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모자(帽子) 부자, 마초할배2

에세이 제1197호(2020.12.27)

이득수 승인 2020.12.26 19:08 | 최종 수정 2020.12.26 19:38 의견 0
죽은 친구가 사준 맥고모자와 제 글을 좋아하는 문학지망 주부가 사준 여름용 중절모
죽은 친구가 사준 맥고모자와 제 글을 좋아하는 문학지망 주부가 사준 여름용 중절모

당시 그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제 아내, 풀이 죽기도 하지만 화가 채여 자다가 가위에 눌리고 침대에서 떨어지는 저를 안타까워하던 아내는 이침 식사가 끝나면 날마다 제 머리를 프라이기로 부풀리고 스프레이를 뿌렸습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시인의 자존심과 눈빛 하나만 남은 저의 자존심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이지요(아내는 우리 아이들이 중학생 때 미용기술을 배워 한 3년 미장원을 해 돈을 조금 벌었지만 아이들의 성적이 떨어지자 미련 없이 그만 두었음)

제 나이 70이 든 늙고 병든 나이에 문득 아내가 사다준 나까오리(중절모)와 도리구찌(새 주둥이 모자)를 써보자 아내는 물론 아들과 딸, 사위와 며느리까지 둘다 참 잘 어울린다고 깔깔 웃었는데 이제 겨우 아홉 살, 여덟 살이 된 세 손녀도 하나는 제가 교장선생님 같다고 했고 하나는 화가선생님 같다고 하고 하나는 인기배우 같다면서 기뻐했습니다. 세상에 직장에 다니며 용모를 뽐내고 처녀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야 할 나이에 절대로 멋이나 맵시가 안 나던 제가 70이 다되어 겨우 모자가 머리에 붙고 눈빛과 어울려 멋인 난다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날 이후 사소한 일로 읍내장에 가서나 농약방이나 병원에 갈 때도 저는 검정정장(한복도 있음) 잘 차려입고 외출을 하면 식당의 여주인도 반색을 하지만 누구보다 흐뭇한 이는 제 아내라 저는 매번 외출할 때마다 아내의 컨택에 따라 옷을 입는 멋쟁이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파란 옷의 셔츠와 잘 어울리는 도리구찌 모자를 쓰고 이야기를 하는 모습은 제 포토 에세이집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의 타이틀이 되기도 하고 아침마다 제 에세이를 받아보는 단톡방 <미인천하(60여 후반의 여고동창 모임) 멤버들이 멋있다고 해서 무엇보다도 기쁩니다.

사진2.제 딸이 사준 등산모자와 직장에서 산불감시를 나갈 때 쓰던 모자.
제 딸이 사준 등산모자와 직장에서 산불감시를 나갈 때 쓰던 모자.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난 해 제가 에세이집을 내자 경기도 안산에 사는 40대 후반의 하유경이란 시를 공부하는 주부(제 사위의 초등학교동창생)이 저와 아내의 모자를 세트로 사다준 시원한 여름용 중절모도 있고 죽은 제 <절친>인 김성해씨가 죽기 전에 우리 집까지 갖다 준 한여름용 맥고모자(스튜어디스 며느리와 모스크바 여행 중에 며느리가 사준 것)처럼 가슴 아픈 사연도 있고 제가 공무원시절에 쓰던 산불감시 모자와 제가 정연퇴직을 하자 제 딸이 고르고 골라 사준 운동모도 있어 잘 안 쓴 모자까지 근 15개의 모자가 각각 옷걸이와 집안 여러 곳에 포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 하는 외출에 무슨 모자를 쓸지 고민할 때가 다 있습니다.
 

사진3. 제가 명촌별서를 개척할 때 쓰던 작업모(몸이 아픈 요새는 거의 쓰지 못 합니다.
제가 명촌별서를 개척할 때 쓰던 작업모(몸이 아픈 요새는 거의 쓰지 못 합니다.

저는 이제 결코 가난한 몽골리안 시골소년도 아니며 외로운 고학생도 아닌 당당한 명촌리의 노인에 사랑스런 손녀 넷과 마초의 할아버지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멀리서 돈벌이에 고생하는 아들딸과 그들의 짝을, 매일 발 치료를 도와주는 아내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런 날은 저도 매우 행복한 노인인 것 같습니다.

平理 이득수
平理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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