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짧은 만남, 긴 여운(윤정형님2)
에세이 제1171호(2020.12.1)
이득수
승인
2020.11.30 16:04 | 최종 수정 2020.11.30 16:21
의견
0
그렇게 휴가를 마치고 귀대를 한 후 부산교육대학교 2학년인 그의 동생 또숙씨로부터 편지가 왔다. 오빠 윤정씨의 행방을 묻는 내용이었다. 거기에는 내가 입대하기 얼마 전까지 김해에서 정구지농사를 짓는 부모님이 평생 모은 돈으로 부산에 집을 한간 마련하라고 당시 돈 300만 원을 맡겼는데(당시 9급 공무원인 내 월급은 2만원 미만) 그 거금을 술 마시고 외박하는데 거의 탕진하고 잘 다니던 동사무소마저 사직하고 잠적해버려 나의 입대 전에 이제 부산으로 이사온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 또쑥씨와 나와 셋이 남포동에서 완월동을 거쳐 초장동에 이르는 유흥가를 며칠 밤이나 돌아다녔는데 결국 찾지 못한 전력이 있어 나와도 비교적 편한 사이였다.
그 편지에는 또 한 보름 전 쯤 새벽에 며칠이나 굶은 듯 초췌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와 몇 며칠 내처 낮잠만 자고 다시 홀연히 사라졌는데 어쩜 득수오빠가 휴가를 오고 그래서 만났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여자의 직감은 역시 무서웠다. 그렇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간신히 수박장사로 버티던 윤정씨(술을 마시면서 누군가 동거한다고 했음)이 오랜만에 나를 만난 김에 수중의 돈을 톨톨 털어 술을 마시고 잠을 재운 뒤 돈이 떨어져서 여자까지 버리고 귀가했고 그렇게 며칠이 지나 어떻게 동거녀와 연결이 되어 다시 나간 모양이었다. 자기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아낌없는 성격대로 알량한 수박장사 밑천을 모두 나를 위해 써버린 것이었다.
다시 세퍼드를 훈련시켜 풀이 무성해 눈밭처럼 도망자의 발자국이 남지 않는 여름철에 간첩과 탈영병을 잡는 <군견훈련소>에 근무하면서 철원의 백골부대 수색부대로 군견 2마리와 사병 2명을 인솔해 파견대장으로 나간 나는 아무의 간섭도 안 받는 지루한 시간에 가끔 통일촌에 나가 호기심 많은 접전지역 아이들과 세퍼드를 중간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농사일에 고된 농부들이 먹는 집에서 담은 막걸리나 소주를 사다(개 두 마리의 부식비가 우리 병사 3인의 봉급의 몇 배가 되어 돈 걱정이 없었음) 군견막사가 딸린 텐트에서 술을 먹고 낮잠을 자다가 정신이 맑은 날은 아직도 못 버린 소설가의 꿈에 사로 잡혀 대학노트를 사다가 긁적거리기 시작한지 6개월 만에 원고지 2천매의 장편소설 <옹기굴뚝>에서>와 <신불산 엘레지> 같은 단편소설을 세 편이나 썼는데 그게 내 평생을 두고 가장 건강한 몸으로 아무 방해 없이 집중해서 소설을 쓴 기간이었다.
그리고 밤이 되어 휴전선의 고지위에나 철책선에 달이 걸리면 저 윗쪽 시꺼먼 북한 땅을 바라보다 철조망을 붙잡고 울기도 했다. 나이 스무 셋이 되도록 낯선 항구에서 너무 많은 경험을 한 애늙은이는 홀로 된 어머니나 외톨이소년으로 지내는 동생걱정보다는 입대 전에 홀연히 내 앞에 나타난 내가 평생 그리워하고 열권 가까운 연애편지 대학노트를 보냈던 사람이 이제 학생이 아닌 성숙한 여인이 되어 성장을 하고 나타났는데
“거 봐. 니가 좋아하는 여자는 단지 말이 없었고 내가 좋아하는 여자는 죽었는데 니 여자는 살있으니 이렇게 찾아오잖아.” 신이 난 윤정씨가 곧 입대를 한다고 입성이나 신발이 다 허술한 나를 위해 양복과 구두를 빌려주고 자시 손목시계까지 채워 데이트를 보내던 생각이 나면서 단 한 번의 데이트 후 다시는 못 만난 연인이 생각날 때마다 그 데이트를 위해 온갖것을 다 베풀던 윤정형 생각이 더 간절해질 때도 있어 어떤 날은 육군하사 계급장을 단 멀쩡한 젊은이가 ‘형님아. 윤정형님아!’를 되뇌며 울기도 했다.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인물이 훤하고 손재주가 좋을 뿐 아니라 매우 다정다감한 성격이라 노래도 곧 잘 했는데 하루는
“양정에 있는 술집 <현철과 벌떼들>의 리더 현철이가 사실은 내 고추친구 강상수야. 우리 김해 정구지 밭에서 큰 사람들은 코흘리게만 면할 나이가 되면 모두가 가수를 빰치게 되지.” 하고 호언장담하면서고 그 긴 술꾼의 행각에 단 한번도 <현철과 벌떼들>에 가지 않았는데 그건 외로운 농촌총각으로 자란 그와 나의 국화빵틀에서 찍어낸 것 같은 공통점, 아무리 가깝고 친한 사람이라도 그가 출세를 하거나 돈을 벌면 괜시리 더 소원해지면서 절대로 그이 신세를 지지 않으려는 반동의 기질이 충만했기 때문이었다.
윤정형은 그 타고난 노래실력으로 당시 개국한지 얼마 안 되는 부산 mbc에서 운영한 프로그램 <제 1회 부산시 동대항 친선 노래자랑대회>에 나는 담당자가 되고 그는 세 명의 가수 중 선두주자가 되어 나훈아의 <강변에 살고싶어>를 유창하게 잘도 불러 예선전에서 중구의 주택가인 영주2동을 꺾었는데 2차전에서는 노래 잘하는 술집아가씨가 넘쳐나는 서면 유흥가 부산진구 부전1동과 붙어 잽도 못 날려보고 지고 말았다. 그러나 형제처럼 친한 윤정형과 내가 하나는 선수(가수), 하나는 담당자로 가장 편하게 외고 펴고 술을 마시던 시절이었다. 그의 노래 <강변에 살고 싶어>를 회상해본다.
날이 새면 물새들이 시름없이 나르고
꽃 피고 새가 우는 논밭에 묻혀서
씨 뿌려 가꾸면서 땀을 흘리며
냇가에 늘어진 버드나무 아래서
조용히 살고파라 강변에 살고파라.
<시인·소설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