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병구와 자영
나 병구는 여기서마저도 모멸 경멸 능욕 치욕, 온갖 멸시와 욕설을 받으며 지내고 있어. 여기서 나처럼 불쌍하며 비참한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오늘 처음 보는 너는 날 위로해 줄 것 같은 예감이 드네. 어째 우리 동족이거나 동포처럼 보이네. 나보다 먼저 살았는지 나중에 살았는지 몰라도.
네가 이 방에 들어 오기 전에 나랑 같이 있을 룸메이트가 누군지 신상조사나 호구조사를 했었는데 우리가 같은 동포인 거는 맞아. 그런데 난 너보다 약 1800년 정도 먼저 살았던 여자야. 너보다 여기를 그 만큼 먼저 들어왔다는 뜻이지. 그렇다고 여기가 뭐 선후배 따지는 데는 아니니까 마음 편히 가져. 난 살아생전에 여러 남자들을 하도 많이 살 섞으며 겪어 봐서 남자들 마음을 다 알아. 나 자영이가 병구 너를 위로할 수 있으면 위로할께.
날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러니 위로하지 말고 그냥 내 푸념이나 들어줘. 내가 다른 방에서 인정이란 여자한테 대충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자영이 너한테 좀더 자세히 말해줄게. 내가 살았던 당시에는 우리나라가 편하지 못했어. 오죽하면 당시를 배경으로 하는 수호전(水滸傳)으로도 불리는 수호지(水滸志)같은 소설이 나왔겠어. 조폭집단인 반란의 무리들이 여기저기 설치던 때였고 설상가상으로 북쪽 오랑캐들이 쳐들어 오던 때였어. 황제는 글씨나 쓰고 그림이나 그리는 예술가였지 민생이나 정치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어. 미색과 여색에 온통 탐닉하는 황제였어. 그야말로 암군(暗君)이자 혼군(昏君)이었지. 윗물이 그런데 나라가 잘 돌아갈 리가 있겠어. 내가 오랑캐들과 화친을 하자고 주장한 거에는 그런 나라 돌아가는 현실적 정세인식 때문이었어. 뭘해도 나아질 수 없는 암울한 상황! 그 때 나라는 그야말로 개판오분전이었어. 물론 나도 전쟁을 불사하며 오랑캐들과 싸워 보자며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할 수도 있었지. 허나 나는 주화론을 주장했어. 일단 화친을 하고 국력을 키워 전쟁을 하자고 했지. 하지만 내 주장은 전혀 먹히지 않았어. 결국 오랑캐가 쳐들어 왔어. 이 때 어떤 또라이같은 작자가 황제를 꼬셔 7777명의 신병이 흰옷을 입고 열심히 기도하면 오랑캐를 막을 수 있다고 했지. 헐! 그런 엉터리 술법이 어디 통하겠어. 그런게 궤변이 먹혀 들어갔던 한심한 조정이었어. 결국 괜히 싸우지도 못하고 젊은 병사들이 쳐들어온 오랑캐한테 쳐죽어 나가고 나라는 꼴랑 망했어. 결국 개판오분전에서 개판이 나고 말았지. 황제는 그 무렵에 장남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오랑캐에게 끌려갔어. 새롭게 황제가 된 아들도 끌려갔어. 황비와 딸들도 모두 끌려가서 오랑캐의 성적 노리개가 되고 말았지. 나도 끌려갔어. 온갖 고생을 다 했지. 난 위기에서 빠져 나오는데 강했어. 결국 난 기회를 보아 탈출했어. 그리고 남쪽으로 도망간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재상이 되었어. 기존 황제의 이복 동생이던 황제는 나를 신뢰했어. 이 때 또 다시 주화론과 주전론이 붙게 되는데 나는 저들의 막강한 군사력을 아는지라 여전히 주화론을 주장했지. 그런데 나보다 13살 적은 장군이 주전론을 주장했어. 그는 오랑캐와의 국지적 전투에서 승리한 전공도 있었지. 그렇더라도 나는 오랑캐와 전면전을 벌이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그는 영웅 대접을 받기도 했어. 나도 사람인지라 나는 정치적 질투심을 느끼기도 했지. 하지만 정말로 그의 주장대로 전쟁을 하면 남쪽으로 도망온 이 나라도 결코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나는 전쟁하자고 우기는 그 장군을 몰아내야 한다고 마음 먹을 수 밖에 없었어. 내가 그를 모함하게 된 이유야. 황제는 내 편을 들어주었기에 모함은 금방 통했어. 결국 그는 제거되었어. 결국 죽고 말았지. 내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지. 이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어. 덕분에 나라에서 나는 황제도 무시못하는 최고의 권력을 누리며 살았어. 그러나 죽어서 나는 최고의 치욕을 받으며 지내고 있지. 내가 제거하였던 그 장군은 죽어서 엄청난 영예를 누리며 지내게 되더군. 왕으로 추존되기도 했어. 살아생전에 그가 국지적 전투에서 이룬 그의 전공(戰功)은 부풀려 과장되기도 하면서 그는 구국의 영웅으로까지 올라갔어. 정작 나라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몇 번의 국지적 전투에서 이겼을 뿐인데… 그런데 내가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오랑캐를 물리친 구국의 영웅이 되었을 거라는 희망적 뇌피셜과 국뽕에 따른 평가지. 이에 비해 나는 나라를 망친 희대의 간신이 되었던 거고… 그렇게 난 죽고난 후에 1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지껏 불쌍한 마누라와 함께 산 사람들의 침을 맞고 회초리를 맞고 있지. 아무리 내가 모함해서 죽인 장군의 동상 앞에서 무릎 꿇고 있는 벌거숭이 석상이거나 동상이라지만 나한테는 무지하게 아파.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멸시할 수 있을까? 인간들 잔인해.
병구, 너 증말로 참말로 진짜로 안 되었구나. 그래도 세월이 지나다 보면 사정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무릎 꿇은 너네 부부 동상도 철거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여기서 나의 소원이 바로 그거야. 그렇다고 내가 모함을 해서 죽인 나의 잘못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아무리 그렇더라도 죽은 나를 수백년 동안 그렇게까지 하는 법이 또 어디 있냐는 거지. 내가 유일해. 나 가장 불쌍한 놈이야. 그런데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생각지도 못하는 틈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어. 일단 그 시작은 내가 모함한 장군의 무덤이나 사당들이 파괴된 사건이야.
아니! 네가 모함해서 죽은 장군은 사후에 구국의 영웅으로 떠받들여지던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왜 그런 난리가 난 거야? 알다가도 모르겠네.
내가 죽고나서 천년 정도 지났을 때 나라에는 광풍이 불었었어. 그야말로 미친 놈들의 난동이었지. 기존의 전통과 문화는 싹 다 파괴하자는 대혁명이 있었지. 그냥 그들이 떠받드는 한 권력자의 사상만이 최고라는 식으로 거칠게 몰아갔어. 아무리 성인이라도 이때 다 그 광란의 와중에 부정되고 전락하고 말았어. 정말 해괘한 일들이 일어난 거지. 구국의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던 그 장군도 그때 당하고 말았지. 나는 치욕을 당하고 있었던 때니까 그냥 그렇게 지나갔지. 또 세월이 몇 십년 지나자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어. 나 살던 때는 나 살던 나라만 정식적인 국가이고 주변은 싹 오랑캐로 취급했었는데 그게 완전히 달라졌어. 오랑캐들이 모두 자기네 나라라고 여기기 시작한 거지. 그러니 오랑캐들과의 화친을 주장했던 나는 오랑캐와 붙어 먹은 간신이 아니라 어차피 같은 민족인 오랑캐들과 사이좋게 지내려 했던 혜안이 있던 재상으로 여겨지게 되는 거지. 그렇게 내 원통한 일을 푸는 신원(伸冤)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어. 그렇지만 아직도 회초리와 침을 맞는 나와 내 마누라의 석상은 아직 철거되지 않았어. 하지만 조만간 철거될 날이 올지 몰라. 그 날이 오면 나는 환호의 눈물을 흘릴 거야. 역사라는 게 참 웃겨.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게 그 놈의 역사야. 신 만이 알 수 있는 진실은 모르더라도 객관적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지금까지 나는 여지껏 최악의 간신이었는데 권력자의 얄굿은 생각에 따라 나는 명재상의 반열에 오를지도 몰라. 그렇게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나는 그냥 치욕스런 내 석상만 없어지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어.
어쨌거나 너한테는 잘 되었구나. 아직 너의 천년 한(恨)을 완전히 풀지는 못했지만서도... 내가 잘 되길 기원할게. 여기서 명복을 누리길 바랄게. 그런데 내가 너에게 잘 되라고 기원을 드리고 위로도 주고 싶은데 내가 그럴 자격이 되는 여자인지는 나 자신도 의문이야. 나 보통 여자가 아니야. 엄청나.
고마워, 자영! 이렇게 나 잘 되라고 위로 받기는 처음이야. 싸나이 눈에서 눈물이 다 나네. 너는 나보다는 상황이 좋은 거 같다. 아직도 너한테서 요기(妖氣)가 남아 있어. 살아생전에 너 말대로 엄청났을 거같은데. 모르긴 해도.
네가 희대의 간신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면 나는 희대의 탕녀로 기록되었어. 우리나라에는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여자들이 있지만 나는 그녀들보다 엄청나. 침어(沈魚)니 낙안(落雁)이니 폐월(閉月)이니 수화(羞花)니 하면서 대륙적 뻥을 요란스레 치며 그녀들을 추켜 세우지만 걔들은 내 앞에선 그냥 깨걩이야. 난 인류 역사상 세계 최고의 음탕한 요부로 불리기도 하지. 난 하도 남자관계가 복잡해서 정작 나도 그 사연을 자세하게 얘기할 수 없어. 말하다 보면 나도 헷갈려. 이 남자가 저 남자 같기도 하고 저 남자가 이 남자 같기도 하고 그 남자가 그 남자 같기도 하고 그래. 그냥 간단하게 말할게. 어떤 여자가 날 보고 평하기를 이랬다네. “저 년은 남편 세 명과 아들 한 명을 죽이고, 나라 하나를 망하게 했으며, 군주 둘을 망치게 했다”라고. 또 열녀전이라는 역사서에는 이렇게 정식으로 기록되었다지. “세 번이나 왕후가 되었고, 일곱 번이나 대부의 아내가 되었으며, 여러 공작과 후작들이 미혹되어 정신을 잃지 않을 수가 없었다”(三為王后 七為夫人 公侯爭之 莫不迷惑失意)라고. 이밖에도 남자관계는 더 많아. 그냥 이 정도로만 말할게. 더 자세하게 말하면 정서상 좋지 않아. 그런데 모전여전(母傳女傳)이라고 정말로 내가 낳은 딸이 또 나처럼 남자들 미혹하는 끼를 타고 났어. 아무튼 날 거쳐간 수많은 남자들은 말로가 좋지 않았어. 내 음기에 남자들이 죄다 나가 떨어졌다는데 난 색녀(色女)일 뿐이지 사람을 죽이는 살녀(殺女)이고 싶지는 않았어. 그런 점에서 내 운명이 기구하기도 해. 그런데도 나는 천수를 누렸어. 오복(五福)에서 말하는 마지막 다섯 번째 고종명(考終命)한 거지. 제 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었어. 나이 들어서도 그 주체못할 미색을 발휘했었지. 후세 사람들은 내가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었는지 모르던데 난 잘 살았어. 내가 남자들한테 끼친 나쁜 살기(殺氣)에 비하면...
네가 하도 이뻐서 남자들이 너한테 불나방처럼 달려 들었을 뿐이지 네가 남자들한테 무슨 간계(姦計)나 모략, 나쁜 해꼬지를 한 건 없는 덕분이지 않을까?
그렇고 보니 그렇네. 난 그냥 미색이 유달리 뛰어났을 뿐이야. 난 이쁜 년이지 나쁜 년이나 못된 년은 아니었어. 난 그런 못된 짓은 할 줄 몰랐어. 천성이 착하고 순했어. 그래서 한 평생 잘 살았을지 몰라. 어쨌거나 나 때문에 화(禍)를 입은 남자들한테는 미안해. 여기서 다들 모아다 놓고 심심(甚深)한 위로라도 드리고 싶어. 아! 그런데 여기 밖이 왜 이리 어수선해. 뭔 일이야? 병구야! 너 좀 나가 봐봐.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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