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 (10)꽃무늬 양말을 신다
말년일기 제1210호(2021.1.9)
이득수
승인
2021.01.09 16:52 | 최종 수정 2021.01.22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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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 지난 초가을(9.7) 고래뜰을 지나 덕고개를 돌아 한참 내려오다 길가에 안자 쉬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주홍빛 바탕에 작은 꽃누늬와 양말목에 붙은 동그란 아기곰 얼굴, 참 포근하고 귀여운 인상이지요.
지난 봄 가벼운 낙상을 입은 뒤 갑자기 제 몸은 허리와 어깨와 가슴과 어깻죽지와 옆구리에 양팔에 아랫배까지 근육이란 근육은 모조리 거대한 반란군처럼 들고 일어나 마치 촛불대모를 하듯이 하루 종일 괴롭혀 잠깐 잠을 들려면 이리저리 여러 번 몸을 뒤적거리다 간신히 토끼잠이 드는데 5분이 채 안 되어 잠이 깨면 잠들기 전과는 또 다른 패턴으로 온 몸의 근육이 제각기 아우성을 질러 어떻게 손써 볼 수도 없이 그냥 참다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언양읍의 평화정형외과에 다니며 통증환화주사를 맞고 물리치료를 받든데 전신만신 온 몸이 다 아프다고 하니 물리치료사는 그래도 대표적인 곳을 대라고 해서 주로 어깻죽지와 왼쪽가슴 수술자리, 허리와 등에 찜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도 많이 아프다니까 저도 몰래 눈살이 찌푸려진 물리치료사아가씨가 제가 점퍼와 신발을 벗고 자리에 눕는 순간 픽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구, 할아버지 꽃무늬 양말!”
하고 감탄을 하더니
“할아버지 시인이라고 하더니 아직도 꿈이 있는가 봐.”
하는 걸 그건 패션개념의 양말이 아니고 지난해 <넥사바>라는 독한 항암제를 먹을 때 보통사람은 손발 끝이 다 부르트고 모든 관절이 허물어져 안지도 일어서지도 못 하고 침애에 누워서 지내는데 그래도 화장실에 간다든지 꼭 움직여야할 때 발에 충격과 마찰을 줄이는 치료용 양말이라고 설명을 했지만 제가 신발을 벗고 침상으로 올라갈 때 마자 입을 딱 벌리고 감탄하는 것이 그 꽃무늬양말이 보라, 주홍, 주황 세 가지 종류나 되니 날마다 남의 환부를 만지는 그네들도 그 답답한 생활에 숨구멍이 되는 모양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내 하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물리치료사가 저만 가면 <시인할아버지>, <꽃무늬양말 할아버지>라 부르며 반가워했습니다.
다행히 저는 먹는 약의 부작용이 좀 적은 편이라 치료용이라기보다는 촉감이 좋고 두꺼운 양말, 그러니까 등산스타킹대용으로 마초와 산책을 갈 때 주로 신었습니다. 그런데 묘한 건 산책 중에는 그렇게 포근한 양말이 방안에 있을 때는 발가락사이에 후텁지근한 기분이 들며 뭔가 답답한 생각이 들어 주로 양말을 벗고 지냅니다.
그런데 하루는 몸이 많이 피로했는지 저 주황빛 꽃 양말을 그냥 신고 낮잠이 들었는데 채송화와 가득 핀 꽃밭에 들어선 저는 저는 여기저기 아이들이 재잘거리고 특히 계집아이들이 까르르 웃는 숲길을 지나 어느 듯 노란 민들레, 하얀 클로버, 붉고 흰 풀씨꽃(紫雲英)이 끝없이 펼쳐진 벌판을 걸어가는데 새파란 하늘 가득 작은 새들이 나르고 저 먼 서쪽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가 사라지자 눈부신 주황색의 노을이 황홀하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침 고향마을 우물가 앞새매에서 마구뜰과 진장만디와 봉당골을 바라보는 기분으로 아주 편안한 단꿈에 빠졌는데 저녁식사시간이 되었다고 아내가 제 어깨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식욕이 없어 겨우 몇 숟갈을 뜨고 다시 침대에 누웠는데 이번에는 무슨 우주전쟁이 벌어졌는지 피터팬, 태권브이, 독수리5형제 같은 만화캐릭터들이 차례로 하늘을 날아다니다 저들끼리 다투기도 하고 악수를 하며 깔깔 웃기도 하는데 어느 순간 거대한 철퇴(鐵槌)같은 걸 앞에 두고 격파를 하고 발차기를 하고 굿을 빼더니 마침내 새까만 철퇴가 사라지는 순간 아주 통쾌한 느낌에 빠지며 잠이 깨었습니다. 그리고 꿈속의 그 시꺼먼 철퇴가 뭘까 생각하며 텔레비전을 켜는데 방금 정은경질병관리청장이 코로나19예방 브리핑을 하는데 그 자막 뒤에 새까만 철퇴하나가 보이자 저도 몰래 손뼉을 치며 환호했습니다. 그러니까 제 꽃무늬 양말을 신은 태권동자와 독수리5형제가 코로나19를 물리친 꿈을 꾼 것입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저는 아주 경건한 마음으로 제 꿈속에 한 번 더 그 태권동자와 독수리5형제가 나타나 시커먼 연기 같고 안개 같으며 손에 잡히지도 만질 수도 없는 제 몸속의 괴(怪)생명체, 암세포를 격파하는 꿈을 좀 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튿날 아침 온갖 개꿈들만 연속된 지난밤의 꿈들을 좀 체 갈피를 잡을 수 없어 그냥 껄껄 웃고 말았습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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