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모진 목숨 태어날 때1

에세이 제1189호(2020.12.19)

이득수 승인 2020.12.18 11:21 | 최종 수정 2020.12.18 11:50 의견 0
 1.신불산전경
신불산 전경

1951년 대보름 아침이었다. 버든 마을 우리아버지 명촌어른 눈앞에 펼쳐진 신불산에서 영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간밤에 산사람, 빨치산들이 일부러 지른 산불이 사위면서 아직도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헛간에서 소밥을 담아줄 키를 찾던 아버지 기출씨의 눈에 무너진 토담 사이로 보이는 뿌옇게 연기에 싸인 간월산에서 신불산 칼바위를 거쳐 취서산과 사자바위로 이어지는 여러 갈래의 산줄기에는 아직도 녹지 않은 잔설이 희끗희끗 했다. 그렇게 스산한 사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뚝 솟아 웅장한 산세에 넓고 아늑한 골짜기를 펼쳐 언제 보아도 당당한 기상과 넉넉한 품새의 신불산은 오늘도 의젓하기가 한결 같았다. 

난리가 나면서 어수선한 것은 비단 시국뿐만이 아니었다. 농사일과 닭장사만 해도 늘 바쁜 판에 군수물자를 나르는 부역을 나가고 지서 보초를 서러 다니느라 집안을 돌보지 못 해 마른 쇠똥이나 재 같은 보드라운 거름과 농기구를 넣어 놓는 헛간도 엉망진찬이 되었다. 개똥도 약에 쓸려면 귀하다는 말처럼 수시로 곡식을 부러뜨리거나 꽃과 열매를 떨어뜨리던 바람이 하필이면 콩이나 팥, 참깨나 들깨를 디루는 날이면 죽은 놈 콧김보다도 약하거나 아예 일지도 않아 부녀자들이 키를 찾아 일일이 손으로 까부리는 채이질을 하여야 했다.
 
매일 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신불산만 바라보면 마음 한 구석이 어딘가 불안하고 찝찝한 것은 비단 기출씨뿐 아니라 언양장에 모이는 장꾼들이나 읍내사람 모두가 다름이 없었다. 언제 빨갱이가 내려올지, 무엇을 빼앗아 갈지, 사람은 안 다치고 가축들이나 무사할지... 늘 불안한 마음에 지서의 순사가 순찰을 돌아주는 읍내를 뺀 성 밖의 마을에서는 저녁마다 다 큰 처녀들을 고래에서 파낸 숯 검댕을 칠해 콩밭이나 대밭에 숨겨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애써 가슴을 진정시킨 기출씨가 이제 막 보리쌀이 반도 넘게 섞인 조밥에 김치와 콩나물과 김치를 함께 얹은 소밥을 주면서 또 혀를 끌끌 찼다. 시국이 험하니 짐승까지 제대로 못 얻어먹는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람마저 그야말로 개 보름 쇠듯 오곡밥도, 귀밝이술도 없어 간단히 맨밥으로 먹는 판에 말이다. 

예년이면 찹쌀과 좁쌀, 팥과 수수, 기장 등 대여섯 가지 잡곡을 넣은 밥에 콩나물, 도라지, 고사리는 물론 모자반과 미역과 톳나물, 지게꼬리 같은 해초에 고무재의 못이나 니리미 미나리꽝 도랑에 피는 몰에다가 말린 아주까리 잎에 나물취, 미역취에 다래나무순까지 여남은 가지가 들어간 갖은 나물에 참가자미와 두부를 넣은 찌게로 아침을 먹고 설에 먹다 남은 강정과 술로 귀밝이술을 마시고 그 갖가지음식을 조금씩 키에 담아 소에게 주면서 소가 무슨 나물을 먼저 먹느냐를 보고 한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 마련이었다.

 2.대보름 달집이미지
해운대해수욕장 정월 대보름 달집 태우기 [CC BY-SA 3.0]

같은 가축이면서 개에겐 따로 찰밥은커녕 멸치대가리 하나도 주지 않는 법이라 사람들은 형편이 좋지 않아 세시풍속을 잘 못 챙기는 것을 <개 보름 쇠듯 한다.>고 했는데 난리중인 그 해는 개 아니라 사람마저 개 보름 쇠듯 하는 판이었다. 

마침 삽짝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드는 둘째 딸 순찬이를 보고 
“와? 무슨 일이고?” 
얼굴에 돋기 시작하는 여드름을 찬찬이 들여다보며 기출씨가 물었다.
“빨리 숨거나 도망가소! 순사가 또 아부지 잡으러 온담더.”
“순사가 와?”
“늠이엄마나 부뜰이엄마나 누가 찔렀갰지. 아부지가 뺄갱이한테 부역하러 갔을 때 뺄갱이한테 붙어서 늠이하고 부뜰이아부지 두 사람을 지주로 몰아 죽게 하고 혼자 돌아왔다고 말이야.”
“택도 아인 소리다. 내가 뭐 때문에 한마실의 이웃을 해코지하겠노?”
“아이다. 그 사람들은 아부지의 생질, 그러니까 우리 고종사촌이 되는 보삼의 만택이오빠가 뺄갱이대장이라서 아부지도 빨간 물이 들었다고 소문을 낸다카더라.”
“택도 아인 소리. 그 사람 둘이는 신불산을 넘어오다 너무 춥어서 잠시 담배만 한 대 피우고 가자하다 눈 속에서 얼어 죽은 기라. 내사 마 담배를 안 피우니 곧장 걸어와서 살았고.”
“그래도 순사들이 잡으러 오면 바린 말 하라고 일단 사람을 두들겨 팬다 아이가? 나중에 밝혀지더라도 일단은 도망가는 기 안 났나?”
“아이다. 곧 2월 영둥이 되고 눈이 녹으면 두 사람의 신체가 찾아질 끼다. 그라면 아무 일도 아일 낀데 뭐. 나는 안 갈란다.”

기출씨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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