과 필자 
필자 혼자 운영하는 동사무소의 업무를 교대로 도와준 통반장들. 사진은 후일 범어사에 소풍을 가서 찍은 것 같음. 

간신히 1주일을 넘긴 토요일 오후 단 한명의 동료 이상찬이가 미련 없이 사표를 내었다. 울산에서 여관집 하는 부잣집아들이 경험삼아 시험을 치고 근무를 해보았는데 더 이상은 미련이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더 직접적인 원인은 일주일 내내 냄비에 밥을 해서 간장과 마가린에 비벼먹는 부실한 식사에 지쳤으리라.

단 한명의 직원인 내가 자동으로 숙직을 하고 월요일 아침이 되자 교육이 끝나고 돌아온 사무장이 직원이라고 처음 보는 스무 살 짜리 대학생 하나를 보고 기가 찬지 껄껄 웃었다. 그날 저녁 아주 배불리 저녁을 먹이고 동장 자리가 수습되고 직원 정원 네 명이 보충될 때까지 자네와 내가 동사무소를 끌고 가야 된다면서 야간대학에 꼭 가야 하는 날은 자신이 동사무소를 지키기로 했다. 그리고 이튿날 어디서 사환 한 사람을 데려와 구청에 가서 문서를 수령하거나 청소를 해주어 한층 지내기가 쉬워졌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람은 형편이 급박하면 자연 옆 사람과 서로 의지하고 단합하며 그 위에 같이 술을 마시면서 가정사나 포부를 짐작하면 한층 가까워는 이치였다. 그 시절만 해도 일반적인 세상민심은 동료면 동료, 이웃이면 이웃을 무조건 돕는 거지 해칠 것은 생각도 않는 태평성대 같은 시대였다. 

그래서 스무 살의 나는 쉰이나 예순을 넘어 일흔에 이르는 수많은 통반장과 술을 마시며 행정을 수행했다. 군에 가는 영장 같은 것은 단 하나의 직원이 바쁘니 아예 통장들이 교부했고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지급하는 밀가구 배급도 통장이 전달했고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면 꼭 통장들이 돈을 냈다. 자신들도 나만한 자식이나 동생이 있는데 고학생인 내게 돈을 쓰게 할 수 없다고. 

그렇게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내게 도움을 주었지만 공무원 월급을 다 모아도 한 학기 등록금이 되지 않아 나는 금방 미등록생이 되었다가 천신만고 끝에 은행에 다니는 중학교동창 친구의 빚을 내어 등록했는데 다음 학기에는 등록금의 절반도 되지 않아 그 돈으로 친구의 돈을 갚고 등록을 포기하고 엉엉 울었다. 그 때 동사무소에 새 직원이 부임했는데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제대군인이었다.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몸매가 단단하며 손놀림이 날렵해 글씨쓰기에부터 차드에 이르기까지 행정에 만능이라 좋은 형이 되었는데 그가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는 게 문제였다. 

김해 대저사람 윤정씨는 부모가 정구지를 길러 부산의대에 보낸 장남으로 하필이면 같은 과의 화교(華僑) 아가씨와 정분이 났는데 처가인 중국집과 본가인 부모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해 처녀가 자살을 해버린 것이었다. 남은 총각은 눈이 뒤집혀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술만 마시다 문득 정신을 차려 군대를 다녀와 공무원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실연한 제대군인과 휴학한 소설가 지망생, 거기다 나이 다섯 살 차이 형과 동생으로 불리기에 가장 좋은 두 멤버는 금방 술친구가 되었고 이미 자갈치바닷가와 남부민동 방파제의 회와 지짐과 막걸리에 젖은 데다 완월동, 초장동 꽃 파는 마을에도 그게 지옥의 입구인 줄도 모르로 따라다니며 곧장 술꾼의 길로 빠졌다.

내가 입대를 하기 얼마 전 돌연 제대군인 윤정씨가 사라졌댜. 부산에 집을 하나 사서 장가를 들이려고 부모님이 집 살돈을 미리 맡겼는데 나와 2년 동안을 마시면서 모두 탕진을 해버린 것이었다. 그의 모친과 나보다 한 살 아래 여고생 여동생이 찾아와 윤정씨를 내어놓으라고, 같이 찾자고 여고생으로서는 차마 못 갈 골목을 다 헤매어도 허사였다. 거기다 나 또한 얼마간의 빚이 누적되어 언양의 시촌형님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고 군에 입대할 때까지 끝내 윤정씨는 소식이 없었다. 

일 년이 지나 첫 휴가를 와서 양과점에 근무하는 친구(초등학교동창 김성해)가 일과를 마치기를 기다리느라 영도다리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리어카에 수박을 싣고 시내에서 영도다리를 건너가는 사내 하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형, 형님!”
“득, 득수야!”
하고 둘이 얼싸안고 폴짝폴짝 뛰었다. 그간 어떻게 살았냐고 물어도 나중에 이야기한다고 우선 술이나 한잔 하자며 수박리어카를 도매상에 맡기고 충무동의 횟집에서 충무동골목시장의 파찌짐에 2차, 3차 술을 마시고 마지막엔 어떻게 된지 기억도 없이 술집에서 잠이 깨었다. 그런데 같이 마신 윤정씨가 없어 물어보니 새벽에 먼저 일어나 술값을 내고 나의 밥값과 차비 얼마를 맡기고 가버렸다고 했다. 그렇게 그 기막힌 재회는 단 하루 만에 끝이 나고 말았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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