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 (3)일흔 여섯의 소녀

말년일기 제1204호(2021.1.3)

이득수 승인 2021.01.01 19:50 | 최종 수정 2021.01.22 16:13 의견 0
지난 6월 24일 모처럼 모인 '버든사람'들의 식사광경. 왼쪽 앞에서 시계방향으로 명촌리 세째누님, 필자, 숙재누님, 장촌 네째누님, 필자의 아내.
지난해 여름 모처럼 모인 '버든사람'들의 식사. 왼쪽 앞에서 시계방향으로 명촌리 세째누님, 필자, 숙재누님, 장촌 네째누님, 필자의 아내.

<숙재누님은> 같은 마을에서 자라난 나보다 여섯 살 많은 누님입니다. 명절에 큰집에 가서 제사를 지내다 담 너머로 보면 종가집인 그 누님 집에서는 제사꾼들이 너무 많아 20명도 넘은 남자들이 두 줄로 서서 절을 하고 제관이자 언양지방 제일의 유지인 신근수씨(숙재누님 아버지)는 도포까지 갖춘 한복정장으로 <유우세차...> 축문을 읽는 모습이 매우 엄숙했습니다.

당시의 농촌처녀로서는 감히 꿈도 못 꿀 언양농업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숙재누님은 너무나 얌전해 어떤 존재감도 없이 그 이미지가 마지막 남은 엄격한 양반가의 애기씨로 기억될 정도였습니다. 었습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고 부끄럼을 잘 타는데다 아버지가 너무 엄한 선비라 그녀의 소녀 적은 그냥 조용히 넘어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친은 그녀가 혼기가 차자 여염의 농가가 아닌 시골의 조금만 약방청년을 찾아 사위를 보았습니다. 그래야 몸 약한 딸이 힘든 노동을 면할 수 있으니까요?

숙재누님이 제 앞에 다시 등장한 건 제 마흔 여덟 살에 <꿈꾸는 율도국>이란 시집을 내어 모교 언양초등학교에서 총동창회 명의로 출판기념회를 열 때였습니다. 이웃에 같이 자란 동생뻘이 우리가 늘 생활하던 공간 앞새매, 웃각단이나 언양성당의 십자가첨탑을 시로 쓴 걸 너무 기뻐하며 그 후로는 제 책이 나올 때마다 애독자가 되어주었습니다.

처음 약방집으로 시집갔으나 세월이 흘러 언양읍의 <범표신발>대리점을 차려 고향사람들에겐 그냥 <범표신발>이라고 불이는 그 누님은 어릴 때 너무 엄격한 집안에서 자라 어디에 나서기 보다는 뒤에서 조용히 남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별 대수롭지도 않은 일상을 아주 재미나게 이야기하는 소질이 있고 특별히 저를 만나면 어릴 적 <버든>이란 마을에서 자라던 이야기를 잘 하는데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우리 어일 때 누구나 즐겨 불렀던 

백두산 벋어내려 반도 삼천리... , 라는 노래를 

백두산 버드남게 매롱 한 마리...

하는 유치한 개사를 이야기하는데 그 표정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세월이 자꾸 흐르다 보니 약사이던 남편이 치매가 와서 노인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분가한 아들의 사업이 번창해 사는 일에는 걱정이 없지만 코로나19가 퍼진 이후 요양병원에 남편을 면회할 수가 없어 너무나 심심하고 외로운 모양입니다.

사진2. 숙재누님이 노트를 찢어 써 보낸 시
숙재누님이 노트를 찢어 써 보낸 시

평소에 전화가 한 번 연결되거나 같이 식사라도 하게 되면 어찌 그리 우리가 자라던 그 평범한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나게 반복하는지 뻔히 아는 내용이이지만 저도 몰래 몰두하다 픽 웃곤 합니다. 어떨 때 제가 작품을 쓰다 누님 전화가 오면 저도 모르게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 마침내는 내가 무슨 내용을 써왔는지 감각을 잊어 수인사만 하고 끊기도 합니다.

올해 제가 포토 에세이집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를 출판하자 누구보다 기뻐하고 환영한 사람이 숙재누님입니다. 저를 보고 형님이라고 부르는 성민이라는 동생과 같이 명촌별서에 와서 책 한 20권을 가져갔는데 이후 시도 때도 없이 자기형제안 친구누구가 책값을 주더라고 만나자고 해서 5만원, 10만 원을 주고받으며 식사를 하는데 누님이 이야기는 그 때마다 끝없이 펼쳐집니다. 

며칠 전에는 친척 누군가가 준 책값 2만 원에 사업가 아들의 돈 10만 원을 보태 만나자는 연락이 왔는데 그 때 노트쪼가리에 메모한 시 한 편을 주는데 그 내용이 하도 천진해 소개합니다.

참새

아침에 일어나 베란다에 나가니
아래 층 화단 동백나무그늘에
참새 몇 마리 앉아있다.

두 마리는 나란히 붙어 앉아
쪽쪽거리고 앉아있고
남은 두 마리는 뚝뚝 떨어져 앉아 있다.

너의 두 마리는 정이 없어 그러느냐,
거리두기를 하는 거냐? (끝)

이제 코로나19의 기승이 더욱 심해져 비록 가족이라도 다섯 이상이면 외식을 할 수 없고 50, 60년을 함께한 노부부도 하나가 요양원에 가면 면회도 못 해보고 죽어 영원한 이별을 하는 이 스산하고 암담한 시절, 어서 코로나 19가 숙지막해져서(수그러지다의 언양사투리) 누님이 요양병원에 입원한 그리운 남편면회를 가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平理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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