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5)연산동 토곡은 잘 있는가?

만년일기 제1206호(2021.1.5)

이득수 승인 2021.01.04 17:05 | 최종 수정 2021.01.04 17:17 의견 0
 사진1 창가로 비치던 화려한 수영강의 야경
창가로 비치던 화려한 수영강의 야경

우리 젊을 때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라는 영화가 있었고(본 일이 없음), 어떤 사람의 하는 일이나 연애가 지지부진하면 그렇게 빗대어 부른 생각이 납니다. 너무 오래 된 기억이라 파리가 아니고 로마인 것도 같고...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스물일곱 살 때 연산1동사무소에서 병무와 민방위업무를 볼 때입니다. 당시에 육군, 해군, 공군에 해병대보다도 북한이 더 무서워 한다는 방위병(도시락 달그락 거리는 소리로 적의 레이더망을 혼선시켜)을 업무보조로 네 명이다 데리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이삼이라는 이등병(40년이 훨씬 지나도 아직도 얼굴과 이름이 기억남)이 있었는데 국민학교 졸업의 학력으로 서면의 극장앞에서 음화(淫畫)를 팔다온 불량청소년 출신이었지요. 그런데 이 이이병이 사무실에 앉아 일은 하지 않고 

“아 서면로터리는 아직도 무사히 잘 있는가? 이 천하의 이삼이가 없이 동보극장의 필름은 무사히 돌아가고 서면탑도 안녕하실까?”

날마다 중얼거리며 세월을 보낸는데 도시락을 사올 형편도 안 되어 저와 세 명의 동료가 돌아가면서 다문 라면이라도 사먹여야 했는데

“아, 우리 담당님은 내가 소집해제만 하면 신작영화는 모두 다 보여드릴 겁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엄앵란이나 정윤희보다 예쁜 여배우나 가수도 붙여주고...”

말도 아닌 이야기로 고마움과 미안함을 때웠습니다. 퇴근 후에 어쩌다 서면으로 나가면 자기또래들끼리 온갖 험한 짓을 벌려 어떤 때는 경찰관이 찾아오기도 해 나중에는 그 애보다 한 달 후배이지만 고려대 법대에 다니며 고등고시 일차시험에 걸린 아주 엄숙한 이등병(키도 크고 힘이 제며 자주 밥을 사줘서 이삼이 이병이 꼼짝 못 함)을 담당으로 일거수일투족을 챙기게 해서 무사히 소집해제를 시켜 내 보낸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몹시 추운 아침, 그것도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 왜 문득

아, 나의 보금자리 연산동은 잘 있는가? 그리고 정든 연산로터리와 망미주공아파트는 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미치면 이삼이이등병의 여드름이 자글자글 한 붉고 동그란 얼굴이 생각났습니다.

 사진2 일상으로 드나들던 망이주공아파트의 앞길
 일상으로 드나들던 망미주공아파트의 앞길

그러고 보면 만 19세인 1970년에 연산3동 사무소에 발령을 받아 단 하루도 떠나지 않은 연산동바닥, 말뚝숙직을 하던 숙직실에서 종고모의 집과 친구의 친구의 집 같은 인심좋은 할머니들이 내 지식처럼 생각하고 늘 따뜻하게 연탄불을 넣어주고 이불을 갈아주고 속옷을 빨아주고 갈치를 구어 밥을 주던 연산동1공구 초량45번지 철거민들의 정착지, 그리고 아내와 신혼을 보낸 단칸방과 처음 월세를 안 주는 전셋집에 자며 마냥 신기하던 수세식 화장실과 흑백 TV의 연속극. 무려 열세번의 이사를 거쳐 내 집 망미주공아파트를 사고 여고생 딸에게 인형이 있고 커튼이 있는 공무방을 내어주며 너무 좋아 아내가 잠을 설치던 일, 시인이 되어 시집을 내고 출판기념회를 하고 사무관, 서기관에 승진을 하고 아들딸을 결혼시켜 손녀 넷을 본 다복한 부부가 되기까지의 27년 망미주공 생활을 떠올려보았습니다.

한밤중에 자다 깨면 가끔 동해남부선의 열차가 기적을 울리는 그 아파트가 너무 좋아 명촌별서를 지어 이사한 지 5년이 넘어도 아직도 아내와 저는 그 아파트를 팔거나 세를 놓을 엄두를 내지 못 하고 있습니다. 지금 텅 빈 아파트에는 아내의 살림도구 몇 점과 <단스>라고 불리는 자개를 박은 오래 된 옷장과 너무 커서 옮기기 어려운 개군자화분이 동쪽 베란다를 지키고 <평리재>의 현판이 걸린 내 서재에는 명촌리로 옮겨오고 남은 책들이 꽂힌 이빨빠진 서가뿐인데, 가끔 병원에 가는 날이 겹쳐 라면과 햇반으로 하루를 넘기며 헌 소파에 앉아 텔레비젼을 켜면 한 없이 평화로운 느낌과 창밖의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펼쳐진 수영강변의 화려한 강변, 이제 곳 재 개발이 되면 헐리고 새 아파트가 들어서고 다시 지분을 받든, 팔든 27년을 살고 사던 가격의 10배쯤의 돈을 받아 아이들에게 모처럼 목돈을 한번 줄 기회도 생길 그 소중한 아파트와 야경...

사람이 한 나절을 즐기는데는 생애 가장 즐거웠던 일을 떠올리는 것이 제일 빠른 첩경, 따뜻한 침대 속에 파묻혀 현란한 수영강의 야경을 떠올리며 저는 병고와 글쓰기의 고민을 다 잊고 마침내 편안한 꿈속에 빠졌습니다.

平理 이득수 시인
平理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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