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명촌리의 만추서경(晩秋敍景)
에세이 제1160호(2020.11.20)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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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9 19:31 | 최종 수정 2020.11.19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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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사이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더니 벼를 베어낸 고래뜰에 드문드문 담을 쌓은 하얀 <곤포사일리지> 틈으로 태화강 10리 대밭에서 날아온 갈가마귀 떼가 낱알을 찾느라 앉았다 떠오르며 스산한 가을 풍경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나지막한 고래뜰의 밤나무와 참나무, 은수원사시나무(현사시나무)에도 희뜩희뜩 단풍이 들기 시작합니다. 단풍은 보통 고도가 높을수록 일교차(日較差)가 클수록 더 붉고 아름답기 마련인데 그건 우리 인간사, 애타는 그리움이나 사랑도 다 그와 같을 것입니다.
고래뜰 지나 모래골못 옆의 비스듬한 언덕을 올라 덕고개를 넘어 오는 길에서 하얗게 머리를 풀고 바람에 홀씨를 날려 보내는 억새와 물억새와 유모차에 콩을 쪄 한가득 담은 등이 기역자로 굽은 할머니를 발견하고 쓴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누렇게 말라버린 오동바래기와 띠풀 사이로 아직도 살아 꿈적대는 사마귀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초가을까지 밤마다 노래솜씨를 뽐내던 귀뚜라미나 여치, 풀무치와 벼메뚜기까지 아미 다 죽어 누런 풀잎 사이에 누워 다시 대지의 혼으로 돌아가는 마당에 더 이상 살아있는 먹이를 구할 수 없는 저 사마귀도 이제 곧 마치 관운장의 청룡언월도처럼 커다란 곡선의 낫을 내려놓고 풀숲에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전에 옹기굴이 있다 뜯긴 풀밭에 아직도 겨울잠에 들지 못한 꽃뱀 너불대 한마리가 추워서 덜덜 떨다 우리마초가 다가가자 동그랗게 말아 붙인 꼬리를 풀며 도망을 쳤습니다. 물뱀에 살모사 같은 이 들녘의 모든 뱀들이 10월 중순 그들의 두목 능구렁이의 긴 울음소리를 듣고 한데모여 능구렁이를 중심으로 동그란 공처럼 몸을 말아 땅속 깊숙이 숨어 겨울잠에 들고 또 고약한 뱀 장수 땅꾼은 그 뱀 구덩이를 찾아 헤매는 판에 저 낙오자 꽃뱀은 오늘 밤 된서리가 내리면 황량한 풀밭 어딘가 저 선홍빛 목덜미 늘어뜨리고 얼어 죽을 것입니다. 늦가을은 역시 쓸쓸한 계절 슬픈 계절입니다.
고래뜰에서 사광리로 돌아오면서 오늘도 변씨 부인의 판화(版畫) 한 점을 마주쳤습니다. 제법 마른 무시오가리(무말랭이)와 이제 갓 썰어 넌 무말랭이가 묘한 구성으로 다가오는데 변씨 아주머니의 판화는 언제나 서정(敍情)이 넘칩니다.
벌써 마사이족 사내의 머리카락처럼 꼬불꼬불 원조 누들의 모습을 보이는 멍석 아래쪽의 저 무말랭이는 다음 장날쯤 변씨네 두 내외가 언양장의 건어물상에 가서 잘 삭힌 통마리 오징어와 쪽파를 조금 썰어 넣고 <오징어 무시오가리 채>도 만들고 남은 것은 삭히기도 하고 멍텅구리와 무말랭이를 넣고 지져 영감님의 반찬이나 반주(飯酒)의 안주로 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늙어간다는 것도 참 정갈하고 아름다운 것이겠지요.
명촌리의 전원주택 중에서 가장 만추의 서경이 고운 사진도 한 장 덧붙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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