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장편소설】 저곳 - 19. 임제와 오미

박기철 승인 2024.10.15 16:54 의견 0

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아! 지겹고도 지겨워라. 도대체 여기 관리하는 작자들은 뭐하나 몰라. 어떤 사람들은 여기 들어 와서 더 좋은 데로 가는지 나쁜 데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3년이나 4년 있다가 나가기도 한다던데 나는 뭐야. 3500여 년이나 여기서 이러고 있어. 나보다 오래 있는 자들은 거의 없을 걸. 미치겠다, 정말! 나 여기서 탈출하고 싶어. 천국이면 좋겠지만 지옥이라고 상관없어. 여기만 아니면 되.

뭐! 지옥이라도 상관없다고? 얘가 정말 속편한 소리하네. 여기서 편하게 지내니까 무서운 게 없구나. 너 지옥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기나 해. 나도 안 가봐서 잘은 모르지만 들리는 얘기로는 너무너무 무서운 곳이래. 천국이야 가면 좋겠지만 천국을 안가고 지옥에 갈 바에야 아예 여기서 있는 게 좋을 걸.

나도 알아. 그런데 너무 오래 있으니까 하도 답답해서 하는 소리야. 솔직히 말하면 나 지옥가기 싫어. 그런데 나 천국 갈 수 있을까? 갈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 못갈 거 같기도 하고…

아마도 여기를 관리하는 가장 높으신 분께서도 그게 잘 판단이 안 되니까 널 여기 오래 놔두는 거 같아. 도대체 넌 살아생전에 뭘 어떻게 했길래? 나도 여기서 천년 넘게 있어서 지리하고 지루한데 너는 오죽하겠어. 넌 뭘 잘했고 뭘 잘못한 거 같아?

난 살아생전에 내가 뭘 잘하고 뭘 못하고 하는 생각이 없었어. 전혀 없었어. 아예 없었어. 그냥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살았을 뿐이야. 나보고 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로 구분되는 신분제도인 카스트제도를 만들어 하층민을 억압했다고 하는데… 글쎄 그게 잘못이라면 양반-중인-평민-노비로 구분되는 신분제도를 만든 조선이라는 나라의 지배층도 나처럼 잘못한 거잖아. 우리 때는 내가 쳐들어 간 나라의 토착 원주민을 최하층 수드라라고 했지만 저들은 그냥 자기네랑 같은 동족인 한민족을 최하층 노비로 삼았으니 더욱 악랄하다고 할 수 있겠지. 그것도 전국민의 50% 이상이 같은 동족인 노비였다니 말이 안나와. 나 때는 최하층인 수드라의 비율이 2/3 정도로 많기는 했어도 그들 최하층은 우리가 쳐들어 갔을 때 원래 그 땅에 살던 원주민들이라 많은 거야. 그런데 자기네랑 같은 동족의 절반이 최하층 노비라니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

나 살아생전에도 노비들은 있었어. 나는 최상층 중에서도 최상층이고 여왕이었지. 그리고 노비들은 전국민의 6% 정도 된다는 보고를 들었어. 다만 우리네 같은 민족을 노비로 삼지는 않았어. 전쟁 포로나 우리랑 좀 다른 족속의 사람들을 노비로 삼았지. 그런데 어떻게 50% 이상이나 되는 노비가 생겼는지 이해되지 않아.

국민들 중에서 노비가 많으면 국가로서는 안좋아. 노비는 세금을 내지 않으니 국가재정의 기반인 세금이 줄어들기 때문이야. 노비가 많아지면 국고도 줄어들게 되어 있어. 그런데도 노비가 많아지는 건 당시의 지배계층이 노비를 인간이 아니라 재산으로 삼았기 때문이야. 국가재정인 국고가 줄든말든 자기재산이 불어나면 좋은 거니까 멀쩡하게 태어난 사람을 노비로 정한 거지. 그리 되면 재산이 늘어나니까 좋은 거고. 가령 어떤 양반 집에 노비가 있는데 그 노비를 평민이랑 결혼시키면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노비가 되는 거지. 이런 게 일천즉천(一賤則賤)이야. 부모 중 한쪽이 천한 노비면 자식도 천한 노비라는 거야. 엄마가 양반이나 평민이라도 아버지가 노비면 종부법(從父法), 아버지가 양반이나 평민이라도 엄마가 노비면 종모법(從母法)이라는 것도 있어. 둘 다 노비 숫자를 늘려 자기네 집안 재산을 늘리려는 꼼수였어. 가장 이해가 안되는 건 어느 양반이 노비인 여자를 건드려 애를 낳으면 그 애도 천민이 되는 거였어. 어떻게 권력을 가진 양반도 자기의 씨로 낳은 애를 천민인 노예로 삼을 수 있는 거지? 자기 자식도 노비가 되면 재산이 되는 거니까 좋다는 건가? 세상에 자기 자식마저 노비로 만드는 법이 어디 있어? 도무지 도대체 도저히! 그런 제도가 운영되었다는 게 이해되지 않아. 정상이 아닌 사회야.

내가 여왕이었을 때 그런 꼼수를 부리는 법이 있다면 나는 강력하게 막았을 텐데. 어찌 그런 우악스런 법이 나왔을까? 노비는 사람이 아니라 재산이라는 잘못된 생각이니까? 나 때는 그냥 노비는 재산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이었어. 차별이 있기는 했어도 그리 심하지는 않았어. 대개 노비들은 우리랑 같은 민족도 아니었어. 저기 변방에서 힘들게 살던 사람들이 살자고 우리한테 왔을 때 그들을 노비로 삼았었지. 그런데 같은 민족을 그것도 자기 자식마저 노비로 만들다니? 경악할 일이다. 나 때는 귀족들의 힘이 막강하기는 했어도 그래도 그런 막가파들은 아니었어. 내가 그 귀족들한테 하도 당해서 그들 욕을 많이 했는데 진짜 욕먹을 작자들은 따로 있었네. 그런데 그게 너네 나라에서 그랬다는 건 아니잖아. 너네 나라에 있었던 카스트제도보다 더 나쁜 신분제도가 있다는 걸 설명하려다가 그런 말도 안되는 예를 말한 거잖아. 그런데 너는 뭔 잘못을 하였길래 여기 들어 왔어?

그 걸 도무지 나도 모르겠어. 그 것도 3500년 동안이나 여기 이방에 가두어 두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어. 내가 살던 나라에서 지금 나를 교주로 떠받들어야 할 상황에 내가 뭔 잘못을 했다고 여기 있는 거야? 여기 있어야 할 악랄한 놈은 따로 있어. 죄없는 나 좀 빼주고 죄많은 그 놈을 여기 오라고 하면 좋겠는데…

그 놈이란 사람은 누구지? 네 말을 들어보니 잘못한 악행이 분명한 사람이 분명한 거같은데…

맞아! 그 놈은 왕이었던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된 놈이야. 권력욕이 대단했던 놈이였지. 권력 싸움에는 아비 자식도 없다는데 딱 그런 막되먹은 케이스야. 그런데 그렇게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고서 겁이 났었겠지. 특히 이복동생이 만만치 않았대. 아버지를 죽인 이복 형을 복수한다고 절치부심(切齒腐心)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칼을 갈았지. 동생이 쳐들어 올까 겁이 난 그 형 놈은 높은 바위산에 요새와 같은 왕궁을 만들어 거기로 들어가서 살았어. 그런데 드디어 걱정하던 대로 이복동생의 군대가 쳐들어 왔어. 왕의 군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지. 바위산에 요새 왕궁을 지은지 1년도 안되서 왕은 자결하고 말았어. 권력욕에 쩌든 인간의 비극적 말로는 비참했지. 금마 지금 여기 있을지 몰라. 금마는 없다면 여기 있다고 죄악을 판결받고 지옥으로 갔을 거야. 금마는 나 살아생전으로부터 2000년 지나 살았던 내 먼 후손이야.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에 살았던 스리랑카의 카사파 왕이야. 지금 그 비극의 현장은 스리랑카에서 가장 비싼 관광지야. 스리랑카를 가면 꼭 가야 할 머스트(must) 장소지. 현지인은 입장료가 500원인데 외국인은 35달러, 즉 50,000원이나 되. 현지인보다 외국인은 100배나 비싼 돈을 주고 200m 높이의 바위를 힘들게 걸어 올라가야 하지. 그야말로 돈주고 사서 고생하는 곳이야. 물론 올라가면 내려다 보이는 풍광이 좋긴 하지만 풍광 좋은 곳은 거기 말고도 많아. 그럼에도 사람들은 거기를 비싼 돈주고 가는데 그런 비극의 스토리텔링이 있는 장소라서 가는 걸꺼야.

그리스 신화에도 어머니인 가이아의 간청으로 아버지인 우라노스의 중요한 거시기인 양물(陽物)을 싹뚝 잘라 죽인 크로노스도 있고, 신탁의 예언에 따라 자기 아버지인 줄도 모르고 아버지를 죽인 오이디푸스도 있지만 크로노스와 오이디푸스는 권력욕에 눈멀어 아버지를 죽인 건 아니지. 그런데 그 카사파왕이라는 작자는 오로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를 죽였네. 권력자인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경우는 여럿 있어도 아들이 권력자인 아버지를 죽인 경우는 별로 없다고 들었어. 그런 점에서 그 놈은 정말로 특이한 놈일세. 나쁜 놈이야. 너의 2000년 먼 후손이라지만 너는 그 놈 정도로 특히하게 유난히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은데...

내 말이 그래. 난 뭔 잘못인지 나조차도 모르고, 나랑 이야기 나누었던 여러 사람들도 잘 몰라. 그래도 뭔가 잘못이 있으니까 여기 끌려 온 거 아닐까? 네가 생각하기에 뭐같아? 나의 분명확실하지 않은 애매모호한 잘못이…

글쎄? 아까 네 이야기 들어보니까 너네 종족이 원주민을 저 멀리 남쪽으로 몰아내고 몰아내지 못한 원주민을 최하층 노예로 삼은 잘못 밖에는 없는 거같은데. 그런데 그 정도 잘못으로 여기 들어 왔다는 게 좀 이상하네. 인류역사에는 그 정도로 침략해서 원주민을 몰아내고 노예로 삼는 것은 비일비재하잖아. 잘못일 것같지는 않은데... 네가 아직 말하지 못한 너의 은밀한 잘못이 있는 거 아니야? 여기서 고백해봐. 그래야 너도 여기서 어디로 가든 이 지겨운 여기에서 빠져 나갈 거 아니야?

알겠어. 내 잘못이 무엇이 될 것인지 가만히 생각해 볼께. 그런데 생각이 잘 안나. 시간이 필요해. 내가 뭔 잘못을 했는지 따져보고 살펴보고 헤아려야 하겠어. 그 전에 오미, 네 이야기 들어보자.

살아생전에 도대체 뭔 잘못을 저질렀는지본인도 도저히 모르고 후손들도 도무지 모르는 사람 자

OK 좋아.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 사실 나도 살아생전에 뭔 잘못을 했는지 잘 몰라. 난 그냥 나쁜 년으로 조작되어졌다고 나름 생각하는데… 내가 뭘 잘못 했는지 정확하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 나는 하도 가짜 뉴스와 선동에 시달리다 살았는데 죽어서도 그런 게 없어지지 않고 점점 퍼졌어. 내가 남자를 궁에다 들여 정사(情事)나 즐기고 나라를 다스리는 정사(政事)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소문에 나는 살아생전에도 괴롭고 지금도 괴로워. 내가 남자 품이 그립기는 해서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기는 했어도 나는 소문처럼 막되먹은 여왕은 아니었어. 나는 나름대로 국력이 쇠약해져 망해가려는 나라를 살리려고 노력을 했어. 나는 억울해. 그런데 나는 그렇게 색이나 즐기는 색군 여왕으로 완전히 포지셔닝되어 있어서 나의 억울함을 풀기는 어려워.

오미, 네 억울함을 여기서 가장 고참인 임제 내가 들어줄게. 네 인상을 보아하니 그렇게 어리석은 여자는 아닌 것같은데. 그래도 사람이란 게 겉만 봐서는 몰라. 말로만 들어서도 모르지만 내가 네 이야기 들어보고 너를 평가할 게. 너가 정말로 억울한지 아니면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았어. 내가 여왕이었을 때 제법 똘똘한 신하가 있었어. 그는 당나라에까지 유학 다녀온 사람이었는데 거기서 장원급제까지 했대. 그야말로 천재였어. 당나라에서도 똑똑하기로 이름을 날렸대. 그가 쓴 문장이 하도 출중하며 훌륭하여 황제에게까지 그 명성이 알려졌다고 하더군. 거기서 살아도 충분히 출세할 사람이었어. 그런데 고향을 그리는 향수병에 걸렸는지 아니면 뜻한 바가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17년 만에 귀국하였지. 이 때 나를 가장 잘 아는 어느 사람이 내 밑에 그를 두고 쓰라며 천거하였는데 한 번 들라했어. 사람이 괜찮았어. 범상치 않았어. 나보다 여덟 살 정도 많은 남자였는데 아주 의젓하며 풍채가 좋았어. 말도 또렷하게 잘 했어. 믿을 만한 남자였어. 여왕인 내가 보기에도 매력적 남자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중심을 잡고 흐트러지지 않으며 공사 구분을 확실히 했어. 그렇게 나는 그를 나랑 직접 가까이 두지 않고 저 멀리 한반도 남부 서해 해안 지방의 태수로 임명했어. 지금의 군수같은 직이야. 그를 발령처로 보내기 전에 나는 지시 하나를 내렸지. 우리나라를 이전처럼 다시 강국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제안해 보라고 귀띔을 준 거지. 몇 달 후 어느날 그는 나한테 보고할 게 있다고 왔어. 나는 기쁜 마름으로 그를 들라 했지. 반듯한 선비 모습 그대로더군. 아무튼 그는 자신의 구상을 열 가지로 펼쳤어.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들이란 뜻의 시무십조(時務十條)였어. 지금 그 정확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다고 들었어. 그런데 나는 그로부터 직접 보고받았기에 그 내용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 그 내용을 요약하면 간단해. 신분사회의 골간이었던 골품제 철폐였어. 골품제를 대신할 전면적인 과거제 실시와 인사정책의 쇄신이었어. 그렇게 하여 강력한 왕권을 마련하고 유능한 관료를 뽑아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구축하자는 거였어. 이를 위해 세제를 개혁해 국고를 든든히 하고 지방 호족세력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했어. 반드시 이렇게 해야 나라가 다시 살아난다고 그는 강력하게 주장했어. 이러한 내용이 적힌 그의 글은 우선 명문이었어. 하지만 그렇게 시행하기는 꺼려졌어. 왜냐하면 하루아침에 제도라는 게 변하기가 힘들거든. 그렇게 내가 결재를 미적거리니까 그는 점진적 개선이 아니라 지금 당장 시급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비장하게 역설했어. 진심으로 말하는 게 느껴졌어. 망설이다가 나는 결재했어. “이대로 시행하라!” 그렇게 명했지만 사실 걱정이 많았어. “과연 이대로 될 수 있을까?” 나는 왕권이 약한 여왕이었어. 이러한 나의 걱정은 너무나도 빨리 실현되었어. 여자이지만 명색이 왕인 나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귀족 대신들은 아주 난리가 났어. 아주 나를 죽일 듯이 달려 들었어. 그 때부터 나를 이상한 여왕으로 만드는 모함과 선동질 더욱 노골적이며 집요해졌어. 나는 그 것에 시달려 마음고생이 심하고 몸에 병까지 얻었어. 그리고 나는 3년 만에 죽고 말았지. 내 나이 32세 때였어. 한창인 나이였을 때지.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네가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지! 너를 보좌한다는 고관대작들이 얼마나 너를 괴롭혔을지... 그런데 그렇게 시무십조를 너에게 제안한 그 반듯한 남자는 어떻게 되었어?

그는 도저히 귀족들의 등쌀에 버티치 못하고 그냥 훌훌 훨훨 활활 날아갔어. 여기저기 방랑하며 살았어. 그런데도 그가 지나갔던 곳은 거의 다 유적지가 되었어. 그는 내가 살던 궁궐로부터 수십리 아래쪽으로 떨어진 바닷가 마을에 갔는데 거기 어느 작은 섬 바닷가 바위에 해운대(海雲臺)라고 새겼대. 그는 바다 구름인 해운처럼 살았어. 고독한 구름처럼 살았어. 고운(孤雲)이라는 그의 호는 그래서 지어졌을 거야. 거기 말고도 그의 흔적들은 아주 많아.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는 죽지 않고 신선이 되었다고 하던데 그럴 만도 해. 정말 대단한 남자였어. 나라를 살리려는 뜻을 펼치지 못했지만… 나는 색이나 밝히는 여왕이 되었지만 그는 레전드 전설이 되었어. 그런데 밖이 어수선한데. 뭔 일이지?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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