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8)헛돈 40만 원의 황홀한 꿈
말년일기 제1210호(2021.1.9)
이득수
승인
2021.01.07 22:12 | 최종 수정 2021.01.22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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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에 보이는 알약이 항암치료제 <카보잔티납>이라는 약입니다. 거금의 개발비가 든 신약이라 정부에서 아직 의료보험대상으로 책정하지 않아 보통 의료비 5%만 부담하는 암환자가 100% 현금을 내어야 하는데 한 달 치 30알에 5백만 원 조금 넘게 지불하면 한 달 쯤 지나 한국암협회에서 환불 200만원이 나오니 한 알에 10만원이 조금 넘게 들어가는 셈입니다.
우리 어릴 적에는 돈이 없어 수술이나 제 때 치료를 받지 못 해 돈만 있으면 살릴 목숨을 허무하게 날리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게 참 잘 해주던 집안 형수 한 분도 갑자기 피임용 루프가 올라붙어 급한 위기가 닥쳤는데 가난한 농가에 돈이 없어 수술 한 번 못 해보고 죽었는데 나중에 처가 쪽에서 그럴 줄 알았으면 농협에 논밭이라도 잡히고 사람부터 살려야 하지 않았냐고 항의했지만 당시의 농촌사람들은 논밭이 곧 생명이라 감히 그런 발상도 못 해보고 열 살 전후의 아이들 넷을 남긴 어미를 놓쳐버리고 만 것입니다.
저는 5년 넘게 암 투병을 하면서 첫 번째 수술을 아직 조직검사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받는 바람에 일반치료비 1천만 원 가까이를 낸 후 계속 암환자공제 95%를 받아 병원비의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경과가 점점 나빠진 상황에서 절제수술과 방사선 수술, 먹는 약 두 종류로 다섯 번이나 연속 실패를 않고 그 때마다 절망적인 선고를 받았지만 그럭저럭 죽지 않고 버티다 1019년 12월부터는 의료보험적용이 안 되는 신약 주사 <옵띠브>를 한 달에 500만원 좀 넘게 주고 맞았는데 주사실에 가면 머리가 하얗게 센 제가 그 비싼 주사를 맞는데 옆 침대엔 30대의 외아들이 돈이 없어 효과도 없이 몸만 엄청 부대끼는 구식 항암제를 맞고 점점 살이 빠지고 눈빛이 죽어가 제 또래의 그 어머니가 절 힐끗힐끗 쳐다보는 바람에 몸 둘 바를 몰랐는데 얼마 뒤 결혼도 안 한 그 청년이 보이지 않아 제 가슴속이 휘잉 찬바람이 지나간 적도 있습니다.
그 비싼 주사를 6개월이나 맞아도 별 효력이 없이 점점 암세포가 자라나 6개월 후에는 이제 현대의학의 마지막 신약 <카보잔티납>을 6개월 먹었지만 암세포의 확대를 다소 지연시키는 효과는 조금 있지만 온몸 구석구석에 부작용이 나타나 먹고 자고 앉고 일어서기도 힘들어 마침내 한 동안 투약을 중단하기로 하고 지금 한 달 정도 약을 끊으니 손발도 깨끗해지고 식사량도 많이 회복되어 일단은 편안하게 잠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먹나 남은 카보잔티납 4알입니다. 저 작은 네 알이 무려 현금 40만원이니 적은 돈이 아니지만 이제 무용지물이 된 것입니다. 그 동안 그 더운 인도에서 가족도 없이 지내는 아들이 무려 천만 원씩 몇 번, 또 하루 종일 반죽을 치고 만두를 빚는 제 사위가(다행히 장사는 코로나와 관계없이 잘 됨) 소상공인 융자를 받아 천만 원 넘게 보내주는 덕분에 저는 단 한 번도 병원비 걱정이 없었고 제가 30년 가까이 산 망미주공아파트가 재개발열풍으로 엄청 비싸졌다고 하니 돈 때문에 죽을 모양은 아니지만 평생을 어렵게 산 저로서는 저 먹다만 알약 40만원어치를 쳐다보고 저게 깔깔한 5만 원 권 여덟 장이라는 생각을 하면 그만 아깝기가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오후 따뜻한 햇볕이 들어오는 침대에서 안온한 꿈에서 깨인 저는 문득 저 버려진 알약이 빳빳한 현금 5만 원 권 현금이라고 생각하고 어디에 쓰면 좋을까 행복한 상상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제 외식의 고정멤버 장촌, 명촌 두 누님과 울산의 동생가족까지 6명이 한 20만 원 쯤 들여 당사항의 자연산 방어회를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코로나19거리두기로 5명이상 식당출입이 안 되고 그 울산 북구 쪽이 특히 환자발생이 많아 방어회의 꿈은 자동으로 접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빨간 열매, 즉 불우이웃돕기가 생각났습니다만 지금 제 처지로 성금을 내면 받는 사람 마음도 별로 편하지 않을 것 같고, 죽음을 직전에 둔 노인이 아직도 현실을 파악 못 하고 설치는 것도 같고, 현실적으로 가상의 화폐라 봉투에 담을 수도 없고....
오랜 고민 끝에 난 결론은 이렇습니다. 유달리 추운 올해 겨울 난방용 기름을 넣을 때마다 너무 헤프다고 한탄하는 아내를 위해 한 30만 원을 들여 제가 기름을 한 번 넣어주고 나머지는 병원이나 시장에 갔던 길에 아내나 누님과 함께 자장면도 먹고 로또복권도 한 장 사는 일입니다.
결국 그 행복한 상상 때문에 저는 또 다시 생돈 40만 원을 쓰게 되고 말았습니다. 인생살이 그 참 기가 찹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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