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물권색 이야기가 있는 저곳의 다섯 특징>
1. 일찍 들어오고 늦게 들어오고 선후배 없이 다 똑같은 동등한 존재다. 존대말 없이 서로 말을 터도 된다.
2. 살아생전에 언제 어디서 살았던 다른 지역에 대해 대충은 안다. 시공간 초월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다.
3. 이승에서의 집착을 다 비워 버려야 하지만 아직 미련이 있다. 물권색 욕망이 강한 인간의 관성 때문이다.
4. 한 방에서 이성끼리 대화하다 방이 바뀌며 이성 상대가 바뀐다. 덕분에 저곳에서의 생기가 은근히 살아난다.
5. 저곳에서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최종 정착지가 정해진다. 그러니 저곳은 중간 경유지가 된다.
28. 신주와 묘심
나 묘심은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대충 그렇다고 할 수 있고 완전 아니라고도 할 수 있어. 33세에 요절한 나는 생전에 영광되게 살았어. 황인종인 나랑 종족은 다르지만 백인종인 남편을 둘이나 만나고 각각의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도 낳고 딸도 낳고… 그러다 뭔지모를 불치병에 걸려 죽고 말았는데 죽고나서 내 삶은 엉망이 되었어. 죽고나서 이전에 살았던 내 삶이 엉망이 되었다니!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 너 내 말을 듣고 있는 거야? 아니면 졸고 있는 거야? 뭔 애가 그리 빌빌 삐리삐리해? 내가 지금 뭔 얘기했어?
나 신주는 똑똑한 남자야, 다 알아듣고 있어. 다만 힘과 기와 맥이 빠져서 이렇게 쳐져 있는 거야. 네가 요절했어도 살아생전에 잘 살았는데 죽고 나서 잘못되었다고 했잖아.
호호! 알아듣고 있네. 나 죽고 나서 내 심정은 억울해. 억울하다고… 너 억울이 무슨 뜻인지 알아. 억제(抑制)해서 누를 억(抑)에 울창(鬱蒼)하니 답답할 울(鬱)이야. 마음속에 아주 답답한 게 울창하게 있는데 그걸 풀지 못하고 억누르고 있는 형국이 바로 억울이야. 대체 뭐가 억울하냐? 나 죽고나서 사람들은 나보고 나라를 팔아먹은 배신자니 매국노 매국년이라고 욕하는데… 난 나라를 팔아먹지고 않았고 우리나라를 배신한 적도 없었고 매국한 적도 없었어. 그런데 그런 비난을 받으니 억울해. 난 그냥 열심히 살았어. 내가 방년의 나이 때 우리나라로 들어온 백인 남편이 나를 워낙 이뻐해서 그의 아내가 되었고 그의 아들을 낳고 그의 통역자가 되었고 그에게 우리나라의 이것저것에 대해 말해줬을 뿐이야. 그리고 지금 내가 우리나라라고 했지만 사실 나 살아생전에는 우리나라에는 여러 부족들이 있었고 그 부족들 중에서 어느 한 부족이 막강한 부족이 되고 내가 속한 부족도 통일하고 그랬을 때야. 그들은 여러 부족을 통일했으니 대제국을 이루며 잘 나갔었지. 그런데 그 제국은 포로로 잡은 사람들 염통을 꺼내 인신공양 제사를 드리는 등 잔인했어. 나는 그들의 그런 포악함을 보고 무서우면서 정이 떨어졌었지. ‘아포칼립토’라는 영화에 나온 그대로야. 그런 나라는 망해도 싸다고 여기며 증오했지. 그런데 내 남편이 이끄는 600여명의 군대가 인구 500만명의 대제국을 무너뜨렸어. 남편 군대는 총과 대포로 칼과 화살로 무장한 우리나라 군대를 제압할 수 있었어. 내가 지금 우리나라라고 하지만 나는 그 때 우리나라로 여기지 않았어. 그냥 얼굴이 나처럼 노란 같은 황인종의 나라였을 뿐이야. 우리나라의 지배계급은 나랑 다른 막강 부족이었어. 그러니 같은 나라에서 살았어도 이질감이 컸었지. 그런 나라가 내 남편의 군대에 의해 멸망할 때 나는 오히려 잘 되었다고 여겼어. 악마의 제국이 무너졌구나 하는… 물론 남편의 군대가 벌인 잔인한 원주민 학살을 보면 두려웠지. 남편의 소군대가 대제국을 멸망시키는 과정은 복잡해. 죄다 이야기할 순 없고 그냥 멸망시켰다는 게 중요해. 그런데 신주! 너 지금 내 말 잘 알아듣고 있겠지? 신주! 내가 무슨 이야기했지. 어째 딴 청을 부리는 거같아. 듣기력이 영 없는 거같아. 애가 영 시덥지가 않아. 마음에 안든다고...
뭔 말이야. 잘 알아듣고 있는 중인데… 내 스타일이 원래 그래. 좀 무심한 사람처럼 보여도 사람 말 잘 알아 듣는 편이야. 네가 살았던 너네 나라가 워낙 잔인하고 포악하게 통치하여 너네 남편이 너네 나라를 무너뜨려도 오히려 좋았다는 거잖아. 뭐 어려운 얘기도 아닌데 날 확인하고 그래... 충분히 이해했어. 죽고난 후 배신자 매국년으로 낙인찍힌 너의 억울함도 알겠고…
신주, 너 안 듣는 거 같지만 은근히 듣기력 경청력이 있구만. 맘에 들어. 그런데 보기에는 왠지 딴 생각하는 거처럼 여겨져. 딴 생각하면서 들어도 내 말을 잘 알아들으니 머리가 좋은 건가? 신주! 그래도 좀 귀 기울여 경청하는 자세도 갖추길 바래.
거 참! 요구사항도 많네. 네 이야기의 뜻을 잘 알면 그만이지 무슨 경청 자세까지 요구해. 어이가 없네. 잘 듣고 있으니 염려마. 계속 해. 내 머리 멀티야. 딴 생각해도 네 말 다 알아들어.
잘 알아듣고 있다니 할 말은 없다만... 알았어. 배신자 매국년이 된 나는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왜 내가 죽어서 욕을 먹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런데도 나한테 위로가 되는 건 내가 메스티조의 어머니로 불리고 있다는 거야. 메스티조(Mestizo)는 백인종인 유럽사람과 황인종인 아메리카 원주민의 혼혈인을 뜻하지. 나는 내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 돈 마르틴 코르테스라는 아들을 얻었고,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 마리아 하라미요라는 딸을 얻었지. 이 아들과 딸은 인류최초의 메스티조라는 타이틀이 붙지. 그런 자식을 낳은 내가 묘심이야.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인 멕시코의 베라크루즈라는 항구도시엔 내 동상이 떡하니 서있어. 죽은 자로서 그게 내 자랑이긴 하지만 내가 우리나라에서 배신자의 대명사가 된 건 나한테 치욕이야. 억울해. 나를 배신자로 부르는 지금 이 시대 여자들이 나같은 처지에 갑자기 맞딱뜨리면 다들 나처럼 될 걸. 그러니 함부로 배신자 매국노 소리를 하는 게 아니야. 나의 억울함을 너는 알겠니? 알아 들었어?
알아 들었다니깐. 거참 되게 확인하고 그러네. 그냥 말해도 되. 내가 알기론 역사에서 어ᄄᅠᆫ 사람이 배신자나 매국노가 되는 건 대개 하나의 제물이 필요해서야. 어느 누구 한 명을 꼭 집어 그를 몹쓸 배신자 매국노로 만들어 버리면 나머지는 나쁜 배신자 매국노가 되지 안잖아. 묘심! 너도 바로 그런 경우인 거같은데.
Exactly! 딱이야. 너무나 잘 이해하며 듣고 있으니 앞으로 잘 듣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을게. 너 똑똑하네. 머리가 멀티풀하게 작동하나 보네. 나라가 망했으니 망한 구실을 찾아야 했는데 내가 거기 딱 걸려 버린 거야. 그래서 내가 억울하다는 거지. 어릴 적부터 총명하며 자랄수록 요염했던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우리나라로 들어온 얼굴허연 남자의 간택을 받게 되었고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 남자의 아이를 낳게 되었고 그 남자를 통역하며 도왔을 뿐이야. 그 남자의 요청으로 그 남자 부하와 결혼도 하며 아이도 낳게 되었지. 난 나름 열심히 짧은 한 평생을 살았어.
억울해 할 필요없어. 다만 너를 매국노 배신자로 만든 사람들의 졸렬함에 대해 비난만 하면 돼. 사람들 참 치사하고 간사하지. 특히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더 그래. 남자들이 나라를 잘 지켜야 하는데 잘 지키지도 못했으면서 여자인 너한테 다 뒤집어 씌우려는 개수작이야. 넌 잘못한 거 없어. 그래도 너네 나라에 세워진 네 동상이 그런 점을 말해주고 있잖아. 너 두 남편을 만나고 잘 살았어.
그런데 내가 지금 남편이라고 부르지만 두 남편들 관점에선 나는 그냥 정부(情婦)에 불과했을지 몰라. 특히 첫 남편은 자기 본국으로 돌아가게 될 때 날 데려가지 않고 나를 그의 부하에게 하사하듯 넘겨 주었어. 나는 실망했지만 할 수 없이 두 번째 남편을 맞이하지. 내 첫 번째 남편의 삶은 영광스러우면서 기구했어. 대제국을 무너뜨리며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에스파니아 본국으로부터 시기와 질투도 받았었지. 복잡하게 살다간 남자였어. 여기 어디 있을까? 권력욕과 물질욕이 워낙 강한 남자라서. 사내다웠지. 만나고 싶지는 않아. 다만 날 진정 사랑했는지 확인은 하고파.
배신자 매국노란 주홍글씨의 낙인이 찍혀 사후 답답한 속을 억누르는 억울한 심정으로 지내는 여인
네가 물건도 아닌데 너를 자기 부하한테 넘긴, 한마디로 널 버린 놈한테 무슨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려고 해. 그냥 딱 잊고 말아. 쓸데없는 미련이야. 너를 넘겨 받은 너의 두번째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어?
내가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 남편을 통해 각각 아들과 딸을 낳았으니 내 첫 번째 남편은 남자 메스티조의 아버지였고, 두번째 남편은 여자 메스티조의 아버지였지. 나는 공히 메스티조의 어머니가 되는 거고… 메스티조가 지금 우리나라 국민의 대다수가 된 걸 보면 배신자 매국노로 욕먹고 비난받는 나는 건국의 어머니라고도 불릴 수 있어. 아무튼 두번째 남편은 젊잖은 사람이었어. 자기 상사로부터 넘겨받은 나한테 잘해주었지. 그런데 첫번째 남편도 처음엔 나한테 잘해주었는데 나중에 나를 배신 때렸잖아. 두번째 남편도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그런 나중을 맞이할 사이도 없이 나는 병에 걸려 죽게 되. 첫번째 남편이 날 살해했다는 소문도 있던데 그건 아니야. 나 말고도 정실 부인 및 여러 정부이자 애인을 거느렸던 그는 날 죽일 이유가 없었어. 그냥 사람들이 충격적 가십거리로 지어낸 낭설이야. 나는 그냥 병에 걸려 죽었어. 산 자들에게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죽은 자 만은 진실을 알아. 그 진실을 산 자들에게 알려줄 방법이 없을 뿐이지. 비운(悲運)의 여인으로 불리는 나의 짧은 인생 참 징하다. 메스티조와 건국의 어머니란 호칭과 함께 매국녀 배신녀란 비난을 한꺼번에 듣는… 아이러니야. 패러독스야.
다 듣고 보니 네 인생 참 징하구먼 징하다 징해. 징하다는 건 징그럽다기보나 징이 울리면 속이 찌릿해지듯이 속이 저린다는 뜻이야. 요즘 애들 말로 지린다는 뜻에 가깝지. 징하다. 지린다. 묘심이 삶… 내 삶은 너처럼 징하거나 지리지는 않아도 아이러니하면서 패러독스한 삶이라는 거엔 너랑 비슷해. 내가 발명한 플라스틱이란 인공물질은 인류의 삶을 편리하게 한 위대한 발명품이면서 인류의 삶에 치명적인 위험한 발명품이 되었다는 점에서. 위대함과 위험함이 서로 공존한다는 게 아이러니이고 패러독스지. 아이러니는 이율배반, 패러독스는 상호모순이야. 근데 나도 모르게 플라스틱인 점점 더 위대함이 아니라 위험함을 넘어 악독한 물질로 변했어. 나 살아생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지금 그렇게 되고말았다는 사실에 나는 우울해. 죽었으면서도 기가 빠지고 맥이 빠지지. 어둠의 복인 명복(冥福)을 누리기가 힘들어. 이럴 줄은 몰랐어.
나 살아생전엔 그런 거 없었는데, 위대했지만 그게 왜 위험한 치명적 악독한 물질이 되었다는 거야? 이해하기 힘드네.
플라스틱 쓰레기로 지구는 더러워지고 있어. 숨막힐 정도로. 이게 분해가 잘 안 되기 때문이야. 영양소의 하나인 단백질은 자연 천연 고분자 화합물이지만 플라스틱인 내가 제일 먼저 만든 인공 합성 고분자 화합물이야. 이게 분해가 잘 되지 않아서 플라스틱 폐기물 쓰레기가 엄청 증가하고 있어. 어느 정도냐 하면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마저 플라스틱 쓰레기로 오염되었을 정도야. 에베레스트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쓰레기장으로 불릴 정도야. 신들의 정원이라는 히말라야 산맥마저 쓰레기로 오염되었다니! 산악인들이 그냥 버리고 온 쓰레기의 태반(太半)은 플라스틱이야. 불행하게도 실종되어 숨진 산악인이 입고 신고 쓰고 지니고 있던 것들의 태반도 플라스틱이야. 가장 심각한 치명적 쓰레기는 바닷속 미세플라스틱이야. 미세먼지보다 훨씬 위협적인 쓰레기야. 이게 왜 위협적이냐 하면 바닷속 미세플라스틱은 생태계를 더럽게 오염시키기도 하지만 어지럽게 교란시켜. 겉으로 오염된 건 치울 수라도 있는데 교란된 건 치울 수도 없어. 속으로 근본적으로 전반적 원천적으로 파고 들어간 거기 때문에…
네 말이 사실이라면 신은 그 꼴을 어떻게 보실까? 지구의 신 말이야. 우리 땐 태양신을 믿었는데 지구의 신도 있다며? 지구에서 가장 높은 히말라야산맥의 에베레스트산까지 오염되고 지구에서 가장 낮은 바다마저 교란되었다면? 그렇다고 지구가 멸망하진 않겠지만… 지구의 신께서 어떻게 손을 써야하지 않겠어?
너 말 잘했다. 역시 똑똑똘똘 영민 총명한 묘심이네. 지구의 신은 가이아야.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여신인데 신들의 왕인 제우스의 할머니야. 그러니까 태초의 신이야. 지구의 신인 가이아는 플라스틱 쓰레기로 아프거나 신음하지 않아. 다만 귀찮거나 가려울 뿐이지. 지금까지는 그 귀찮음과 가려움을 참아 왔는데 이제 참기 힘들 지경일 거야. 그럼 어떻게 하실까? 가이아께서는 다 방법이 있어. 그냥 지구에서 플라스틱 쓰레기를 마구 함부로 버리는 인간들을 싹 정리하면 되는 거야. 가이아는 인간이 버린 쓰레기로 아플 정도로 연약하지 않아. 그리고 쓰레기를 버리는 인간에게까지 자애롭지 않아. 노자도덕경에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나와 있던데 Exactly! 그냥 쓸어버릴 거야. 지구멸망 아닌 인류멸망이지.
너 어째 인류멸망이란 말을 그리도 쉽게 하니? 그게 얼마나 무서운 건대. 플라스틱 쓰레기로 설마 인류를 멸망까지 하시겠어?
너 아직 그 심각성을 몰라서 그래. 인류멸망까지 하실 정도로 심각해. 이 심각함에 대해 더 할 얘기가 많은데 어째 밖이 소란스럽데. 뭔가 뒤숭숭해. 뭔 일이 났나?
박기철 교수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