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반창으로 비록 공부를 잘 하거나 특출한데는 없어도 늘 쾌활하고 장난기도 많고 인정도 많아 졸업을 한지 까마득해도 쉽게 기억나는 친구도 있고 반대로 객지에서나 버스에서 만나도 잘 모르다 새삼스레 인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한때 나와 같은 책상을 쓰는 <짱깨>로 어음상리 마흘에 살던 멸치장사 아들 용호 하학길에 빵이나 과자, 어떤 때는 자기엄마가 파는 멸치까지 내게 먹여주어 어찌 보면 나의 군것질창고 같은 친구였다.
젊은 날에 결핵에 걸려 아들하나를 남기고 아내가 떠나버리자 살림이 넉넉한 그의 어머니와 큰누님과 몇 명의 형제자매가 악착 같이 불쌍한 둘째 아들을 살려내기로 다짐했다. 그리고는 개소주 수십 마리를 먹인 것을 비롯해 악착같이 살려내었는데 반창회를 하거나 총동창회체육대회를 하면 자신의 집에 놀러와 감나무에 다리가 찡겼던 공부는 잘 하지만 운동을 못 하던 버든의 가난한 집 아들로 자신이 먹던 사탕과 과자를 자주 나누어주어도 아깝지 않던 나를 늘 다정하게 챙겨주고 고스톱을 쳐 돈을 잃으면 차비를 주고 출판기념회를 하면 꽤 많은 돈을 주며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내 나이 예순다섯, 다 늙어 글을 쓰러 고향 명촌리로 돌아온 내가 너무 반가워 아내가 부산에 가고 없는 날을 귀신 같이 알아내어 날 납치하다 시피 술집과 노래방에 대려가 도우미의 손을 잡은 채
“친구야, 니 비아그라 없나? 인생 뭐 별 거도 아이다. 니도 더 늙기 전에 비아그라 있으면 한번 쓰고 죽어라. 인생은 절대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낄낄거리다 문득 표정을 바꾸어 자기아들의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주례약속을 한 얼마 뒤 내가 병이 나서 부조만 보낸 결혼식이 끝난 며칠 뒤였습니다. 반창회장 김정이라는 친구의 인력사무실에 고스톱을 치러간다고 기다리라는 전화를 한 뒤 두 시간쯤 뒤였습니다. 용호씨가 아닌 외아들이 전화로
“아버지 갔습니다.”
“그래. 그럼 곧 인력사무소에 도착하겠네?”
“그게 아니고 조금 전에 운명하셨습니다.”
“...!”
평소 천식이 심해 낮에 달모라는 친구와 거의 황토방에 살다시피 했지만 저녁마다 술을 먹거나 친구들과 고스톱을 치고 노는데 병든 몸에 무리가 된 것 같지만 화투패를 섞고 나누고 친구들과 노는 게 그렇게 좋은지 단 한 번도 몸 아프단 소리를 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친구가 죽었지만 동창들은 이미 암세포가 온몸에 전이가 되어 도무지 전망이 없다는 내게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았고 잘못 통지된 동창회방의 메시지로 내가 친구의 죽음을 알고 울먹이며 전화를 하자
“득수야, 니는 여기 올 생각도 말고 그냥 니 마음이나 달래고 있어라.”
성해씨, 경제씨가 그렇게 쉬쉬하더니 장례를 치른 오후에 명촌리로 찾아와서 위로고스톱을 두 시간이나 치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죽은 용호씨와 단짝이 되어 날마다 간월의 황토방에 가서 찜질을 하는 개인택시운전기사 달모씨가 죽었습니다.
역시 밝고 장난 끼가 많은 그는 젊어 49회 동창들의 명물이랄까, 언양에 남은 대표로서 동창회의 전야제와 뒤풀이, 방을 얻어 하룻밤을 지내는 날과 동창체육대회 날에 가장 신명나게 놀고 누구나 잘 어울리는 친구였는데 젊어서부터 악성 당뇨가 심해 음식을 심하게 가리면서도 동창회장을 맡아 분위기가 좋으면 서슴없이 술도 마시고친구네 상가에서 밤을 새워 고스톱이나 훌라를 치는 데도 절대 빠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50대의 제가 주말에 신불산에 등산을 하다 가천리의 입구에서 만나면
“친구야, 니는 소주 몇 병 가져왔노?”
“큰 거 하나, 작은 거 하나. 그리고 족발 한 도시락.”
“잘 됐네. 나는 마누라가 술 못 가져가라고 해서 산 밑에 구멍가게에서 맥주 패트병 큰 거 두 개 샀다.”
하고 등산로 입구 바위위에 부산팀, 언양팀 여섯이 둘러 앉아 얼큰하게 취하도록 마시고 비틀거리며 산에 올랐는데 제가 명촌리로 귀향해 급한 볼일이 있으면 주로 용호씨나 정이씨, 길동씨 같은 반창의 자동차를 타지만 가끔은 자신의 영업용택시를 몰고 와
“친구야, 밥 먹으러 가자. 그저 묵는 기 남는 거다.”
용호씨와 같이 식당에 사거 매운탕이나 감자탕을 시키면
“친구 니 묵을 수 있나?”
“못 묵지. 니가 매운탕을 좋아하잖아? 나고 김치와 시금치로 대충 밥 한 끼 때울 재주도 있고 있다.”
열무김치나 매운 김치를 물에 헹궈 물에 밥을 말아 먹으면서도
“친구 니가 고향에 돌아왔느니 밥은 내가 산다.”
또 어떤 때는 열찬씨가 택시비를 꺼내면
“내가 니 보고 싶어 갔으니 오늘은 공짜다. 다음에 니가 내 보고 싶어 부르면 돈 내라.”
어차피 몸이 약해 하루에 몇 시간은 찜질을 하며 쉬어야 하니까 아침에 나가 부지런히 영업을 해 한 5만원 수중에 쥐면 전화로
“용호야, 내 지금 간다. 준비해라.”
하고 수정마을의 용호씨를 태워 간월의 찜질방으로 가기도 하고 너무 피로하면
“용호 니가 내 데불러 오너라.”
하고 둘이 오후를 같이 보내는데 한번은 나와 셋이 모인 자리에서
“달모야, 니 백숙 좋아하나?”
“좋아하지. 장터 윤씨네 닭집에서 토종닭 크고 질긴 것 사다가 푹 고으면 좋지.”
“우리 집에 큰 솥 걸었다. 내가 엉개나무하고 가시오가피나무하고 구지뽕나무 많이 잘라다가 우리 셋이 닭백숙 한 번 끓여 먹을까?”
“좋지. 기왕이면 장작불 때서 말이야.”
“그래 꼭 한 번 초청할 게.”
한 것이 차일피일하다 용호씨가 죽고 그 달모씨 마저 죽었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도 친구들이 내가 쇼크를 받을까 돠 연락을 안 해 석 달이나 지나 해가 바뀐 뒤였습니다.
장촌의 막내누님과 점심을 먹다
“니 친구 개인택시하는 언양명물 달모씨가 죽었다면서?”
하는 질문을 받은 것이 바로 부음이었습니다.
올해 봄 제 베스트 프렌드 성해씨가 저와 애틋한 마지막 이별을 할 때 유년에서 7순에 이르는 긴긴 세월의 이야기가 다 끝나자
“저승에도 고스톱 판하고 소주는 있겠제? 용호하고 달모도 기다리고...” 하고 이튿날 죽었습니다. 얼마 전 꿈에 세 사람이 고스톱을 치는 걸 보고 제가 같이 끼이려고 하니 달모가
“득수야, 니는 저쪽 판에 가거라.” 40대로 보이는 후배들 쪽으로 황급히 밀어냈습니다. 순간 잠이 깬 저는 갑자기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꿈속에서 달모씨가 제 손을 잡아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처럼 볕이 좋은 늦가을 오후에 문득 생각나는 친구들, 그들의 명복(冥福)을 빌어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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