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물권색 이야기가 있는 저곳의 다섯 특징>
1. 일찍 들어오고 늦게 들어오고 선후배 없이 다 똑같은 동등한 존재다. 존대말 없이 서로 말을 터도 된다.
2. 살아생전에 언제 어디서 살았던 다른 지역에 대해 대충은 안다. 시공간 초월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다.
3. 이승에서의 집착을 다 비워 버려야 하지만 아직 미련이 있다. 물권색 욕망이 강한 인간의 관성 때문이다.
4. 한 방에서 이성끼리 대화하다 방이 바뀌며 이성 상대가 바뀐다. 덕분에 저곳에서의 생기가 은근히 살아난다.
5. 저곳에서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최종 정착지가 정해진다. 그러니 저곳은 중간 경유지가 된다.
29. 임제와 진숙
니, 앙골라라는 나라 이름 들어봤나? 아프리카 대륙 서남부 해안에 있는 나라인데 영토도 넓고 인구도 많아. 그 나라 이름이 내 별칭이야. 1492년 콜럼부스가 대서양을 횡단하기도 전에 얼굴허연 포르투갈 놈들이 대서양을 종단하여 배타고 우리나라까지 쳐들어 오며 우리나라 사람을 학살하고 마구 노예로 잡아가고 그랬는데, 내가 그 거악한 놈들과 전쟁을 벌여 자기네를 지켜준 전쟁군주가 되었지. 남자처럼 행세하며 싸운 그 전쟁군주가 바로 나 응골라였지. 그 응골라라는 발음이 살짝 바뀌어 앙골라가 되었지.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로부터 찬양과 사랑을 받고 있어. 내 동상도 있고 내 얼굴과 이름이 들어간 동전도 있고 나를 기리는 거리 이름도 있을 정도야. 그야말로 나라를 구한 성녀지. 구국 영웅으로 치켜지는 여자야. 앙골라의 어머니로도 불려.
나, 임제는 하도 오래 전 옛날 사람이라 잘 모르는데 정말로 진숙, 네가 그런 여자였다면 성녀이자 영웅이네. 어쩐지 널 처음 볼 때부터 당당한 폼새에 놀랐었지. 남자한테 쓰는 표현을 여자인 네게 써서 미안한데 등빨이 좋은 여자야. 웬만한 남자랑 붙어서 싸워도 얼마든지 이기고도 남겠어. 체격이 아주 좋아. UFC 나가면 챔피언 먹겠어. 근데 힘만 좋다고 나라를 구할 순 없는데…
나는 체격 체력만 좋은 게 아니라 머리도 지력좋았어. 얼굴허연 포르투갈 놈들과 당당히 맞서 싸우려는 용기도 있고 지략도 있었지. 어ᄄᅠᇂ게 싸워야 이기는지 알았어. 외교적 협상력도 탁월했지. 포르투갈 놈들과 사이가 않좋은 네덜란드 놈들을 우리 편으로 잘 이용했지. 생각도 유연했어. 다만 내가 성욕이 워낙 강해서 남자들과 가학적 성행위를 즐긴 게 내 인생의 큰 오점이야. 적당히 즐겨야 했는데 그만... 프랑스의 사드라는 놈으로부터 유래한 새디즘이나 새디스트적인 가학이나 성적 학대가 아니었어. 나에 비하면 사드는 낭만적 수준에 불과해. 어떨 때는 남자들 살점을 물어뜯고 피를 핥고 하는 성행위를 즐겼지. 사드라는 이름의 금마는 자기 책에서 나를 변태적 이상 성욕자로 묘사해서 나를 아주 미친 년으로 만든 놈이야. 나쁜 놈! 그런데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기는 했어. 성행위 후에 어떤 남자들은 나의 변태적 성행위로 인한 극심한 고통으로 죽기도 했어. 내가 죽이려고 했던 건 아니고 좀 세게 했던 건데. 난 상대방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한 싸이코패스였나봐. 싸이코패스는 마음을 뜻하는 psycho와 질병을 뜻하는 pathy가 만난 합성어인데 마음의 질병을 뜻해. 상대방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한 마음의 질병이지. 난 아무 때나가 아니라 오로지 성행위 때 지독한 싸이코패스가 되었어. 내 섹스 상대가 아프든 말든 나의 쾌락을 즐겼지. 그건 단순히 남다른 성적 취향이 아니라 성적 범죄였어. 쳐죽일 나쁜 년이었어. 나는! 내가 여기 들어온 건 그런 성범죄 때문인 거같아. 여자 권력자의 성범죄는 무섭지.
어우! 무섭네. 소름돋네. 여기서 나한테까지 그러는 건 아니겠지.
겁내지마. 나 진숙은 이제 그런 미친년 아니야. 이미 반성 후회 성찰 참회했어. 염려마. 그리고 죽은 남녀끼리 무슨 섹스를 한다고… 여기 그런데 아니잖아. 그런데 나의 싸이코패스적인 성적 악행이 너무 과장된 점도 많아. 내가 식인여왕이란 설도 있어. 이건 정말 얼굴허연 놈들이 지어낸 악랄한 과장이야. 그렇다고 내가 나의 악행을 무조건 아니라고 부정하는 건 아니야. 다만 강력한 여왕이었던 나를 깎아 내리려고 침소봉대(針小棒大)하는 괴담들이 많다는 거지. 더군다나 얼굴허연 포르투갈 놈들은 없는 이야기도 만들어서 나를 음해했어. 내가 내 말안듣는 마을 사람 600여명을 멧돌에 갈아 죽였다느니 어린 소년들의 인육을 즐겼다느니 하는 헛소문들이야. 나는 결코 그런 적 없어. 특히 나이 들어서는 온순한 할머니로 살았어. 나는 얼굴허연 놈들과의 협상을 위하여 카톨릭 세례를 받은 거지만 엄연한 크리스천이야. 한창 젊은 팔팔한 여왕이던 시절에 성행위를 격렬하게 했다는 거지. 그러고도 난 오래 살았어. 나 때 여든까지 살았다면 천수를 누린 거지. 내 성적 상대인 젊은 남자들을 마구 할퀴며 물어 뜯는 악행을 저질렀지만 나라를 구한 덕분일까? 그건 아닌 거같고 나는 천부적으로 몸이 건강했어. 그러니 성욕이 워낙 강하기도 했고...
그렇구나. 그리 건강한 몸으로 살인적 섹스도 하고 구국 전쟁도 하고… 참 너를 어째 객관적으로 평가 내리기가 힘드네.
나를 평가하려 들지마. 판단하지마. 난 나의 잘못을 내가 알고 내가 잘 한 것도 내가 알아. 그러니 그냥 내비둬.
역사적으로도 너는 성군으로 칭송받고 또 성도착증 여왕으로도 비난받던데… 뭐가 더 진실인지 잘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그러려니 해야겠다. 너에 대한 평가금지, 판단금지! OK!
좋았어. 진작 그렇게 나와야지. 감히 나를 평가한다며 판단하고 그래! 그러지 마! 그런데 나 죽고 난 뒤에 10년 지나 우리나라는 완전히 식민지가 되. 나 때는 내가 게릴라전으로 승리했었는데 내가 죽고나니 얼굴허연 포르투갈 놈들의 기세가 등등해졌어. 결국 내가 그리도 치열하게 싸운 보람도 없이 허망하게 나의 은동고 왕국은 멸망하지. 내가 나이만 먹었지 후계자를 키우지 못한 탓일까? 아니면 남자든 여자든 나만한 전사가 나오기 힘든 건가? 우리나라는 400년 동안이나 얼굴허연 놈들의 식민지가 되고 말아. 우리나라는 노예 공급처가 되고 말지. 나처럼 용감하게 싸우는 놈들이나 년들이 없었어. 그냥 바보처럼 당하고 살지. “싸우는 자가 이긴다!”는 나의 행동강령은 사라져 버렸지. 싸우지 않으니 얼굴허연 놈들이 얼마나 우리를 가지고 놀기 좋았겠어. 그러다 포르투갈 놈들이 힘이 약해질 때를 틈타 독립전쟁을 벌여서 결국 독립하게 되지. 1975년 독립 때 나라 이름을 정할 때 전쟁군주라는 뜻의 내 별칭이 그대로 국가명이 되. 그만큼 나는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으로 우뚝 선 여왕이었지. 그런데 독립하면 뭐하나! 얼굴허연 놈들이 물러나니 권력공백이 찾아오지. 그럼 뭐가 시작되는 거지? 이제 지네들끼리 싸우기 시작하는 거야. 내전이라고 하지. 앙골라 내전! 이 내전은 그냥 싸우는 게 아니라 이념을 동반한 내전이라 국제전의 성격도 띄게 되지. 그 때 매설된 지뢰가 아직도 많다고 해. 지들끼리 싸우다 전쟁을 끝낸 게 아니라 당시 냉전 체제에서 두 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의 막후 협상에 의해 전쟁이 끝나게 되지. 1975년부터 27년 동안 전쟁하고 2002년에 종전하지. 공산주의고 자본주의고, 전체주의고 민주주의고, 사회주의고 자유주의고, 평등이고 경쟁이고 나는 그런 이념에 대해서는 잘 몰라. 나 때는 그런 거 없었으니까... 다만 이제는 우리나라가 잘 살면 좋겠는데 그게 녹록치가 않아. 처음에는 소련의 영향으로 공산주의 세력이 강했는데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지금은 대통령제를 채택한 민주주의 국가야. 나 때문인지 여자들의 사회 참여율이 아프리카에서 Top에 속해. 아프리카 1위 산유국으로 경제성장을 이루긴 했는데 잘 사는 나라는 아니지. 그래도 내전이 종식된 게 다행이지. 나처럼 쳐들어 온 놈들이랑 싸우는 게 아니라 권력을 차지하려고 지들끼리 서로 싸우면 잘살고 못살고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처참한 나라꼴이 되거든. 나라의 기본은 우선 정치 안정이야. 그게 되야 경제 발전이고 문화 향상이고 그런 게 가능하지. 또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내가 내려가서 딱 정리하면 좋을 텐데...
게릴라 전으로 나라를 구한 영웅이자 어머니로 불리면서 과도한 성욕으로 가학적 섹스를 즐긴 여인
너도 답답하겠네. 너 죽고 난 후 너네 나라를 내려다 보면... 근데 답답하기로는 나를 능가할 자가 없어. 나처럼 갑갑하고 답답하게 지내는 놈이 있을까? 없을 꺼야. 분명확실히. 세상에서 가장 답답한 건 한 곳에서 꼼짝없이 있는 거지. 나는 여기 감금되어 감시받는 감방(監房), 즉 깜빵에 무려 3500여년이나 있었어. 나보다 오래 있는 사람들은 없었어. 년이건 놈이건 분이건… 여긴 심심하고 지루하고 따분하고 무료한 곳이잖아. 그나마 이렇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거 말고는… 갑갑답답한 여기를 나가야 할 텐데... 그 곳이 지옥이더라도 나가고 싶어 미치겠어. 갑갑은 갑갑(甲甲)이란 한자어의 느낌과 비슷해. 갑(甲)은 씨앗이 갑옷처럼 딱딱한 껍질에 둘어 싸인 모양이지. 하나도 답답할텐데 둘이나 갑이 있으니 울매나 갑갑하겠어. 그 껍질이 깨져야 빵하고 터져서 새싹이 나올텐데. 답답도 첩첩(疊疊)이란 한자어의 느낌과 비슷하지. 첩(疊)은 밭이 세 개나 겹쳐진 모양이지. 하나도 갑갑할텐데 셋이나 포개어 겹쳐지면 울매다 답답하겠어. 내 심정이 딱 갑갑답답이야. 첫 번째 천년 동안은 거의 미칠 정도로 갑갑답답했지. 두 번째 천년 동안은 포기 체념했어. 그러나 세 번째 천년 동안은 포기고 뭐고 할 것 없이 아무 생각 없었어. 그런데 이제 네 번째 천년의 중간을 지나니까 다시 처음처럼 갑갑답답해지더구만. 미치고 팔짝 뛰겠어.
와우! 3500년 동안이나... 세상에나… 그 심정 알겠다. 나는 여기 350여년이나 갇혀 있어 답답했는데 너는 나보다 열 배 오래 있었네. 보아하니 임제, 너 여길 그렇게나 그다지도 오래 가둘 이유가 있을 거야. 기둘려. 대책없이 미안한 말이긴 하지만.
기다려도 기다려도 아 기다리 고 기다리 던 출소! 그렇게 갑갑답답했다가 → 포기했다가 → 아무 생각 없다가 → 다시 원래대로 갑갑답답해진 이 심정을 누가 알까? 당해 본 나만이 알 수 있어. 근데 내가 여기 있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도무지 모르겠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그 이유라도 알려주면 덜 답답하고 견딜 수 있을 텐데...
너보단 못하겠지만 나도 갑갑답답해. 근데 여기 우릴 가둔 이유가 있을 거같긴 해. 그 것도 아주 중요한 이유일 거야. 그 이유가 뭘까? 혹시 무슨 사명을 가진 우리들인가? 우리 둘 포함해서 여기 있는 죽은 사람들은 모두 몇명인지 알아?
정확히는 잘 모르겠어. 그래도 내가 제일 고참이니까 대충 헤아린다면 열 명은 족히 넘는 거같아. 그렇다고 백 명까지는 아닌 거같고. 즉 열 명에서 백 명 사이야. 좀 더 확실한 건 여기 있는 자들은 년이건 놈이건 뭔가 살아생전에 특별했던 자들이었음에 틀림없어. 너부터 유명하면서 특이하잖아. 나도 유명하진 않지만 특이하고… 한 가닥 했던 자들이야.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선한 일이든…
맞아.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어. 혹시 우리 독수리 5형제처럼 되는 거 아닐까? 아! 근데 너 독수리 5형제 아나?
잘 모르겠는데. 왠지 귀에 쏙 박히네. 나 독수리 5형제 되고 싶다. 근데 그게 뭔데 자세히 설명해 봐.
만화영화 제목이야. 일본의 후지TV가 1972년부터 방영한 TV 애니메이션이야. 1972년부터 1980년 8월 31일까지 일본에서 총105회가 높은 시청률로 방송되었지. 이후로도 미국 한국 대만 등 전세계적으로도 방영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어. 이를 본딴 패러디 제작물도 많았지. 원래 제목은 <과학 닌자대 갓챠맨>이었지. 지구정복을 노리는 비밀 결사 개랙터(Galactor)에 맞서는 특공대 5명의 활약이 주된 내용이야. 한마디로 우주전쟁을 소재로 하는 SF 만화영화야. 나쁜 나라 좋은 나라로 나뉘며 선과 악의 대결을 갖는 단순구도의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작품과는 좀 달랐어. 나름 수준이 높았다고나 할까? 좀 엉성하고 황당무계한 내용도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만화영화였어. 애니메니션의 기술적 표현력도 최고였지. 원래 일본말로 망가라 불리는 만화(漫畫)의 원조나라인 일본의 만화영화 수준은 세계 최고였지. 미국 디즈니 만화영화를 능가할 정도였지. 마린 보이, 우주소년 아톰, 들장미 소녀 캔디, 타이거 마스크, 황금박쥐, 요괴인간, 은하철도 999, 마징가 제트 등 인기 떡상한 일본산 만화영화들이 즐비하지. 그런 만화영화들 중 하나가 <과학 닌자대 갓챠맨>이고 여기에 5명의 소년 소녀들이 등장하는데 바로 독수리 5형제야. 그 리더는 가장 나이많은 18살 켄(KEn)인데 갓챠맨이란 칭호로도 불리지. 우리가 바로 지구를 침략하는 외계인에 맞서 싸우는 이런 독수리 5형제 같은 팀이 되는 건 아닐지? 그리고 너는 독수리 5형제의 리더인 켄처럼 우리들 리더가 되는 게 아닐까? 그냥 정신승리 희망고문이야. 하도 갑갑답답해서 하는... 그래도 어때! 신나지? 신명나지? 신바람나지?
아! 생각만 해도 신나네. 빨리 나가서 싸우고 싶어. 지구를 구하고 싶어. 그 어떤 외계인 년놈들이 쳐들어 온다 해도... 그 날이 오길 간절히 바래. 거기서 싸우다 또 죽는다 해도 여한 없어. 여기서 빠져 나가기만 한다면... 내가 갑장일테니 리더를 하지 뭐!
좀 아까부터 밖이 어수선한데 혹시 우리 내보내려고 그러는 거 아닐까? 제발 우리 좀 여기서 꺼내 주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Help me! I am suffocating~
박기철 교수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