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장편소설】 저곳 - 14. 정재와 축희㊦

박기철 승인 2024.07.11 09:39 | 최종 수정 2024.07.15 10:21 의견 0

14. 정재와 축희㊦

그래. 축희 네 말대로 배반은 많았지. 나만 배반한 게 아니라 인류사에서 배반은 일상이었어. 그리고 나도 할 말이 있는 게, 내가 양아버지를 배반했다지만 나도 배반할 만하니까 배반한 거야. 내가 아무리 전투 중에 급작스레 배반했다지만 배반할 명분이 없던 게 아니었어. 일단 나는 양아버지의 극악무도했던 잔인잔혹함을 알기에 아버지 쪽에 원래 정이 가지 않았어. 오히려 내가 위태로울 때 나한테 정을 주었던 건 반아버지 쪽 지도자인 아저씨였어. 그러니 내가 그 아저씨 쪽한테 붙은 거겠지. 결국 그 아저씨는 아버지가 가졌던 권력을 독차지했어. 그래도 아버지의 친자는 살아 있었는데 아버지는 결국 그 친자마저도 죽게 만들지. 그의 나이 22세 때였어. 190cm의 거구에 인물이 좋은 준수한 청년이었지. 어떻게 왜소한 아버지한테서 그런 아들이 나왔는지 몰라.

양아버지였다지만 아버지를 배신하여 아버지의 가문을 몰락케 한 단초를 깔았던 아들


아! 그렇다면 당연히 그 아들은 네 양아버지의 친자가 아니라 측실 부인이 다른 남자랑 정을 통해 낳은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아나닐 만도 했겠는데.

너 참 눈치 빠르네. 머리가 좋은 거야? 딱 맞았어. 정말로 그런 소문이 돌았어. 아무튼 아버지의 친자로 공식 인정받는 그는 엄마랑 같이 비참하게 죽었지. 나의 배신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나는 맘이 편치 못해. 아저씨는 아버지 살아생전에 아버지 친자를 보호하겠다고 그토록 굳게 약속했건만 권력의 세계에서 그런 약속은 순진하게 지켜질 수 없는 법이야. 친자는 자기 엄마랑 어느 성에서 살았는데 그 성이 아주 굳건해서 정복하기 힘들었는데 권력욕에 음흉한 아저씨는 아버지 친자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선 상대를 안심시키고 쳐들어가 결국 다 죽여 버리고 말아. 역사에서 평화협정이 허무하게 끝난 사례들은 아주 많아. 수두룩해. 이 평화협정도 그 중에 하나 들어가. 그렇게 아버지가 남긴 가족들과 신하들은 씨를 말려 모두 죽여 버리고 말지. 아버지가 누렸던 권력은 다 사라지고 말았어. 그리고 그 자리를 얼굴이 두껍고 검은 후흑학(厚黑學)에 능한 아저씨가 모두 다 온통 완전히 거머쥐게 되지. 그리고 그의 후계로 이어지는 정권이 265년간 지속되지.

그럼! 너는 아버지를 배신했지만 그 아저씨 편에 붙어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공신이니 잘 살았겠구만.

그랬으면 좋으련만 그러지 못했어. 나는 아저씨로부터 넓은 영지를 받고 잘 나가며 잘 살다가 21살에 죽었어. 그야말로 갑자기 급사(急死)하며 요절(夭折)한 거지. 사람들은 내가 죽은 이유에 대해 지들끼리 말들이 많아. 내가 양아버지를 배반해서 양심의 가책으로 죽었다느니… 하지만 다 부질없는 소리야. 그냥 매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며칠 앓다가 죽었어. 내가 죽고 나서 1년 후에 아버지의 친자가 여기 들어 오더군. 여기서도 당당한 체격에 허우대는 멀쩡하다군. 나이는 내가 많지만 나랑 비슷한 20대 초반 나이에 죽었으니 서로 할 말이 많았지. 특히 서로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친자건 양자건 간에 다 아버지의 아들이었으니 묘한 관계였지. 물론 양자인 나의 배반으로 인해 권력이 아버지로부터 아저씨 쪽으로 넘어가 아버지의 친자가 죽었으니 나를 심하게 책망할 만도 했지만 그는 그냥 다 초월한 상태였어. 그래서 잠시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수 있었지. 아! 내가 말을 많이 했네. 축희, 네 얘기 좀 들어야겠다. 난 좀 피곤하다.

그래. 좀 쉬어. 내 얘긴 좀 간단하게 할게. 주요 핵심만 압축 요약해서… 그래도 할 말을 다 할 수 있어. 내가 고급창부로 일했던 엄마 밑에서 자랐다가 엄마의 정부가 된 어느 부자 아저씨 덕분에 교육도 받고 결혼까지 했다가 이혼하고 왕의 정부가 되었다는 얘기까진 한 거 같은데… 너처럼 동양인인 을식이란 남자한테… 아무튼 왕이 나의 육체적 미모에 홀딱 빠져 나는 그의 공식적인 정부가 되었지만 나는 한창 나이인 30대 초반부터 왕과 잠자리를 하지 못하게 되었어. 왜 그랬는지는 별로 말하기 싫은데... 아무리 내가 이뻐도 주변에 여자들이 그렇게나 쌔고 샜는데 왕이 나만 좋아했겠어.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색을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었던 거 같아. 젊었을 때라지만 내 몸이 그렇게 따라가 주지 못한 탓도 있겠지. 내가 보기에도 난 그 쪽으로는 소질이 크게 없는 것 같아. 그렇다면 나는 왕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그냥 끝나 버려야 되는 거 아니야? 그 것도 여자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호색한(好色漢) 왕이었으니 더 그래야 되는 거 아님?

그렇겠네. 축희, 너는 그럼 그냥 그렇게 젊은 나이에 사그라졌다는 거야. 그건 아닐 것같은데. 그랬다면 감히 여기 들어올 수 없지. 네 잎에서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할 거 같은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맞아. 궁전에 나보다 젊고 아리따운 정부(情婦)들이 많았던 왕은 나의 육체보다 나의 정신을 사랑하기 시작했어. 내 몸보다 내 마음을 더 좋아했다는 거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풍부한 학식, 세련된 교양, 고상한 지혜, 온순한 성품, 탁월한 사고… 뭐 이런 것들을 좋아하게 된 거지. 왕은 침대에서 나를 안지는 않더라도 거실에서 나랑 말하는 걸 좋아했어. 육체적으로 아름다운 여인들은 넘쳐나도 나처럼 정신적으로 뛰어난 여인은 없었던 거야. 왕이 나를 총애한다는 거는 나한테 권력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걸 뜻해. 여기서 중요한 건 나는 그 권력을 나의 사치를 위해서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야. 내가 생각해도 난 대단한 여자였어. 나는 학문, 그리고 예술 문화, 이런 쪽에 관심을 두며 그 것들의 수준을 높이는데 나의 권력을 사용했어. 여러 학자들을 만나고 예술가들을 지원했지. 당시에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계몽주의가 활짝 꽃피우고 있을 때였는데 나는 무지한 꿈을 깨우는 계몽(啓蒙)에 관심이 많았어. 그래서 궁전으로 학자들을 불러 그들과 교류하고 그들이 하려는 일을 지원해 주었지. 세상의 수많은 지식들을 모아놓은 백과사전은 나의 그런 지원 때문에 이루어진 거라고 해도 무방해. 당시 권력자들은 지식이란 게 귀족 만이 향유할 수 있는 거란 고집이 강했지. 그런데 평민 출신이었던 나는 그 걸 배격했어. 그렇게 해서 백과사전이 나오고 지식들은 평민들에게도 공유되었어. 그리고 당시에는 바로크(Baroque) 예술이라는 게 많이 퍼져 있었는데 난 바로크적인 무게감이 맘에 들지 않았어. 찌그러뜨린 진주란 뜻의 바로크란 말처럼 괜히 억지로 힘들여 찌그러뜨리는 게 보기 싫었지. 그게 중후한 것이라지만 남성적 위압감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야. 나는 그런 마초적인 거 말고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좋아했어. 뭔가 장식을 하더라도 예쁘게 치장하는 걸 좋아했지. 사람들은 그런 걸 로코코(Rococo)라고 하더군. 로코코는 조개무늬란 뜻이야. 자세히 보면 조개무늬가 섬세하면서 화려하잖아. 바로크가 남성적 중후미라고 한다면 로코코는 여성적 섬세미라고 할 수 있지. 난 내가 입는 옷이랑 내가 있는 거실에서 이런 로코코를 나타내려고 했어. 그랬더니 날 보러 온 사람들이 좋다며 따라하더군. 그래서 그게 나 때의 대표적인 예술문화 경향이 되었어. 그렇게 나는 잘 나갔지. 왕은 그런 나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어. 비록 다른 여인들과 육체적 향락을 맘껏 즐겼으면서도… 그러면 어떻게 되었겠어. 궁전권력이 다 나한테 오는 거야. 그게 어느 정도까지였냐 하면? 내 권력이 어디까지 미쳤냐 하면? 어! 그렇데 왜 밖이 어수선해. 지금부터가 중요한데… 잠깐만!

박기철 교수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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