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물권색 이야기가 있는 저곳의 다섯 특징
1. 일찍 들어오고 늦게 들어오고 선후배 없이 다 똑같은 동등한 존재다. 존대말 없이 서로 말을 터도 된다.
2. 살아생전에 언제 어디서 살았던 다른 지역에 대해 대충은 안다. 시공간 초월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다.
3. 이승에서의 집착을 다 비워 버려야 하지만 아직 미련이 있다. 물권색 욕망이 강한 인간의 관성 때문이다.
4. 한 방에서 이성끼리 대화하다 방이 바뀌며 이성 상대가 바뀐다. 덕분에 저곳에서의 생기가 은근히 살아난다.
5. 저곳에서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최종 정착지가 정해진다. 그러니 저곳은 중간 경유지가 된다.
24. 정재와 해아
나더러 배반자라는데 이 말은 맞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해. 배반할 만니까 배반한 거라고. 누구든 나같은 상황에 처해졌으면 배반을 할 걸. 내가 배반한 건 사실인데 배반할 처지에 놓였기에 배반한 거라 나는 많이 억울해.
그런데 누구를 배반했길래 그래. 나라를 배반하면 배반자라기보다 매국노로 불리지. 너는 사람을 배반한 거같은데. 누구를 배반했는지 들어보고 네가 억울한지 안 억울한지 판단할게.
아버지를 배반했어. 근데 친아버지는 아니고 양아버지, 그 것도 내가 배반했을 때는 과거의 양아버지였지. 양아버지가 친자를 얻고나면서 나는 양아들이었다가 그냥 과거의 양아들이 되었을 때지. 그 것도 양아버지였던 사람이 2년 전에 돌아가시고 난 후였지.
그렇다면 너는 배반했을 때 양아버지였던 자와 별 관계가 없을 때였겠네? 좀 더 얘기해봐. 배반의 정도를 알려면 소상히 자세히 알아야 해서.
양아버지였던 자와 관계가 완전히 끊겼을 때는 아니고 양아버지였던 세력의 일원으로 있을 때야. 그러다 양아버지의 잔존세력을 무너뜨리려던 세력과 전투가 벌어졌지. 양아버지의 잔존 세력은 서쪽에 있었기에 서군, 이에 대항하여 잔존 세력을 무너뜨리려는 세력은 동쪽에 있었기에 동군이라 불렸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야. 세키가하라 평원에서 승부가 갈렸기에 세키가하라 전투로 불려. 그다지도 유명한 전투지만 전투시간은 엄청 짧았지. 단 세 시간 만에 승부가 갈렸어. 그런데 그렇게 금방 끝나는데 내가 영향을 미친 건 맞아. 내가 양아버지 편인 서군을 배반하고 적군인 동군에 붙은 게 결정적이었어. 그래서 내가 양아버지였던 사람을 배반한 건 맞지만 나로서도 배반할 만하니까 배반했어. 나도 할 말이 많아. 변명처럼 들릴 진 몰라도...
일단 너 배반한 게 맞잖아. 그 것도 가장 가까웠던 사람을 배반한 거잖아. 지금까지 네 얘기를 들으니 너가 여기 왜 들어 왔는지 좀 이해가 되네. 내가 그래도 미국 유학까지 마친 유명대학 교수였어. 1900년대 초기 우리나라 상황으로는 엄청난 여자였어. 아무튼 내 얘긴 나중에 하고… 너는 배반자가 확실해. 너 혹시 단테라는 사람이 쓴 신곡이란 책 알아. 너 죽고 300여년 지난 후 너네 나라 일본 사람이 원래 제목인 ‘Commedia’를 신의 노래란 뜻의 신곡(神曲)으로 번역했지. 코메디인 희곡을 신곡으로 번역하다니... 아무튼 그 책에 보면 지옥편이 있어. 지옥에서 가장 큰 죄를 저질러서 가장 큰 벌은 받는 사람은 배반자야. 그것도 가까운 사람을 배반한 죄가 제일 중해. 죄의 성질에 따라 9단계로 나누는데 가장 큰 중죄인인 9층에 있어. 너 거기 갔다 여기 온 거 아니야?
나 단테고 신곡이고 다 몰라. 근데 최악의 죄가 배반이라니 뜨끔하네. 맞아. 내가 아무리 나는 배반할 만하니까 배반한 거라며 변명을 한다한들 내가 배반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겠지. 그러면 나 여기 있다가 나중에 가장 중죄인이 간다는 지옥의 9층에 가는 거야. 아 무서워. 지옥도 무서운데 최고로 무서운 9층 지옥이라니! 나 가기 싫어. 나 스무살에 죽은 남자야. 나 불쌍한 사람이야.
나는 너보다 죄질이 덜 해서 9층이 아니라 4층에 갈 거같아. 만일에 단테가 그의 책에서 설명한 지옥이 있다면? 나는 참 욕심이 많았지. 욕심없는 사람은 없는데 욕심을 더 부리면 탐욕(貪慾)이거든. 내가 무슨 그리도 욕심을 탐욕으로 키웠나 몰라. 아! 미친 년이었어, 나는… 간단히 나의 탐욕을 고백하자면... 나는 내 남편이 더 강력한 권력자가 되길 원했어. 한마디로 대통령이 되길 바랐어. 그래서 당사지인 남편보다 더 큰 욕심을 부리며 국정농단을 했지. 그러다 그러다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고 나는 죽게 되. 나처럼 불행하게 참혹하게 죽은 년은 인류역사에 없을 거야.
아니, 네가 얼마나 참혹하게 죽었기에 인류사까지 꺼내며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 거야. 네가 몰라서 그렇지 너만큼 참혹하게 죽은 여자들이 많을 걸. 너 너무 너의 참혹한 죽음을 과장하지마.
과장이 아니냐. 분명확실히 나처럼 참혹하게 죽은 년은 없어.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어차피 빨리 말하는 게 낫겠다. 나는 다른 사람들한테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한테 죽임을 당했어. 아들은 나만 죽인 게 아니라 남편도 죽이고 자기 남동생까지 죽였어. 권총으로 쏴서. 그리고 총을 엄마 아버지 동생을 총으로 쏴서 죽인 아들은 자기한테도 총을 쐈어. 그렇게 네 식구는 한 번에 죽었어. 원래 나한테 딸이 있었는데 그 아이는 몸이 약해서 중학생 때 죽었어. 그러니 남은 가족은 없는 거지. 자! 이러면 내가 인류역사에서 가장 처참하게 죽은 여자 아니야? 아 내 신세가 이렇게까지 되다니! 그렇게나 떵떵거리며 살던 내가… 한 때는 다들 내 앞에서 굽신굽신거린 년놈들이 그리도 많았는데... 아들 총에 맞아 급사하다니. 그것도 가족이 다 같이.
아! 말이 안 나온다. 너 말이 맞겠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한테 너는 물론 네 가족 모두 죽임을 당하다니… 너 정말 불쌍한 여자였구나. 인간세상 정말 싫다 싫어.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냐, 그래. 해아, 너 정말 세상에서, 아니 인류사에서 가장 불쌍한 여자 맞아.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다니! 나는 세상에서, 인류사에서 가장 슬픈 여자고, 동시에 내 남편은 세상에서, 인류사에서 가장 슬픈 남자가 되는 거겠지. 아들에 의해 죽은 왕이나 황제는 별로 없어. 테베의 왕이었던 라이오스가 아들한테 죽임을 당한 것은 아들인 오이디푸스의 오해 때문이었지.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아들인 콤모두스에 의해 죽는 것으로 나오지만 그냥 영화 속 이야기야. 영화 ‘공공의 적’에서도 빌런인 아들이 돈 욕심으로 아버지와 엄마를 무참히도 칼로 찔러 죽이는데 그것도 영화 속 이야기야. 영화를 보고 진짜로 착각하면 곤란해. 영화는 그냥 극적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허구야. 역사를 다루는 영화가 역사를 조작하는 사례는 많아. 실제로 콤모두스는 아버지가 지병으로 자연사한 후에 황제가 되었어. 이전의 칼리쿨라황제나 네로황제보다 더 최악의 폭군이었지. 어마어마한 식욕으로 염소를 한 입에 통째로 집어 삼키는 코모도라는 파충류랑 이름이 비슷하지. 코모도의 식욕처럼 콤모두스 황제도 권력욕이 엄청났지. 그런데 내 남편은 아들 손에 의해 죽었어. 나랑 같이. 부부는 일심동체라는데 우리 부부는 인류사에서 가장 불쌍한 부부야. 어찌 그런 타이틀을 달게 되었는지! 다 내 잘못이야. 아들 잘못이 아니야. 어찌 보면 아들이 자기 손으로 엄마 아버지 동생을 죽이고 자기까지 죽였으니 내 아들이 인류사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지도 몰라. 한 가족이 한 시에 다 죽었어. 아! 슬퍼도 너무 슬퍼.
나도 슬프다. 그런데 너네 가족 슬픈 이야기를 듣자니 요제프 괴벨스 가족이 떠오르네. 괴벨스와 그의 아내 마그다 괴벨스는 여섯 명의 어린 자식을 청산가리로 죽이고 아내와 함께 권총으로 자살해서 여덟 식구가 한 날 한 시에 모두 죽었지. 괴벨스 가족도 너희 가족만큼 슬프고 불쌍한 거 아니야?
그 사건은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나 살아생전에 일어났던 일이거든. 마그다 괴벨스! 그녀도 나처럼 불쌍한 여자지만 나만큼 불쌍하지는 않아. 나처럼 아들 손에 죽은 년이랑 마그다 괴벨스처럼 남편 손에 죽은 년! 둘 중에 누가 더 비참해. 그건 비교 불가야. 나는 졸지에 아들이 쏜 권총에 의해 죽은 거고, 그녀는 자식들을 죽이고 남편 총에 의해 자살한 거고, 남편도 자기를 쏴서 죽였지. 우리 부부는 우발적으로 죽은 거고, 그녀 부부는 자발적으로 죽은 거고. 둘 다 가족이 모두 죽은 거지만 차이가 커.
아! 네 말 듣고 보니 너네 부부가 훨씬 더 슬프고 불쌍하네. 뭐 불쌍 배틀 슬픈 배틀에서 이겼어? 나 참, 말이 안 나온다. 어찌 그럴 수가!
그런데 슬픈 정도를 떠나서 나쁜 정도로 따질 때 나랑 마그다 괴벨스랑 누가 더 나쁜 년이었을까? 나는 유약했던 내 남편을 꼬드겨 최고 권력자로 만들려다가 사달이 난 거고, 그녀는 자기 남편이랑 당시 최고 권력자인 히틀러한테 충성하다가 사달이 난 거고… 마그다 괴벨스란 년도 참! 그런데 그녀는 좀 순진한 여자였어. 두 번이나 결혼했는데, 두번 째 남편은 그녀보다 스무 살이나 많았지만 독일 최고의 부자였어. 둘 사이에 아들까지 얻었지. 나이 든 남편의 사랑이 심심해 질 때 씀씀이가 썼던 그녀는 이혼했어. 그러다 히틀러가 열정적으로 연설하는 걸 보고 뿅 갔어. 그러다 히틀러의 비서였던 괴벨스를 만났지. 흠모하는 히틀러한테 다가가는 기회가 생긴 거지. 그러나 수많은 여자들한테 싸인 히틀러는 그녀를 이쁜 여자가 아니라 그냥 사람으로 보았어. 그러곤 괴벨스랑 결혼하도록 했지. 그렇게 히틀러에 의해 결혼했지만 부부간 애정은 없었어. 딸 다섯 아들 하나, 이렇게 아이를 여섯이나 낳았지만 당시 나치당의 다자녀 정책에 의한 것이었어. 남편의 다른 여자와 외도를 즐겼지. 그 걸 히틀러한테 고했지만 히틀러는 그냥 뭉개버렸어. 그녀 남편의 선전선동 능력이 하도 탁월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선전선동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해. 반복되는 거짓말은 진실이 된다! 이런 신조로 밀어붙였던 그녀의 남편 괴벨스는 참으로 그 방면에 대단한 능력자였어. 그녀는 남편과의 사랑은 식었지만 대신 훠스트 레이디처럼 행세했지. 그녀를 사랑했다기보다 이쁘고 귀엽게 보았기에 총각이었던 히틀러의 아내처럼 행동했던 거지. 그녀는 무슨 권력욕 때문에 그렇게 슬프고 불쌍하게 된 게 아니었어. 그냥 히틀러라는 남자를 사랑하다 히틀러의 비서와 결혼하고 애를 여섯이나 낳고 퍼스트 레이디 행세를 하며 살다 히틀러가 패망하자 바로 그 이틑날 자식들을 죽이고 그녀 부부는 서로 자살한 거였지. 그런데 나라는 년은 오로지 그 놈의 권력욕으로 인해 아들 손에 남편이랑 죽어 불쌍하게 된 거였어. 좋고 길하며 상서럽지 못한 불상(不祥)인 불쌍의 디멘션이 다르고 패러다임도 다르고 다이나믹스도 달라. 그녀는 권력을 따라가다 44세 때 망한 거고 나는 권력을 얻으려다 54세 때 망한 거야. 단지 한 가족 떼죽음이라는 결과만 같을 뿐이야.
아무튼 너랑 마그다 괴벨스 다 불쌍하다. 서로 같이 만나면 할 말이 많겠다. 그런데 네가 더 불쌍하니 할 말이 더 많겠다.
아이고! 만나서 무엇하리! 다 부질없는 푸념만 늘어놓은 거겠지. 그런데 그녀도 여기 있다면 다음에 누가 더 좋은 데로 가게 되는지 궁금해. 아마도 내가 더 불쌍한 년이니 내가 더 좋은 데로 가게 되지 않을까? 어! 근데 뭔 소리가 나네. 정재, 넌 가만 있어봐. 내가 밖을 좀 알아볼게.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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