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한 살의 동화(童話)」 ... (15)서부극(西部劇)에 빠지다1

말년일기 제1216호(2021.1.15)

이득수 승인 2021.01.14 20:30 | 최종 수정 2021.01.22 16:06 의견 0

우리 집 텔레비전 스카이라이프의 69번이 바로 서부극 채널입니다. 어느 무료한 날 여기저기 채널을 돌리다 문득 아주 오래 전의 서부극 <황야의 무법자>를 발견하고 한참을 보자
“아이구, 이 영감아, 나이 70에, 그 건강에 아직도 서부극을 다 본단 말인가?”

아내가 타박을 했지만 그날 기어이 끝까지 다 보고서야 채널을 돌렸습니다. 

저는 본래 서부극 같은 폭력성이 짙은 영화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멀고 거친 황야에 말을 달리는 목동과 무법자, 크고 높고 이상하게 생긴 산봉우리와 바위, 선인장등 거친 환경을 즐기기도 하고 늘 지저분한 외모에 독한 위스키에 찌든 목동이나 악당무리의 맨 졸병이나 술집마다 진을 친 금발과 흰 얼굴과 눈빛에 붉은 입술이 다 예쁘지만 위스키냄새가 푹푹 풍기는 그 거친 사내들의 품에 함부로 안기는 여자들의 흐트러진 미소와 춤과 치마폭 같은 초기 개척시절의 밑바닥인생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별 생각이 없이 멍청한 상태에서 시간이 물 흐르듯 가는 것도 좋고요.

황야의 무법자
황야의 무법자

그렇게 자주 서부극을 보다보니 이제 웬 만한 주연배우들은 물론 술집주인이나 밀고자, 헤픈 창녀로 자주 나오는 조연도 눈에 익어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손뼉을 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서부극이나 주연배우들도 각각 몇 가지 패턴이 있어 서부극은 광산마을이마 목장마을을 생활근거지로 하는 서민들의 마을과 그 마을을 지키는 보안관이나 정의심이 가득한 총잡이청년과 금광지대의 금과 목장지대의 소나 말은 물론 목장전체를 약탈하는 무법자와 그 우두머리, 또 수천 년 살아온 제 고향을 찾기 위해 등장하는 인디언의 전사나 추장, 혹은 백인 무법자를 사랑하게 된 인디언처녀에 어디에서나 배척당하는 맥시코인들과 히스페닉계, 또 파이프담배를 피우는 율부린너형와 반대로 권련담배를 피는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의 크린트 이스트우드, 늘 냉혹한 눈빛의 매부리코 리 반 크리프의 냉혹한 옆얼굴, 또 권총이나 장총의 속사(速射)를 장기로 하는 총잡이, 그 무거운 기관총이나 다이나마이트 폭약통을 끌고 다니며 일거에 대량살상을 꿈꾸는 킬러 등, 인간성은 물론 체력이나 외모, 속사의 기술도 없으며 어떻게든 사람의 심리를 역이용하여 작은 도적무리의 보스가 되는 영악한 친구들, 라이플로 무장한 백인에 의해 빼앗기고 활과 단검 같은 가장 원시적 무기로 고토(故土)의 수복을 꾀하는  인디언 추장(酋長)의 철학성이 가득한 화두(話頭) 같은 것들이 세상만물에 다 호기심이 가득한 마초할배의 상상에 기름을 끼얹는 존재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서부극을 통해 우리 동양인 또는 한국인과 다른 몇 가지의 생활패턴을 발견하고 깜짝 놀랄 때가 많은데 그건 매일 술에 젖은 알콜중독자나 무법자두목에게 늘 괄시나 받는 조무래기 무법자도 어느 순간엔 기타나 무슨 악기를 잘 다루어 아주 활기찬 춤판을 이끌어낸다든지 늙고 병들어 곧 죽을 것만 같은 알콜중독자 노인네가 그 황야의 4거리 작은 술집과 단 하나의 여인숙, 겨우 여남은 채의 주택이 있는 마을을 거쳐 간 유명한 총잡이와 보안관의 이름이나 주요한 전투나 무덤을 기억해 새 보안관에게 결정적인 정보를 준다든지 마침내 악당과 보안관의 총격전이 벌어지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슬그머니 악당 한두 명을 처치하고 손바닥을 탁탁 트는 모습을 연출한다든지...

또 황야를 가로지르는 그 거칠고 지친 여행에서도 반드시 역마차가 아니면 따라나서지 않은 여자주인공, 그렇게 온갖 거드름을 다 피우며 싸움으로 평생을 보낸 무법자들의 애간장을 녹여 황야의 달빛아래서 문득 한 편의 러브스토리나 멜로드라마를 펼치는 금발의 미인들... 그러나 대부분의 서부극에 나오는 여인들은 가난하고 거친 농부나 광부의 아내로 올망졸망한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가난한 엄마거나 사구려 술집이나 여인숙의 안방에 칩거하며 유난히 톤이 높고 천박한 목소리로 술 취한 총잡이들을 유혹하는 오지랖이 넓은 여인들...

황야의 7인

그렇지만 생활근거지를 악당에게 빼앗기고 더러 포장마차나 말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신발도 잘 없는 가난하고 남루한 피난행렬의 가난한 어미들, 모진 모래바람 속에 문득 폐렴에 걸려 죽어가면서 오롱조롱한 자식이나 남편에게 그저 고맙고 사랑했다는 말 한마디나 짧은 키스 끝에 너무나 편안하게 맥을 놓고 슬그머니 죽어버리는 창백한 미인들... 우리와 너무 다른 삶과 죽음의 방식에 놀라 한 번씩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요즘은 서부극에 나오는 온갖 유형의 무법자나 정의의 사나이나 맥없이 죽어나자빠지는 사내와 스스로 여자의 자존심을 잃어버린 거친 여자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이 동양의 병든 할아버지가 뭔가 아련하게 하나 느낌을 갖게 된 것이 있는데 그건 동양이선 서양이건 인디언이건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과 운명에 따라 최선을 다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이 끝나면 조용히 죽어간다는 점, 서양의 무법자나 한국의 농부나 인도의 구도자(求道者)나 사람이 살아가는 길은 아무런 다름이 없다는 점입니다.(다음 회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리 반 크리프와 허리우드 영화의 거리에 새겨진 핸드프린팅에 대해서 한 번 이야기해보기로 하겠습니다.

平理 이득수 시인
平理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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