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만병통치약 열합죽
에세이 제1191호(2020.12.21)
이득수
승인
2020.12.20 19:58 | 최종 수정 2020.12.20 20:12
의견
0
보통 돌담치라고 부르는 열합(裂蛤)은 아마도 경상도 또는 울산지방의 사투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옥편에 열합이라는 한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부터 있었던 어물임에 틀림이 없다.
담치 또는 돌담치라고 부르는 검은 껍질의 조개종류은 아마 지상에서 가장 흔한 어패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샘이나 강물이 가까운 산기슭이나 바닷가에 살며 사내가 순록이나 물개류를 사냥하고 아낙이 여러 가지 열매와 곡식을 채취하여 양식을 해결하던 선사시절에 움직임이 거의 없어 가장 손쉽게 잡을 수 있어 늘 배고픈 원시인에게는 거의 축복이나 다름없는 식량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특히 많은 조개부지(패총, 貝塚)에는 반드시 굴이나 담치, 가리비 같은 조개껍질이 켜켜이 쌓여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더욱 놀라운 점은 40년의 꽉 막힌 공직생활을 마감한 내가 5년간에 걸쳐 무려 21개국을 여행했는데 동양과 서양, 남반구와 북반구의 구별이 없이 가는 곳마다 우리 부산사람들이 해운대나 자갈치의 포장마차에서 술안주로 먹는 이 담치가 요리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니 원시식품인 돌담치가 지금껏 인류의 주요 메뉴가 되는 셈이다.
그 중에서 가장 놀라운 일은 양식(洋食) 또는 이탈리아인의 주식이라고 할 수 있는 스파게티(파스타)에는 우리 동양인이 일상으로 먹는 담치와 토마토캐첩이 그 주재료인 점이었고 이탈리아주변의 스페인, 프랑스와 포르투갈, 바다건너 아프리카의 카사블랑카 같은 지방의 유서 깊은 식당에도 매끼 식사엔 어김없이 이 돌담치와 대구살로 만든 요리가 나왔다. 남반구 뉴질랜드의 크고 푸른 담치(진주담치라던가)는 사람의 건강과 미용에 좋다면서 여행을 준비하던 아내가 미리 구입대상으로 메모를 하여 몇 가지 담치제품을 사오기도 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도 담치 또는 돌담치의 식용역사가 깊은 모양, 바다에 가까운 언양지방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절대 빼놓지 않는 생선이 첫째 고래상어 같은 거대한 상어의 살코기인 <돔배기>로 산적을 하고 탕을 끓이는 것과 둘째 돌담치중에서 가장 커서 아기주먹 만한 선홍색 담치를 따로 열합이라 부르며 그 요상한 생김새가 상징하는 여성 또는 딸의 이미지를 차용, 만약 제사상에 열합을 놓지 않으면 시집간 딸이 못 산다고 해서 반드시 놓곤 했다.
제사를 다 지내고 음복을 할 때 가장 먼저 손이 가는 것이 선홍색의 속살이 아름다운 그 열합이라 그런지 우리 언양지방에선 일반담치나 돌담치대신 열합이라는 마른 담치를 무슨 영약처럼 신성(神聖)시 해서 농사일에 지친 가장이 몸살이 나거나 아이들이 고뿔이 들면 바로 언양장이나(장날이 아니면 건어물상)에서 짚으로 꿴 열합을 사와 찹쌀을 넣고 죽을 끓이고 금 쪽처럼 귀한 계란을 하나 풀어서 동치미나 맨 간장 같은 맑은 반찬과 함께 상을 차려주었다. 물론 어릴 적의 나도 여러 번 그 열합죽을 먹으며 고뿔이나 몸살을 이겨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맛이나 영양보다도 죽 그릇에 흩어진 선홍색 열합 살과 계란 노른자와 흰자의 조화가 음식이라기보다도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 같기도 했다.
식탁에 앉아 밥그릇을 쳐다보면 그만 진땀이 나고 쇠고기 같은 좀 특별한 음식을 먹으면 자꾸 배탈이 나고 숨이 가쁘고 어지러워 살맛이 뚝 떨어져 몸져누운 어느 잘 우연히 옛날에 어머니가 끓여주던 열합죽이 생각나더니 금방 군침이 돌았다. 아내한테 이야기를 하니 아내가 부산의 생선가게에 미리 주문해 근 보름 만에 집에 돌담치가 도착해 오늘 처음 죽을 쑤어 아내와 마주앉아 먹고 있다.
그 많은 신약과 주사가 다 안 듣는 이 막바지에 이 단순한 자연식품이 무슨 큰 효과가 있으랴만 나는 어릴 적 어머니의 손길과 이내의 정성, 그리고 바위에 다닥다닥 붙어 악착 같이 살아가는 돌담치의 생존력에 도취되어 참으로 오랜만에 단숨에 열합 죽 한 그릇을 비워냈다. 감사한 일이다.
<시인·소설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