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한 살의 동화(童話)」 ... (11)'방콕'과 '도리뱅뱅'
말년일기 제1211호(2021.1.10)
이득수
승인
2021.01.10 16:45 | 최종 수정 2021.01.22 16:07
의견
0
위 사진은 아침식사를 마친 제가 곧바로 자리에 누우면 역류성위염이 생길까 봐(지지난해 응급실에 실려갈 정도로 혼이 한 번 났음) 거실과 식탁 뒤 서재와 현관을 이리저리 한 20분간을 걷는 모습입니다. 눈부신 텔레비전 옆의 좁은 서재 입구로 머리도 허옇고 얼굴윤곽도 흐릿한 칠순의 늙은이가 걷는 모습이 좀체 어울리지 않지만 저로 서는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일 뿐입니다.
한 보름 전까지 저는 매일 마초를 동행해 하루에 한번 4km정도씩 들길을 걸었습니다. 같은 리(里)에 속하는 사광리나 명촌 아랫마을을 지나면 이제 홍식이외삼촌에서 <글 쓰는 선생님>으로 알려진 저에게 마을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오늘은 얼굴이나 컨디션이 좋아 보인다, 저 노란강아지 마초는 어찌 저렇게 건널목과 고갯길을 구비구비 길안내를 잘 하는지 감탄하면서 우짜든동 건강하고 오래 살라고 덕담을 해주면 그만 기분이 흐뭇해져 금방 반환점을 돌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가을엔 항암후유증으로 발가락과 발바닥이 온통 갈라지고 부르터서 제대로 걸을 수 없어 이틀에 한 번으로 횟수도 줄이고 코스도 3km정도로 단축했습니다. 거기다 날씨가 점점 추워져 부산이 영하를 오르내릴 때 언양읍은 영하 5도, 큰 산 아래인 명촌리엔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판이라 너무 추워 두꺼운 파카와 머플러로 눈사람처럼 완전무장을 하고 한 30, 40분 걷고 들어오면 지금껏 짚동 같은 파카 속에 안온하게 숨어있던 등에 땀이 찌질하게 흘러 타월로 건포마찰을 하듯 땀을 닦고 속옷까지 갈아입어야 하는데 심한 경우 칠순이 넘은 할배가 대낮에 문득 샤워를 하는 진풍경(이건 좋은 말이고 사실은 고약한)을 다 연출하게 됩니다.
그러나 남들 눈에 만만한 이 실내를 뱅뱅 도는 <도리뱅뱅>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쨌거나 근력과 식욕을 유지하려는 살아남기의 한 방편이자 운동이지만 여간 모진 결심을 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이 우선 걷는 공간자체나 코스가 좁고 텔레비전의 소음과 아내의 눈길, 하마 운동을 가는가 싶어 창 밖에서 서성거리는 마초를 무시할 배짱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좁은 거실을 돌아 한 1m 정도 폭의 식탁 뒤 공간, 화장실과 다용도실의 문 앞, 제 침대와 텔레비전 사이의 50cm 공간, 아내의 파우치와 현관사이의 1m 폭의 공간에 좁은 서재의 한가운데 빨간 의자를 놓아 한 다섯 걸음으로 돌아가는 공간을 만들어야 됩니다.
다음은 제가 계속 왔다리갔다리 하니까 텔레비전에 집중이 되지 않아 자주 절 흘낏거리는 아내를 무시하고 어릴 적 진장 목숭아밭의 초록색 이파리사이의 빨간 복숭아, 겉은 새파랗고 속은 하얗지만 한번 깨물면 싱그럽고 달콤한 꿀물이 쏟아지던 사과, 마을에서 공동으로 묘를 심고 일당을 받은 막내누님이 부산의 그릇장수에게 처음으로 사들인 노랗고 반질반질한 양은 식기세트와 동그란 스텐 찬합뚜껑에 새겨진 장미꽃을 연상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홍하의 골짜기> 같은 노래를 허밍하면 아내가 귀신 나온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자기방안을 하루 세 번 뱅뱅 도는 사람은 우리 영감밖에 없을 거야.”
모처럼 칭찬을 던지면
“그럼. 건강해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야 건강한 거지.”
이 갑갑한 코로나의 시절에 모처럼 부부의 합(合)이 한 번 맞았습니다. 정해진 시간이 끝나자 말자 저는 또 하나의 가족인 마초에게 매일 산책길에서 주던 쇠고기과자 두 점을 꺼내주었습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