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모진 목숨 태어날 때4
에세이 제1193호(2020.12.23)
박기철
승인
2020.12.22 18:43 | 최종 수정 2020.12.22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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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하던 두 사람이
“보소, 명촌아재요. 춥고 배고프고 힘도 없으니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숨 좀 돌립시더.”
간청을 했는데
“잔소리 말고 그냥 가재이. 앉아 쉬면 무르팍 언다. 장개이얼면 끝장이다. 담배는 걸으면서 피아라.”
단호히 거부했는데 어느 순간 따라오는 발자국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기어이 말을 안 듣고 담배를 피우는 가 싶어
“봐라! 이 사람들아!”
“어이, 내 말 들리나!”
소리쳐도 반응이 없었다. 필시 담배를 피우느라 쪼그리고 앉았다가 그대로 무르팍이 얼어 눈밭에 쓰러진 모양이었다. 얼른 뒤돌아가서 깨워서 데려와야겠다고 돌아서던 그가 그만 우뚝 발을 멈추었다. 강원도 주문진과 거진항의 포구에서 또 태백산맥의 명태덕장이나 숯 굴 어름에서 수도 없이 얼어 죽은 강시(僵尸)를 본 기억, 포항에서 떼다가 언양장에서 팔던 커다란 대구나 나무등걸처럼 꽁꽁 언 송장들이 떠올라 그는 치를 떨었다. 설령 눈밭을 되돌아가 반송장이 된 사람을 깨워 데리고 온다 해도 한 사람이 아닌 둘을 감당할 수도 없고 그러다간 자신까지 셋 다 곱다시 죽고 말 형편인 것이었다.
“봐라! 내말 들리나? 들리거든 내 발자국 보고 잰잰이 찾아오너래이. 내 먼저 간데이!”
이미 글렀다 싶으면서도 깜깜한 밤하늘에 대고 거푸 소리치고는 발을 돌렸다. 겨우 마을로 들어온 기출씨도 삽짝 문을 잡고 꽈당 쓰러졌는데 동태처럼 꽁꽁 언 남편을 명촌댁이 물을 끓여 온몸을 닦아주어 겨우 숨이 돌아왔다고 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의 가족이 기출씨를 찾아와 울고불고 난리가 났지만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봄이 되어 녹을 때까지 두 사람이 죽어 누워있을 금강골로 갈 수가 없었다.
음력 2월 초하루 영등할매가 시도 때도 없이 동서남북으로 불어대는 오줄없는 바람으로 신불산의 눈을 죄다 녹이고 그 눈 녹은 땅에 배배추가 돋아나고 재피라고 불리는 초피 순이 올라올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는 기출이의 말을 졸지에 남편을 잃은 두 아낙은 도무지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윙윙 거리는 겨울바람에 잠을 설쳐 이불자락을 뒤척이며 온갖 해괴한 상상과 지레짐작으로 잠을 설친 두 아낙은 하루하루 날이 지날수록 수십 년을 함께 산 이웃인 기출씨를 자꾸만 의심하게 되고 마침내 기출이의 생질 만택이가 빨갱이두목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 만큼 틀림없이 기출씨가 방앗간 집 머슴 덕대와 한 통속으로 빨갱이와 한 편이 되어 입당하지 않는 두 사람을 헤치고 빨갱이의 앞잡이로 혼자 내려온 것으로 의심하게 되어 그렇게 중남지서에 여러 번 고발하게 된 모양이었다.
순경이 아무리 얼러대도 기출씨는
“아니, 사람 죽은 시체가 어디 걸어갈 것도 아니고 눈만 녹으면 금방 밝혀질 일을 괜히 생사람 잡소?”
도로 핏대를 올렸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물러간 순경이 다시 나와서 어르기를 여러 번 마침내 2월 영등이 지나자 죽은 두 사람의 가족과 순경 둘이 기출씨를 앞세우고 금강골의 잔설을 헤치고 두 사람을 찾아 나섰다. 기출씨가 분명 이 쯤 될 것이라고 지목한 곳에서는 도무지 벗겨진 지게나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남편을 잃은 두 아낙이
“저것 보라고, 저 양반이 사람을 헤치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틀림없제?”
순경에게 떼를 쓸 때쯤 사방을 살피던 기출씨가 가파른 언덕길 아래 바위모서리에 얼크러진 머루다래와 으름의 넝쿨을 가리켰다. 뒤집어진 지게목발이 보이는 것이었다. 이어 한겨울 처마에 매달아 잘 얼린 대구처럼 꽁꽁 얼어 원형이 그대로인 두 시신이 발견되자 두 사람의 처자식들은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비로소 혐의를 벗은 기출씨가 아직도 감지 못한 두 사람의 눈을 감겨주었다. 급한 대로 가매장을 하고 돌아온 그들은 난리 중에 진장까지 운구하기도 힘들어 한 달이 지난 삼월삼진께 인근의 양지쪽에 묻어주고 돌아와 감자를 심고 못자리의 볍씨를 뿌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어이없이 죽어나는 전쟁 중이라도 산사람은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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