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장편소설】 저곳 - 14. 정재와 축희㊤

박기철 승인 2024.07.07 10:23 | 최종 수정 2024.07.07 10:24 의견 0

14. 정재와 축희㊦

내가 전에 이 방인지 어느 다른 방에서인지는 몰라도 묘심이란 여자에게 내 양아버지 얘기를 했던 거같은데… 넌 또 누구야. 뭐 여기서도 그렇게 우아한 여인인 양 폼 잡고 그래.

말 조심해. 난 살아생전에 정말로 우아한 여인이었어. 이쁘기도 하고 아는 것도 많고 재색(才色)을 겸비한 나야. 내 자랑 같지만 사실이 그래. 그리니 날 총애하는 왕 덕분에 한때 조정을 휘둘렀던 여인이었어. 우습게 보지마. 내 이름은 축희야. 전에 어느 방에서 을식이란 동양인이랑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너도 동양인이네. 너는 살아생전에 어쨌길래 여기 오게 되었어. 여기 아무나 들어오는 곳이 아니잖아. 살아생전에 배신자 간신 악녀 요부 소리를 들어야 들어오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

응, 그러가 봐. 나는 배신자 소리를 듣고 있어. 내가 살던 나라에서 역사적으로 배신자란 오명을 가진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데 나는 아주 드물게 배신자가 되었어. 그런데 나는 내가 배신자인지 잘 모르겠어.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해. 이 얘길 하려면 복잡하면서도 간단해. 간단하면서도 복잡해. 말이 좀 이상하긴 해도 그냥 그래. 내 양아버지 얘기하려면 정말 엄청나. 권력을 거머쥐고 나서 여색에 빠졌어. 원래 남자들이 권력을 얻으려는 궁극적 목적이 아름다운 여인들을 차지하고 싶어서라는 설이 있던데… 칭기즈칸이 서방 원정을 떠난 제1의 주된 목적도 피부색이 하얀 백인 여자를 차지하고 싶어서라는 설이 있던데… 터무늬 없는 낭설인가? 칭기즈칸은 실제로 그런 식으로 부하들을 부추겼지. 좋게 말해서 전쟁의 동기부여(motivation)를 한 거지. 자! 저 멀리 아름다운 백인 여인들이 있다며 그녀들을 차지하기 위해 저 나라를 정복하러 떠나자고 했다지. 아주 잔인한 말을 그것도 매우 너그럽게… 칭기즈칸 왈(曰),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은 적을 추격해 쓰러뜨리고, 그들 소유물을 독차지하여 그 여자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것며야. 그 여자들의 몸을 베개와 침대 삼아 노는 것, 이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라고… 그 단순무식한 당당한 야만성이 전율을 느끼게 하지. 그러나 아이러니컬한 건 그 잔인무도했던 칭기즈칸이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는 거야. 미국의 어느 유력 언론사에서는 지난 1000년 간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키즈칸을 꼽더군. 노마드 정신이 어쩌게 저쩌구 하면서… 참으로 역사는 가증스러워. 내 양아버지도 아름다운 여자를 얻기 위해 권력을 차지한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여자들을 탐했어. 호색한(好色漢) 정도가 아니라 방탕한(放蕩漢)이 되었지. 아버지 키가 작아서 그런지 키가 큰 여자를 특히 좋아했지. 아버지가 사는 성에는 여자들이 많았어. 오스만 투르크의 궁전에서 후궁들의 거처인 하렘(Harem)이라는 방을 두었듯이 아버지도 그렇게 많은 후궁들을 두었어. 물론 아버지는 왕은 아니었지만 천황(天皇)으로 불리는 유명무실한 왕보다 권력이 강하니 그럴 수 있었지.

남자들이 미녀를 차지하기 위해 권력을 탐한다는 말! 여자가 듣기에 기분 나쁘기도 하지만 정말 그럴 거 같기도 한데. 칭기즈칸도 그랬고 너의 양아버지도 그랬고… 사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수컷들이 권력을 차지하려는 제1의 목적은 암컷을 차지하여 자기 씨를 많이 뿌리려는 것이니까 그럴 만도 하지. 동물의 세계나 인간의 세계나 거의 비슷한 거 아니겠어. 사람이 문명화 되었다지만 동물처럼 살았던 야만 시대의 유전자는 그대로 이어져 왔던 거겠고…

축희! 과연 이해력이 빠르네. 네 말대로 아느 게 많고 유식해. 너네 나라의 왕들도 그랬을 걸. 아무튼 내 양아버지는 수많은 여자들과 방탕하게 지냈는데 이상하게도 자식이 없었어. 아버지가 무정자증(無精子症) 남자라는 소문도 성 안에 퍼졌어. 씨없는 수박처럼 정자 없는 남자라는 거지. 쉽게 말해 고자(鼓子)라고 해. 아무리 여자와 접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는… 100명의 여자랑 합방을 하는데 여자들이 아무도 애를 낳지 못했다면 이상한 거 아니야. 여자들한테 생식기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아버지한테 있는 거지. 그게 확실한 건지 아닌지는 잘 몰라도 정황상 그런 거같았어. 그러다 차차라는 측실 첩으로부터 아들을 얻었어. 아버지가 53세 때야. 아버지는 엄청나게 기뻐했지. 그야말로 물고빨고 했지. 얼마나 자기 아들을 좋아했냐 하면 사신들을 접대하는 자리에도 아들을 안고 나왔어. 그런데 아들이 죽고 말았어. 3살 때였어. 이 때 아버지는 실신을 하면서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어. 어느 날은 상투를 풀고 조정에 나타났다고 해. 그리고 맘에 안드는 신하들을 마구 죽였다고 해. 그 때 쿠테타가 일어났어야 하는데 아버지 권력이 워낙 막강하니까 꿈쩍도 못했어. 아버지는 정신착란을 겪으며 그런 와중에 바다 건너 나라에 쳐들어 갔다고 해. 쳐들어 간 나라에서 비참한 학살과 잔인한 약탈을 벌였어. 나도 나중에 10대 말 틴에이져 어린 나이었는데 양아버지의 빽으로 원정군을 통솔하게 되지. 그렇게 자신의 군사들을 바다 건러 침략군으로 보내며 그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지만 아버지가 사는 성은 고요했어. 아버지는 그다지고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3살 어린 나이에 죽자 자신의 권력을 이을 후계자가 없어지니 불안해 했어. 그래서 양자를 얻었어.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었지. 나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둘 다 양자이니 형이라고 해야 하나? 그 형이 23살 때였어. 다시는 자기 아이를 가질 수 없으니 똑똑하다고 소문난 그에게 권력을 물려줄 심산이었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형이 양자가 된 후 2년 후에 아버지가 또 측실인 차차로부터 아들을 얻었어. 할 수 없이 양자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 주려다가 기적적으로 친자를 얻었은 거지. 아버지 나이 57세 때였지. 이 때 아버지는 정말로 잔인무도했어. 권력싸움의 불씨를 없앤다며 말도 안되는 모반의 구실을 붙여 양자를 할복시키며 온 가족을 몰살시켰어. 그 가족에 속한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할 거 없이 다 죽였어. 어린애들마저도 그 무시무시한 칼로 죽였어. 그렇게 수십명이 멸족당했어. 이 때 나도 양자이기에 그렇게 죽을 뻔했지만 나는 죽지 않았어.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야. 나는 그냥 양자의 자리를 놓아야만 했어. 그렇게 나는 양아버지가 믿을 만한 어느 귀족의 아들로 보내졌어. 그리고 나는 어린 나이에 군사를 호령하는 총대장이 되었어. 그래서 내가 바다 건너 원정을 떠날 때 침략군을 호령했던 거지. 원정은 끝내 실패했어. 8년 간의 전쟁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지. 전쟁이 끝난 가장 큰 원인은 아버지의 사망이었어. 전쟁을 독려한 최고권력자가 사라지니 전쟁의 의미가 퇴색된 거지. 아버지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고 아버지 때문에 전쟁이 끝났어. 우리가 패배한 전쟁이었어. 물론 우리가 침략한 나라에 아주 탁월한 장군이 나와서 그렇게 패배하기도 했어. 아무리 적장이라도 나는 그를 존경할 만해. 그렇다고 우리가 침략한 나라가 승리한 전쟁도 아니었어. 전쟁터가 된 그 나라는 엄청난 피해를 보았거든. 승패가 애매모호하지만 굳이 따진다면 우리가 지고 저 쪽이 이긴 거지. 아버지는 아들이 죽자 정신착란 히스테리가 발동하여 엄청난 야망을 품으며 무모한 전쟁을 일으켰지만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도 권력을 놓지 않았어. 다만 살아생전에 아버지의 최대 관심사는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자기의 친자가 자기의 후계자가 되도록 하는 거였어. 신하들에게 신신당부를 하며 저 세상으로 떠났지. 향년 61세였어. 여기 어디 아버지가 계실 텐데 아마 정신이 다 나가 계실 거야. 아버지 사후 십년 정도는 그런 대로 아버지 친자의 정권이 안정되었지만 권력이란 게 그런 걸 얌전하게 내벼려 두겠어. 권력을 차지하려는 권욕(權慾)은 인간의 본성이야. 호모 사피엔스보다 먼저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부터 변함없어. 결국 내전이 일어났지. 아버지 쪽과 반아버지 쪽이 서군과 동군으로 나뉘며 피 터지게 싸웠어. 반나절 밖에 걸리지 않은 짧은 전투로 권력의 향배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지. 이 전투는 권력지형이 결정적으로 바뀐 전투라 역사에서 아주 유명해. 결국 아버지쪽 군사가 지고 말았어. 이 때 나는 당연히 아버지 쪽 군사 편이 되어서 싸웠어야 했는데 배반했어. 반아버지파 쪽에 붙고 말았지. 그럴려고 그런 건 아닌데 정말이지 얼떨결에 엉겁결에 그렇게 되고 말았어. 내가 죽은 아버지를 배반한 거지. 나의 배반으로 전투의 승리는 반아버지파가 가지게 되었어. 이 배반으로 인해 나는 배반자라는 주홍글씨 오명이 씌워진 거지.

아! 정재, 네가 배반자였구나. 그렇다고 여기서까지 낙심하지마. 언제 어디서건 배반자는 있기 마련이니까. 인류역사에서 배반이 없는 건 절대로 없어. 인류사는 배반의 역사이기도 해. 배반은 인간이 지닌 여러 본성들 중에서 하나이기도 해.

박기철 교수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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