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명촌리의 빈 들녘은 누가 지키나

에세이 제1188호(2020.12.18)

이득수 승인 2020.12.17 17:27 | 최종 수정 2020.12.17 17:37 의견 0

 

 사진1 겨울억쇠와 솔쇠가 이웃한 모습 10. 24
 겨울억쇠와 솔쇠가 이웃한 모습

“황금빛 벌판의 추수가 끝난 뒤 어느 새 회갈색으로 변해버린 명촌리의 들녘은 누가 지키는 것일까요?”
만약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제 손녀처럼 도시에서 사는 아이들은 단번에
“저기 겹겹이 쌓아놓은 공룡의 이빨!”
하며 논배미와 길에 기다랗게 쌓아놓은 곤포사일리지를 가리킬 것입니다. 곤포사일리지는 알곡을 타작하는 콤바인이 넓은 논배미를 운행하며 단 번에 벼를 베고 알곡을 털어 거대한 자루에 담고 마지막으로 마치 암탉이 알을 낳 듯 하얀 비닐 곤포(자동적으로 볏짚을 소들이 먹기 좋게 띄우는 역할을 함)로 동그랗게 말아 논바닥에 툭 떨어뜨리면 또다른 농기계 트랙터가 와서 농로에 길쭉하게 쌓아놓고 사철내내 소들을 사료로 씁니다. 그러나 들판마다 하얗게 쌓인 곤포사일리지는 주로 황갈색이나 회갈색의 쓸쓸한 겨울들판과 어울리지 않게 인공적이라 정답에서 뺍니다.

다음 만약 마을회관에 모여 커피도 마시고 화투도 치고 동네 돌아가는 이야기, 특히 남의 집 자식들이야기에 해지는 줄 모로는 할머니들은
“아, 농사철도 아닌 겨울 들판을 왜 지켜? 우리 같은 할마시들은 겨울 들판에 나갔다 청도운문산 칼바람에 괜히 얼어 죽기나 하지.”
단순해서 편안한 자신들의 삶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답변을 할 것입니다. 

그럼 명촌리에 귀촌한지 5년이 좀 넘는 단골 산책객 마초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저는 우선 겨울의 정의를 차가운 바람과 어둑한 햇빛이 상징하는 거칠고 쓸쓸해서 많이  그래서 외로운 계절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들녘을 지키는 존재는 벼를 멘 논둑이나 농로, 저수지나 산기슭에 붙은 밭둑에 어김없이 피어 초겨울에는 희고 풍성한 꽃술을 흩날리다 늦겨울이면 그 포근한 꽃술을 다 날리고 나이든 사람의 피부에 핏줄이 드러나듯 가는 꽃자루만 남은 억새와 솔쇠, 개솔쇠, 수크렁, 띠풀 같은 마르고 키 큰 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볼품없는 마른풀도 보기에 따라서는 어느 소읍의 간이역에서 길을 떠나는 정인에게 손을 흔드는 여인의 모습으로 들길을 지킨다고 생각합니다.

사진2 씨앗이 든 깍지가 특이한 모습의 개솔쇠
씨앗이 든 깍지가 특이한 모습의 개솔쇠

또 특히 울산지방에만 있는 태화강 10리 대밭의 갈가마귀가  모든 식물이 말라 퇴색한 황갈색의 시야에 거대한 그물처럼 새까맣게 내려 앉아 추수할 때 떨어뜨린 볍씨를 한 동안 주워 먹고 다시 돗대기시장처럼 시끄러운 울부짖음으로 한 동안 귀를 얼얼하게 하고 사라지는 갈가마귀 떼가 주인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너무 시끄럽고 동적인데다 빛깔마저 우중충한 검정색이라 겨울들녘의 주인이 아니라 불청객으로 기부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야기만 길었지 결국은 촌사람답게 늘 눈에 익은 억새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데 다른 사람과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저는 겨우내 빈 들녘을 지키는 억새들의 친구들인 솔쇠, 개솔쇠, 수크렁, 띠풀, 마른 강아지풀을 하나하나 구별하고 그들도 억새처럼 겨울들녘의 당당한 주인으로 인정을 하는 겁니다. 

 사진3 암탉이 알을 낳듯 동그란 곤포사일리지 하나를 떨어뜨리는 타작마당의 콤바인(10. 13)
암탉이 알을 낳듯 동그란 곤포사일리지 하나를 떨어뜨리는 타작마당의 콤바인

그런데 좀 더 주의가 깊은 사람이라면 저는 왜 겨울들녘에 아무 의미도 없이 흩어진 마른 풀들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며 하나하나 이름까지 불러주나 하는 점일 것입니다. 그 답은 이렇습니다. 저 같은 촌사람 특히 농사를 짓고 꼴을 베던 사람들이면 벼를 베어낸 늦가을의 변화, 예를 들어 고마이대, 쇠무릎, 여뀌풀, 바랭이. 오동바랭이들이 운문재를 넘어오는 차갑고 황막한 바람에 저마다 잎을 떨어뜨리고 가지나 동체가 부러져 바람에 날리다 어느 구덩이에서 썩어 이 들녘의 풍요한 내년을 기약한다든지 그 풀잎 속에 끝까지 은신하던 메뚜기나 방아개비, 소금쟁이가 얼어 죽는 것도 함께 보듬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겨울들녘은 결코 바람만 사는 어둡고 쓸쓸한 땅이 아니라 억새와 갈대가 서걱대고 그의 친구들인 솔쇠, 개솔쇠, 수크렁과 띠풀이 서로 등을 대고 속삭이는 소리와 시야의 모든 광경과 바람이 비로소 포근한 겨울의 바탕색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춥고 쓸쓸한 곳으로 생각하는 겨울 들녘도 참으로 많은 표정과 이야기가 있습니다. 볕살이 따뜻한 오후에 여러분도 그 매력의 바다를 한 번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시인·소설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