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모진 생명 태어날 때8
에세이 제1199호(2020.12.29)
이득수
승인
2020.12.28 18:37 | 최종 수정 2020.12.28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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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고 아직 물 한 모금을 넘기지 못 한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방에 들어온 순찬이가 맥을 놓고 널브러진 명촌댁을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아이를 낳느라 용을 써서 그런지 아이를, 그것도 모처럼 낳은 아들을 갖다버리라는 기출씨의 말에 섧어서 그런지 얼굴이 온통 땀인지 눈물인지도 모를 물기에 젖고 눈두덩이 푸석푸석 했다.
“엄마-”
순찬이가 다가가 앉으며 손을 잡는데 슬며시 눈을 뜬 명촌댁이
“야야, 쌀이 없제. 너거 아부지 보고 오늘 집에 올 때 보리쌀이라도 좀 팔아오라 캤는데 빈 걸로 온 모양이제. 할 수 없다. 니 지금 진장 밭에 가서 열무를 좀 뽑아 다듬어서 언양 장에 가서 팔면 돈이 몇 푼 될 끼다. 그라면 고기는 못 사도 조개나 며루치라도 좀 사오너라. 그라고 열무 뽑으러 갈 때 감자도 좀 캐서 금찬이, 덕찬이 좀 삶아 믹이라.”
말하자
“새야, 니는 엄마하고 덕찬이 단디 지키고 있거라. 금찬아, 니는 내하고 같이 가고.”
소쿠리를 찾아든 순찬이가 종종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막상 밭에 도착하자 생각하던 것 보다 열무가 아직 덜 자라 몇 단이 되지 않았다. 아직 하지가 멀어 감자도 방금 한창 알이 드는 판이라 아까운 생각이 들어 우선 급한 고비를 넘길 만큼만 캐어 담고 새빗도랑에 와서 감자와 열무를 깨끗이 씻었다. 겨우 다섯 단의 열무를 팔아야 몇 푼이 되지도 않을 것 같아 늘 양식이 달막거리는 큰 집 대신 살림이 넉넉한 옆집 상천댁이나 앞집 접동댁에 가서 쌀 몇 되를 꿀려다가 자존심이 상해 그만 두었다. 그리고는 바로 열무를 이고 장터로 향하는데 갑찬이가 대문밖을 내다보는지라
“새이야, 니는 집에서 감자를 삶아서 엄마도 좀 주고 너거도 묵어라. 그라고 집에 뭔 일 있으면 금찬이 시키서 내 한테 연락해라. 내 채소전에 있으꾸마.”
하고는 재빨리 골목을 벗어나 허겁지겁 남천내의 뚝다리를 건넜다. 한 푼이라도 더 받아야 하지만 물건도 변변찮고 마음도 급해 헐렁헐렁 팔아버리고 돈을 세어보니 쌀 한 되 팔기에도 부족할 것 같았다.
수중에 돈을 들여다보며 곰곰 생각하던 순찬이가 다시 반티를 이고 중학교 앞 미나리꽝으로 향했다. 수중에 돈을 몽땅 털어주고 미나리 아홉 단을 산 순찬이는 이번에는 아까 열무를 팔았던 자리에 앉아 미나리를 펼쳐놓았다. 이제 열여섯, 겨우 처녀티가 날까말까 한 당찬 순찬이를 보며 사람들이 허허 웃거나 욕본다고 치사를 하며 한두 단씩 팔아주어 금방 미나리가 동이 났다. 용기백배한 열여섯의 어린 처녀는 이번에는 미나리 스무 단을 받아다 또 금방 팔았다. 이렇게 세 번을 왕복하니 어느 듯 해가 기울고 있었다.
수중의 돈을 세어보던 순찬이가 그 제서야 활짝 웃더니 어물전에 가서 커다란 광어 한 마리와 바로 옆의 건어물상에서 미역 한 곽을 사고 시계 전에 가서 이제 막 전을 걷는 다부쟁이 평동댁이에게서 쌀 서 되를 팔았다. 신명이 나서 남천내 뚝다리를 건너오는데 아버지 기출씨가 그 새 술을 더 마셨는지 벌건 얼굴로 물가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물속을 바라보며 무슨 사설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부지, 집에 갑시더.”
“그래. 니 먼저 가거라. 그런데 이기 다 웬 기고? 뭐로 가주고 고기고 미역이고 쌀로 샀노?”
“아부지, 내가 마 재주를 좀 부맀다 아잉교.”
기출씨가 좀체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순찬이는 급한 마음에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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