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장편소설】 저곳 - 23. 병구와 술녀

박기철 승인 2024.12.04 16:26 의견 0

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물권색 이야기가 있는 저곳의 다섯 특징

1. 일찍 들어오고 늦게 들어오고 선후배 없이 다 똑같은 동등한 존재다. 존대말 없이 서로 말을 터도 된다.

2. 살아생전에 언제 어디서 살았던 다른 지역에 대해 대충은 안다. 시공간 초월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다.

3. 이승에서의 집착을 다 비워 버려야 하지만 아직 미련이 있다. 물권색 욕망이 강한 인간의 관성 때문이다.

4. 한 방에서 이성끼리 대화하다 방이 바뀌며 이성 상대가 바뀐다. 덕분에 저곳에서의 생기가 은근히 살아난다.

5. 저곳에서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최종 정착지가 정해진다. 그러니 저곳은 중간 경유지가 된다.

23. 병구와 술녀

이제 나한테 침뱉는 년놈들이 없네. 5백년 넘게 지겹게도 마누라랑 같이 발가벗고 꿇어 앉아서 년놈들이 뱉은 더러운 침을 온 몸으로 맞아 왔는데… 아무리 우리 부부 육신이 아니라 동상에다 뱉는 거라지만 너무나 괴로웠어. 어떤 놈은 회초리를 두들기기도 했어. 당장 저 세상으로 내려가서 패주고 싶었지만… 아~ 슬픈 내 신세여! 그런데 이제 우리 부부한테 마구 오는 침과 회초리는 거의 사라졌어. 그런데 사라진 이유가 참 웃겨. 세계 최고최대의 어마무시한 권력기관인 중국 공산당이 동북공정 사업을 벌이면서 내가 화친하자고 주장했던 저 북쪽 오랑캐 여진족들이 다 한족(漢族)의 역사로 편입되면서부터야! 나는 힘센 여진족들과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고 주장하고 그 뜻을 관철시켜 천하에 둘도 없는 악질 매국노가 되어 침과 회초리를 맞았는데, 이젠 그 여진족을 하나로 품으려 했던 선구자가 된 거지. 참으로 인간세상이란 게 웃겨. 권력자의 맘에 따라 매국노였다가 선구자가 되기도 하니… 웃을 수도 없고 웃프다. 근데 술녀, 너는 왜 그리 머리는 뽀골뽀골하며 얼굴은 시커머니 슬프게 생겼니? 생긴 게 좀 안되 보인다.

보자마자 기분 나쁘게 나 생긴 거가지고 뭐라 그래? 거 참 기분 더럽네. 앞으로 그러지 마. 경고한다. 너 병구라고 했지. 조심해. 알겠지. 나도 살면서 별 해괴망측한 일을 다 당하고 살았는데 여기 온 거 보니 네 삶도 참 기구했겠구나. 네 말대로 인간세상이란 게 정말로 웃겨. 참 한심하기도 하지. 그런데 네가 그렇게나 살아생전에 최악의 매국노였던 건 맞아?

아! 미안. 앞으로 안그럴게. 요즘 내가 긴장이 풀려서 말이 헛나왔나 봐. 날더러 매국노라고 하던데 나는 나라를 팔아먹은 적이 없어. 오히려 내가 맺은 여진족 금나라와의 화친조약 덕분에 우리나라는 전쟁없이 평화로울 수 있었지. 우리나라였던 남송이 망한 것은 누군가가 여진족한테 나라를 팔아먹어서 망한 게 아니라 100여년 후 드센 몽골놈들이 쳐들어 와서 망했어. 그 놈들은 우리 땅 중원을 다 차지했지. 그리고 지놈들 나라 원나라를 세웠어. 당시 우리 한족들은 100년도 넘게 몽골놈들한테 굽신거리며 하층민 취급을 당했지. 그러다가 주씨 성을 가진 거지 출신 깡패 두목이 몽골놈들을 몰아내며 명나라를 세웠지. 250년 정도 잘 나가다가 다시 나라를 빼앗겼어. 누구한테? 바로 나 살아생전에 내가 화친조약을 맺은 여진족 금나라 놈들한테… 그러니까 나 죽고 500여년 만에 그 놈들한테 나라를 넘긴 거지. 그 때 그 떼놈들한테 나라를 넘기도록 만든 놈들이 있지. 사실 그들은 나보다 더 질이 나쁜 매국노라고 할 수 있지. 나 덕분에 우리나라는 금나라 놈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잘 살았는데 그 놈들 때문에 우리 한족의 명나라는 망하고 우리 금나라를 이어 후금이었던 청나라가 들어서게 된 거니까? 그렇다면 그 놈들이 누구냐? 바로 이자성과 오삼계라는 놈들이야. 그런데 그 놈들은 나처럼 죽고나서 치욕을 당하지 않았어. 오히려 봉기를 일으켜 자기네 명나라와 싸운 이자성이란 자는 존경받는 인물로 칭송되기도 해. 오삼계란 자는 자기가 관할하는 성문을 열어 청나라 군사가 최종승리하는 결정적 사건을 만든 장본인이지. 그 놈들이야 말로 욕을 쳐먹어도 싸. 그런데 그 놈들은 명복을 누리고 있을 거야. 나는 명복을 누릴래야 누릴 수가 없었어. 하도 저 아래 세상 년놈들이 나를 욕보여서.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겠지만 병구 너한테 억울한 사정은 있을 거같다. 세상은 참 불공평해. 한마디로 너는 네가 최악의 매국노는 아니라는 거잖아?

응! 알아 들어서 고마워. 실은 그 두 놈들이 나라를 망치게 한 장본인들이야. 그렇다고 매국노라고 할 건 아니지만. 아무튼 내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래. 그 두 놈이 힘을 합쳤다면 오랑캐 여진족 놈들한테 호락호락 당하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그 두 놈들은 자기들만의 사적인 얄팍한 계산에 따라 합치지 않고 서로 싸웠어. 그러다 나라가 오랑캐 놈들한테로 넘어갔지. 어으! 바보같은 놈들! 근데 넌 여기 어쩌다 들어온 거야? 첫 인상부터 불쌍해 보이는데 살아생전에 고생 많이 했나보다.

나는 살면서 얼굴 허연 놈들한테 당해서 모진 고생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나는 행운녀야. 끝까지 살아 남았거든. 난 내가 살던 섬의 마지막 토착 원주민이었어. 나야말로 생존의 귀재였지. 그런데 그렇게 생존하면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어. 나 죽고나서 몇십 년 후 얼굴 허연 놈들이 멋진 노래를 불렀는데 너도 아나 모르겠네. 인디언 보호구역(Indian Reservation)이라는 제목의 노래야. 거기 가사가 이래. 내가 대충 불러볼게. They took the whole Cherokee nation(그들은 체로키 민족 모든 것을 강탈했어) Put us on this reservation(우리를 보호구역이라며 쳐 넣었어) Took away our ways of life(우리의 삶 방식을 앗아갔어) The toakhawk and the bow and knife(토마호크에 칼 그리고 활도) Took away our nation tongue(우리의 언어를 차단했고) And taught their English to our young(그리고 우리 젊은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어) And all the beads we made by hand Are nowadays made in Japan(그리고 우리가 손으로 만든 모든 것들을 요즘에는 일본에서 만들고 있어) Cherokee people(체로키 사람) Cherokee tribe(체로키 부족) So proud to live(사는 게 자랑스러워) So proud to die(죽어도 자랑스러워) They took the whole Indian nation(그들은 인디언 부족을 구속시켰어) Locked us on this reservation(이 보호구역에 우릴 가두었지) Though I wear a shirt and and tie(비록 내가 셔츠와 넥타이를 매고 있어도) I'm still part redman deep inside(난 아직도 내면 깊은 곳엔 붉은 남자 일부야) Cherokee people(체로키 사람) Cherokee tribe(체로키 부족) So proud to live(사는 게 자랑스러워) So proud to die(죽어도 자랑스럽고) But maybe someday when they learn(하지만 언젠가 그들이 배울 때) Cherokee nation will return, will return(체로키 민족은 돌아올 거야, 돌아올 거야). Will return, will tetuen, will return(돌아올 거야 돌아올 거야 돌아올 거야).

노래 멋지네. 술녀 너 노래 잘 부르네. 역시 공주 출신다워. 노래 가사 들어보니까 얼굴 허연 놈들이 인디언인 체로키족을 못살게 굴었다는 거네. 술희 너네 부족들도 역시 얼굴 허연 놈들이 못살게 굴었다는 거고…

병구 너 똑똑한 거같아도 띨띨하네. 우리 부족이 저 정도로만 못살게 당했다면 얼마나 좋겠어. 내가 말도 안하지. 근데 나 살던 곳에 나타난 얼굴 허연 악마들은 우릴 못살게 구는 게 아니라 아예 다 죽여 버렸어. 사람 취급도 못받았어. 씨를 말렸아. 인디언 보호구역에 사는 체로키족들은 자기네 언어와 무기는 빼앗겼어도 그래도 영어 교육을 받고 살았다잖아. 지금도 그 후손들이 남아서 살고 있고, 또 언젠가 자기네 부족이 부활할 거라는 희망도 있고… 그런데 호주 동남부 아래 큼직한 태즈매니아 섬에 살던 우리 부족은 아예 깡그리 없어졌어. 최후의 생존자인 나는 무슨 희귀 동물인양 박제되어 버렸고… 내가 살던 섬에 살아 있는 우리 부족은 없으니 우리 부족의 부활은 꿈도 못꿔 불가능해. 다만 나는 우릴 말살한 얼굴 허연 놈들의 후손들에게라도 저주를 내리고 싶어. 내 저주가 통할지 안통할지는 몰라도 내 심정이 그래.

공주로 태어났지만 마구 쳐들어온 허연 놈들로 인해 부족의 씨가 마르고 최후로 살아남은 슬픈 인생의 여인

그렇게 저주를 내리며 복수를 하라고 누군가 너를 여기 데려온 걸까? 너는 여기 왜 왔다고 생각해. 앞으로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나는 여기서 천년 가까이 지냈는데 아직도 모르겠어. 넌 왠지 예지력이 있어 보이는데, 나보다는 알 수 있을 거같은데...

날 너무 똑똑하게 보아주니 고맙기는 한데 난 그냥 평범해. 우리 부족들 중에서는 똑똑한 편이었지만서도… 그런데 네가 예지력이라고 했으니 뭔가 번뜩 떠오르는 게 있는데… 아마도 무슨 미션이 주어질 거 아닐까? 그 미션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온 사람들한테 모두 주어지는 미션이 있을 거같은 생각이 드네.

아! 그런 미션이 주어지면 좋겠다. 심심해서 미치겠어. 뭔가 할 일이 있다면 신나서 날아갈 거같아. 그래 술녀 네 말을 믿어볼 게. 만일 네 말대로 여기 있는 우리한테 무슨 미션이 주어진다면 나는 너를 우리의 리더로 추천해야겠어. 그리 되면 예지력있는 술녀님으로 모실게. 여기엔 살아생전에 잘한 거든 못한 거든 기라성같은 자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네가 우리를 이끌어 주면 좋겠어.

나는 살아생전에 기라성같은 사람이 아니어서 못해. 난 못해. 나라를 팔아넘긴 엄청난 족적을 남겼다는 병구 네가 리더를 하는 게 좋겠는데… … … 근데 우리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우리 지금 서로들 희망고문 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만 두자. 희망고문… 너 희망고문 알지? 어떻게 해도 절망적인 결과만이 있을 암울한 상황에서 가지는 작은 희망으로 인해 오히려 더 괴로워지는 게 희망고문이야. 아! 정말로 괴로워진다. 그만 스톱. 나중에 어떻게 되는 그 때 생각하자. 어 그런데 밖이 왜 이리 시끄러워! 병구야 뭔 일인지 좀 알아봐. 여기 들어온지 얼마 안되었는데…

박기철 교수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