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비설거지와 사람설거지

에세이 제1163호(2020.11.23)

이득수 승인 2020.11.22 12:28 | 최종 수정 2020.11.22 12:39 의견 0
아들까지 동원해 비설거지를 하는 사광리 변씨네 부인

사진은 고래뜰 농로 가득히 널어놓은 벼를 마침 비가 올 것만 같이 구름이 몰리고 빗방울이 뜨자 일요일이라고 집에 놀러온 아들까지 데리고 사광리 변씨댁이 일껏 자신이 멋지게 그려놓은 여러 장의 판화, 그러니까 천막천위의 발로 널어놓은 벼를 끌어 모아 자루에 담는다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렇겠지요. 자신들과 아들딸까지 한해 양식을 삼으려고 일부러 메벼에 찰벼를 섞어 심어 방아를 찧어 그대로 밥을 하면 자동으로 찹쌀밥이 되는 저 알뜰한 알곡을 소나기라도 덮쳐 물에 젖는다면 다시 말려도 쌀의 질과 맛이 다 떨어져 예삿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50가구쯤 되는 어릴 적 우리 버든마을에 아예 농사를 짓지 않아 비가와도 전혀 비설거지를 할 필요가 없는 비농가가 다섯 집 쯤 있었습니다. 자기 논이 전혀 없이 객지에서 굴러와 딸만 셋을 낳고 <조피>라고 불리는 두부를 만들어 팔고 마구뜰 상하계의 농업용수 부리시 보(湺)를 관리하는 보깡구 박씨를 비롯해 떡장수 미짱엄마, 노름장이 최모씨와 아내가 언양장에서 생선을 파는 동안 셋방에 죽치고 앉아 김치에 소주만 축내는 작은 최씨등이 그런 사람들인데 장날 가끔 언양소전껄의 노름꾼과 주먹장이, 부산의 깡패들을 자기 집에 데려다 노름을 붙이고 구전을 얻어 먹고사는 최씨는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질 것처럼 온천지가 깜깜해지면서 옆집인 우리집과 온 동네가 비설거지에 바빠 죽을 판인데 홍근이, 청근이에 말더듬이 복순이와 막내까지 넷을 방안으로 부르고 축담의 신발을 비가 안 맞게 방안으로 들여놓으면서

“봐라! 다른 집은 비설거지 한다고 집집이 난리법석이지만 우리 집은 암만 비가 와다 신발 챙기고 문만 닫으면 되니 얼마나 편하노? 이기 다 아비 잘 만난 덕인 줄 알아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다 장마가 좀 길어 한 열흘 노름판을 못 벌이면

“암만 장마가 져도 보리쌀 한말 있제, 너거 엄마 궁디도 두리뭉실하니 아무 걱정이 없으니 버든 마을에 내 팔자만한 사람도 없다."
 하고 또 큰소리를 탕탕 쳤지만 그 엉덩이 두리뭉실한 아내는 벙어리였습니다. 그렇게 늘 엉뚱한 짓만 벌이던 그 집은 결국 동네풍습을 망친다고 멍석말이를 벌이니 마느니 하다 도망가듯 인천으로 떠나고 소식이 끊겼습니다.

늘 비설거지의 1번이 되는 장독뚜껑 덮기

중학교 시절 한번은 하교와 동시에 비가 쏟아지자 비설거지가 걱정이 된 제가 부리나케 집으로 뛰어오자 일 년 내내 벽에 기대앉아 운신을 못 하던 아버지가 얼마나 급했으면 기어나오다 시피 장독간에 나와 된장과 고추장독 뚜껑을 덮고 그 자리에 앉아 헐떡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비지를 방으로 모시려는데 손을 저으며 빨랫줄을 가리켜 빨래를 먼저 걷었습니다. 그리고 마당에 깔린 벼를 가운데로 모아 멍석으로 덮으라고 해서 그 위에 갑바까지 덮어 마무리를 하고 아버지를 방으로 모시고 나서 그날 저녁 밥을 지을 풋나무와 보릿짚을 부엌으로 옮기고 산에서 주어다 마당 한 귀퉁이에 널어 말리는 쇠똥이 물에 젖을까봐 그걸 한데 모아 덮어주고서야 설거지가 끝났습니다.

그렇게 농촌사람들이 여름이나 가을철의 비설거지가 큰일이었는데 사실 그보다 한 가지 더 큰일이 있었는데 그건 자식을 설거지 하는 일이었지요. 그러나 중노동과 영양부족으로 폐결핵만 결려도 속절없이 죽어가던 단명의 시대라 살아서 7남매, 9남매를 출가시켜 손주를 보는 경우는 극히 적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28세 늦장가를 들어 7남매의 막내아들을 쉰여섯에 본 아버지는 환갑이 자날 때쯤부터 자리보전을 해 아직 미취학 아동인 막내가 많이 마음에 걸려 늘 걱정을 했습니다. 딸 셋은 스무 살만 되면 논이 몇 마지기 있어 밥 굶을 걱정만 없으면 아무데나 시집을 보내는 간단한 설거지로 결국 무식하고 가난한 남편에게 보낸 딸 셋이 오롯이 그 가난을 물려받기도 했습니다. 

 문닫을 필요도 없이 몸만 들어가면 되는 마초의 집. '이마초'라고 써준 문패가 낡아 내년 봄에 보수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목숨처럼 아끼던 장남을 장가보내 인물이 훤한 며느리를 보고 손자를 안아보고 기뻐하며 눈을 감았는데 그 잘난 며느리를 본 일이 잘못된 설거지라 머슴 살며 모은 논밭과 집을 다 팔아 없애고 형제들과 원수가 지고 말았으니 한치 앞을 못 봤던 것이지요. 그리고 너무 어려 형 밑에 자라게 될 제 막내동생 때문에 차마 눈을 못 감고 밤을 새다 가끔은 동작이 너무 굼뜬 제가 군에 가면 맞아 죽을까 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저는 육군하사로 무난히 제대를 하고 마지막까지 땅 한조각 남지 않는 언양땅에 돌아와 아버지 어머니 산소를 돌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마을이 수용되어 마을사람들이 뿔뿔이 헤어지고 망향(望鄕)제를 지냈는데 이번에는 진장의 산과 밭고 공동묘지가 수용되어 할머니와 우리 부모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까지 제 가장 큰 제산이던 선산(조상무덤)이 다 날아가게 생겼습니다. 차남으로 태어나 늘 천대를 받았지만 제 나이 50, 서기 2,000년도 새 밀레니엄을 맞아 집안의 족보를 새로 내고 산소를 정비해 상석을 놓고 비석을 놓아 집안의 기틀을 정비한 제가 이제는 우리 고향을 모조리 떠나고 겨우 다섯 기(基) 남은 조상의 무덤을 정리하는 집안과 무덤설거지를 맡게 되었는데 그게 다 운명이겠지요. 그래서 망향비에 설거지 담당이라는 표시로 비문을 작성한 이름을 남기고...

지금 국회를 보면 수많은 국회의원과 장관들이 제몫의 비설거지를 않고 서로 떠넘기기에 한창입니다. 그 중에는 남편이나 자식이 비리를 저질러도 가족이라서 차마 외면할 수 없으니 그 불의에 가담한 장관자신도 용서를 받아야 된다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 옛날처럼 멍석말이를 시킬 수도 없는 일이라 이렇게 갑자기 하늘이 흐려진 날 저 거친 들녘에서 벼를 걷는 비설거지라도 한 번 시켜 정신을 차리게 하고 쉽습니다.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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