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4)어느 아름다운 봄날의 기억

말년일기 제1205호(2021.1.4)

이득수 승인 2021.01.03 16:33 | 최종 수정 2021.01.22 16:14 의견 0
 (사진1 배내골의 단풍
배내골의 단풍

오늘의 명촌리는 수은주가 무려 영하 9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마초의 물그릇이 꽁꽁 얼어 아내가 더운 물을 가져다  주고 희미하게 <이마초>의 문패가 써진 개집도 다시 단도리를 하는 사이 너무 추워 산책 같은 건 꿈도 못 꾸는 저는 따뜻하고 포근한 침대에 누워 내 인생에 가장 화려한 배경, 아무걱정 없이 꿈과 의욕이 넘치던 하루를 떠올려보기로 했습니다.
 
1988년 8월. 낯선 서구청으로 발령장을 받아 당황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새 보금자리를 찾아가면서도 눈이 닿는 곳 마다 20년 전의 그 괴로운 꿈의 시절에 제 눈길이 닿았던 흔적, 어딘가 낯익은 거리와 골목을 보면서 서구청에서 전입신고를 하고 뒤돌아 구청의 마당에 내려올 때 또 다시 오래전에 본 영화의 거대한 배경화면처럼 다가오던 대신공원과 이제 대학병원이 되었지만 아직도 낯익은 시계탑이 선명한 모교 동아대의 건물, 그리고 한 동이의 푸른 물감을 들이부은 것처럼 짙고도 푸른 숲과 엄광산의 능선!
 
서대신동에 자리한 서구청에 출근해 온 종일을 대신공원을 바라보고 지내던 시절 저는 봄이면 대신공원 좁은 골짜기에서 부챗살처럼 넓게 퍼져가는 벚꽃과 진달래의 분홍빛일색으로 무르녹고 번지다 마침내 어질어질 눈앞을 아뜩하게 현혹하는 그 한없이 안타까운 어지러움에 빠지기 일쑤였습니다.

희망에서 절망으로, 다시 방황으로 이어지는 혼돈의 연속, 아무리 아쉬워도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젊은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고 처음 선홍빛에서 분홍빛으로 다시 점점 옅어져 마침내 하얗게 빛이 바랜 마치 클로드 모네나 반 고흐 같은 후기인상파의 그림에서나 반짝이다 번지는 그 빛의 향연이 사라지고 골짜기 가득 초록빛 선명한 신록이 우거져 공단(貢緞)이나 우단(羽緞)처럼 파랗고 잠잠하게 가라앉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부드럽게 보풀거리는 그윽한 짙푸름의 바닥에서 다시 누군간지 이름도 잘 떠오르지 않는 어느 서양화가의 드로잉을 떠올리다 다시 가을이 오면 군데군데 자리 잡은 흥감장이 단풍나무와 여러 관목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붉고 누런빛의 향연, 조용하게 가슴언덕을 적시고 지나가는 강물이나 저수지의 언저리에서 느끼던 고요함과 적막 속에 다시 또 지난날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마치 조용조용 느릿느릿 흐르던 개울물이 마침내 비스듬히 경사진 여울이 되어 비로소 햇빛에 하얗게 부서지는 빛다발로 반사하며 도록도록 소리 내는 속삭임이 되고 매끄럽게 기어가는 유선형의 형체가 되 되어 무언가 그리운 그 무언가의 이름으로 각인되는 그런 느낌의 지나간 젊음에 대한 갈피를 잡으려고 애쓰다 차갑고 음울한 겨울 숲이 낮게 엎드린 오솔길 거닐며 노랗게 스며드는 한 줄기 햇살처럼 조용하면서도 끈질기게 그러면서 고요하게 따라오는 기억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사진2 꽁꽁 언 마초의 물그릇)
 꽁꽁 언 마초의 물그릇

그런 어느 날 문득 봄의 반짝거림과 여름의 무르녹음이 마치 서양화의 유화(油畵)와 같다면 가을의 단풍은 손가락이 닿으면 무언가 형언 못 할 빛깔로 물감이 묻어나올 것만 같은 파스텔 톤의 수채화(水彩畵), 그리고 한겨울 덤덤히 엎드린 구덕산과 엄광산, 구봉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하얗게 센 머리에 연륜이 가득한 서예가가 그린 한 폭의 산수화(山水畵)나 수묵화(水墨畵)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그립고 그렇게 사무치는 곳이었는데 이제 늙어 그 산기슭 대신공원과 엄광산, 구덕산과 시약산에 오를 수 없지만 아직도 내가 살아있어 그 아름다운 절경을 구경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일 뿐입니다.

옛날 사진이 없어 꽁꽁 언 마초의 물그릇과 영남알프스 배내골의 단풍을 올리게 되어 많이 아쉽습니다.

平理 이득수 시인출처 : 인저리타임(http://www.injurytime.kr)
平理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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