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물권색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저곳의 다섯 공리公理 axiom>

1. 일찍 들어오고 늦게 들어오고 선후배 없이 다 똑같은 동등한 존재다. 존대말 없이 서로 말을 터도 된다.

2. 살아생전에 언제 어디서 살았던 다른 지역에 대해 대충은 안다. 시공간 초월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다.

3. 이승에서의 집착을 다 비워 버려야 하지만 아직 미련이 있다. 물권색 욕망이 강한 인간의 관성 때문이다.

4. 한 방에서 이성끼리 대화하다 방이 바뀌며 이성 상대가 바뀐다. 덕분에 저곳에서의 생기가 은근히 살아난다.

5. 저곳에서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최종 정착지가 정해진다. 그러니 저곳은 중간 경유지가 된다.

33. 병구와 신희

정의는 승자의 것이야. 승자가 정의(正義, justice)를 정의(定義, definition)하지. 패자는 정의를 논할 자격이 없어. 객관적인 절대적 진실이 없듯이 객관적인 절대적 정의는 세상에 없어. 승자의 통치관 가치관 세계관 철학관 인생관이 그냥 정의야. 정의가 되고 말지. <정의란 무엇인가?>란 꽤 근사한 폼나는 책이 있던데 정의를 어떻게 무엇이냐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거지? 저 아래 세상에서 최근에 미국의 어느 얼굴 허연 멀쩡하게 생긴 점잖은 하버드대 교수는 정의에 대해 그런 책을 쓰고 공개강의도 하고 사람들이 좋아하고 그러던데… 그럴 듯하게 들려도 듣다보면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말은 유창하게 잘 하더구만. 근데 가슴에 와닿는 게 없어. 근데 폼은 나. 알고보면 다 궤변(詭辯)이고 그냥 아는 척 폼잡는 뻘짓일 뿐이야. 세상에 진짜 참 정의가 어딨어. 그냥 승자의 머릿속에만 있는 알량한 얄쌍한 거지. 난 평생을 승자로 살았어. 북방 오랑캐 여진족들이 쳐들어 와서 나라는 어려웠어도 나는 조정에서 권력이 셌지. 황제도 내 편이었어. 내가 주장했던 오랑캐와의 화친론이 내가 살던 때에는 정의였어. 그런 정의로운 생각으로 나는 오랑캐와 화친을 맺었고 덕분에 전쟁없이 평화로운 세상이었어. 힘도 없으면서 오랑캐와의 전쟁을 주장하던 놈들을 탄압했지. 근데 나 죽고나서 나 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드센 북방 오랑캐 몽골 놈들이 우리나라를 점령했어. 그 오랑캐 놈들 밑에서 빌빌 기던 사람들은 백여년 전에 죽은 애꿋은 나를 매국노로 좌표찍고 나를 마구 공격해대기 시작했어. 그러다가 몽골 놈들이 북방으로 밀려나고 우리 한족이 나라를 세우자 승자가 된 그들은 죽은 나를 본격적으로 탄압하지. 탄압 정도가 아니라 저주였지. 나와 아내가 무릅 꿇는 동상이나 석상을 만들고 거기다가 채찍질도 하고 지나는 사람들마다 침도 뱉고 그랬지. 전쟁을 주장했던 놈은 영웅이 되고… 다시 북방 오랑캐 여진족들이 우리나라를 점령했을 때도 나에 대한 탄압과 저주는 멈추지 않았어. 자기네가 다시 북방 오랑캐 놈들에게 지배당하는 걸 나에 대한 탄압과 저주로 퉁치려는 거같았어. 나는 그렇게 나 죽고나서 거의 천년 가까이 저 아래 세상 놈들한테 당하고만 살았어.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도 마찬가지였지. 그런데 말이지. 참 희한한 아랫 동네 세상이야. 그야말로 세상은 요지경이야. 습(習)씨 성을 가진 어느 권력자가 나를 전향적으로 새롭게 정의하기 시작했어. 그는 권력싸움에서 승자였고 습황제로 불릴 만큼 권력이 셌어. 그가 생각한 통치관은 자기네 나라가 단지 한족의 나라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북방 오랑캐와 하나의 나라를 이루었다는 거야. 권력자인 승자가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이미 나 살아생전에 북방 오랑캐와 전쟁하지 않고 화친을 이룬 훌륭한 선각자가 된 거야. 매국노라고 매도당한 내가 갑자기 선각자가 되다니? 그래서 내가 처음에 말했듯이 정의는 승자의 것이라는 거야. 아! 말이 길었다. 너 좀 똑똑똘똘해 보이는데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니? 아무래도 알 거같은데. 명찰을 보니 네 이름이 신희네. 나 병구의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네 얘기를 듣다보니 내가 사귀었던 남자 한 명이 딱 떠오르네. 그 남자는 나를 무지무지하게 좋아했어. 날 보자마자 반했어. 나랑 몇마디 대화하면서부터는 내 지성미에 빠져 들었어. 내가 그렇게 엄청난 쭉쭉빵빵 미인도 아니고 외모로는 그저그런 여자인데 날 좋아했어. 그런데 문제는 날 좋아하는 남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거야. 그냥 시시한 쩌리 남자들이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 똑똑하다고 소문난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날 좋아했어. 그렇게 나를 좋아하는 남자들 중에서 딱 한 명을 꼽으라면 단연코 그 남자야. 그는 나한테 청혼까지 했지. 나는 당연히 거절했어. 그러나 동거는 했지. 그 남자와 동거하는데 한 남자도 같이 동거했지. 두 남자-한 여자가 동거하는 걸 나는 학문공동체라 이름지었어. 여기서 리더는 여자인 나였어. 리더로서 동거는 허락하지만 그냥 학문적 교감을 위한 동거이고 사랑은 없는 동거, 특히 섹스는 절대 있을 수 없는 동거라고 못박았지. 거의 모든 남자들은 사랑없는 섹스는 버텨도 섹스없는 사랑을 못견디지. 결국 그 남자는 정신착란이 되었고 다른 한 남자는 결국 자살하고 말아.

신희, 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나는 권력과 정의에 대해 심각하게 얘기했는데 뭔 재미없는 연애담이야. 그 것도 남자들을 파멸로 몰고 간 너의 또라이 같은 얘기! 뭐야.

뭐, 그렇게 성질이 급해. 다 관련이 있어서 하는 얘기야. 알았어. 내 말이 좀 길었나. 내가 정신착란으로 몰고 간 그 남자 이야기 하려다가 좀 옆으로 빠졌네. 미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너는 아까 정의는 승자의 것이라고 했지. 객관적으로 딱 맞는 절대적 정의는 없다며… 딱 맞는 말이야. 그 남자도 그런 비슷한 말을 했어. 너가 절대적 정의가 없다고 했다면, 그는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했어. Gott ist tot! 신은 죽었다(God is dead)라고 하면서… 여기서 신이란 신앙적 대상인 하나님을 뜻한다기보다 최고의 가치이자 절대적 진리로 여겨지는 뭔가야. 나는 그 남자의 사랑을 뿌리치고 청혼도 거절했지만 그 남자의 철학을 좋아했어. 나보다 나이가 스무살 가까이 많은 그의 정신세계를 흠모했지. 학문적 선배로 여겼지. 그런 똑똑한 남자와 섹스할 수 없다는 나의 고집이 그 남자에게는 처절한 문제이기는 했지만 나는 그를 존경했어. 그래서 나는 그 남자에 관한 책을 썼지. <신희, 그 남자를 말하다>는 책이야. 그 남자가 나로 인해 정신착란을 겪고 있을 그 당시에 쓴 책이야. 향년 56세로 별세한 그는 말년 10년을 미친 상태로 살았는데 내가 그에 대해 쓴 책이 뭔지도 몰랐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 대해 썼어. 나로 인해 불쌍해진 남자지만 나 덕분에 유명해지기 시작했어. 죽고나서 더욱 유명해졌어. 그래서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아버지나 시조로 추앙받고 있지.

내가 절대적 정의는 없다고 했는데 그는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했다고? 와우! 그 남자 정말 나랑 비슷한 말을 했네. 단어는 다르지만 단어가 지닌 맥락은 같거든. 정의든 진리든… 그 말이 그 말이지. 정의는 진리로 여겨지고 진리는 정의로 여겨지지. 네가 팽겨쳤던 그 남자 훌륭하네. 어디 그런 남자의 사랑을 거부할 수 있지. 간곡한 청혼마저… 너 좀 정상이 아니네. 어째. 그래!

나란 여자가 원래 그래. 특히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을 이분화했지. 정신적 사랑을 하는 남자와 육체적 사랑을 하면 안되는 거였어. 고매한 정신적 사랑에 육체적 사랑이 끼면 정신적 사랑이 오염된다고 생각했지. 그렇다고 내가 육체적 사랑을 하지 않은 건 아니야. 다만 그 상대는 주로 나보다 정신연령도 낮은 젊은 연하남들이었지. 그렇게 나는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을 완전히 이분화하며 살았어. 정신적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똑똑한 남자들한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여자였지. 정신적 고수로 철학적 문제를 가지고 나랑 대화할 수 있는 똑똑한 남자들에게 나는 그야말로 스트레스의 근원이었어. 오죽하면 그다지도 똑똑한 그 남자는 나로 인해 정신착란이 왔겠어. 불쌍한 남자야. 나는 육체적 유혹이 아니라 정신적 유혹으로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팜므 파탈이었지

넌 나쁜 년이야. 나같으면 너같은 여자를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 어떻게 해서든 너를 내 품에 안기게 할텐데. 나를 육체적으로 사랑하도록… 그런데 너 만일 다시 저 아래 세상으로 내려가 산다면 또 그렇게 할 거야. 너의 그 알량한 이분화 원칙을 고수할래?

정신적으로 월등히 뛰어난 남자와는 정신적 교류만 하고 일반적 수컷으로서의 남자와는 육체적 정사를 즐긴 여자

지금 여기 들어와 생각해 보니 내가 왜 그랬나 몰라. 왜 남자들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했나 몰라. 난 헛똑똑이로 살았어. 알고보니 나는 바보같은 년이었어. 어떻게 여자가 정신따로 육체따로 놀 수가 있지. 그건 자연스럽지 않은 거였어. 그냥 내가 만든 개똥같은 원리원칙이었어. 나로 인해 고통받았던 순진한 남자들에게 진정 사과하고 싶어. 특히 나 때문에 미쳤던 그 남자에게는 사죄하고 싶어. 그가 아무리 그의 사후에 엄청난 철학자가 되었다한들 뭔 소용있겠어. 살 때 잘 살아야 하는 거지. 나의 육체를 그렇게도 원했던 그에게 나의 이 몸뚱이 하나만 온전히 주었던들 뭐가 나빠지겠어. 그런데 여기 기가막힌 반전이 있어.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기막히며 의미있는 반전이야. 나 때문에 일어난…

또 뭔 요상한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시나! 신희님께서…

요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럴 듯하게 들릴 수도 있어. 내가 그 남자의 구애와 청혼을 팽겨쳐서 그를 망가뜨렸다고 했잖아. 그래서 그 남자가 정신착란이 왔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 남자는 정신착란에 의한 광기에 사로잡혀 창작열이 더욱 불타 오르게 되었지. 그를 이 시대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의 아버지로 여겨지게 했던 저작물들은 다 내가 그 남자를 미치게 하고 난 후 쓴 것들이야. 내가 그를 미치지 않게 했다면 그는 그냥 평범한 이름없는 철학자로 남았을 거야. 내가 그를 위대하게 만든 거지. 나는 남자로서의 그의 인생을 파멸로 몰고간 팜므 파탈(Famme fatal)이었지만, 반대로 철학자로서의 그의 인생을 성공으로 몰고간 팜므 석세서스였어. 이 말은 내가 방금 지은 말이야. 그에게 나는 치명적인 여인이 아니라 그를 성공케 한 장본이이야. 비록 나는 그에게 내 몸을 주진 았지만 이 알량한 여체보다 더 귀하고 값진 고귀한 영예를 주었지. 나 덕분에 그는 원탑의 철학자가 된 거지.

신희, 너! 한 남자의 인생을 처절하게 망쳐놓고 자기 합리화가 심하네. 좀 듣기 거북하네. 너 좀 뻔뻔하네. 내가 판단하기엔 너는 너 밖에 모르는 년이야. 아! 미안해. 년이라고 해서… 그런데 듣다 보니 좀 화가 나서. 넌 너의 젊은 육체가 닳지도 않는데 뭐 그리 너의 육체를 그 남자로부터 지키기만 했을까? 더군다나 너는 다른 젊은 남자들이랑 할 거 다 하고 육체적으로 즐기며 살았다며? 참, 나! 어이가 없네. 정말로! 그 남자가 착해서 망정이지 나쁜 남자같으면 너 그냥 가만 놔두지 않았을 거야. 내가 만일 그 남자라면 널 어떻게든 자빠뜨렸을 텐데. 그 남자 참 불쌍하다. 아무리 죽어서 위대한 철학자가 되면 뭐하나. 사랑해서 안고싶은 여자를 안지도 못하고 여자 맛도 못보고 죽었으니… 불쌍한 작자일세.

네가 나한테 년이라고 욕할 때 난 화가 나서 너한테 욕하려고 했지만 참았어. 착했던 그 남자도 나한테 육두문자를 써가며 욕한 적이 있어. “이 더러운 잡년 같으니라고…” 자기한테는 육체관계를 맺지 않는데 내가 젊은 놈씨들하고 염문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나봐. 나에 대한 염문(艶聞)을 듣고 그 남자는 더욱 더 미쳐갔을 거야. 그렇게 나한테 욕을 퍼붓는 걸 보니… 그런데 그 남자는 나한테 성적 매력이 전혀 없었어. 나보다 나이가 스무살 가까이 많기도 하고, 얼굴이 잘 생기지도 않았어. 콧수염만 비정상적으로 길게 잔뜩 기르고 다녔는데 나는 그게 싫었어. 그래도 그의 탁월한 정신세계를 동경했기에 그와 동거까지는 했지만…

네 얘기 들으니 너란 여자 참 얄미운, 아니 많이 나쁜 여자네. 젊은 남자들과 몸을 섞고 다니며 할 거 다했네. 그 남자가 미칠 만도 하겠다. 네 얘기 더 이상 듣기 거북하다. 내 얘기를 마저 해야했다. 어! 그런데 밖이 어수선하게 들리네. 뭔 일이지?

박기철 교수

<전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