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장편소설】 저곳 - 12. 을식과 해아(4)
박기철
승인
2024.06.10 08:00
의견
0
12-4. 권력욕이 더욱 세진 해아
네 얘기 들어보니 너네 부부가 욕심 부리지 았았다면 너희 대통령의 공적이 부각되었을 텐데. 너희 부부가 권력 욕심으로 과욕을 부리고 너희 대통령의 과오가 더욱 부각되었나 보네. 등소평은 권력을 얻고 전임 권력이었던 마오쩌뚱에 대해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며 마오의 과오를 덮어 주었다지. 알고보면 공삼과칠(功三過七)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마오쩌뚱의 공산당 게릴라 부대가 장제스의 국민당 정규 군대의 공격을 피해 도망가는 대장정을 벌이며 천신만고 끝에 공산당이 집권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는 공이 3이라면 어리석은 뻘짓이었던 대약진운동을 벌여 수천만 명이 굶어죽고 무자비한 광란이었던 문화대혁명을 벌여 수천년 간 내려온 전통문화를 다 파괴한 과가 7이였겠지. 이에 비해 너희 나라 대통령은 공팔과이(功八過二) 정도는 되지 않을까? 내가 너네 나라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이방인의 객관적 관점에서 그렇게 생각되는데… 그런데 나중에 사람들이 잘했던 공은 무시하고 잘못된 과만 부각시킨 것같네. 해아, 네 말대로 너네 나라 대통령이 워싱턴 대통령처럼 두 번의 대통령 임기 8년만 딱 하고 조용히 내려왔으면 후세에 좋은 평가를 받았을 텐데. 아쉽네. 실제로 무스타파 케말이란 독재 권력자는 15년 동안 튀르키예 대통령을 지냈지만 그의 나이 59세에 간경화로 죽게 되어 지금까지도 튀르키에의 아버지란 뜻의 아타튀르크로 불리게 되는데… 만일 그가 60세 넘어서 또 70세 넘어서까지 장기 독재를 계속 했다면 그는 아타튀르크로 불리지 않았을 꺼야. 자진해서 권력을 내려 놓지는 않았지만 딱 그만 두어야 할 때 죽음을 맞이하여 죽고나서도 영예를 누릴 수 있는 거같아. 그 나라에서 그는 거의 신적인 존재더군. 집이든 상점이든 어디서나 그의 사진이 붙어 있는 걸 보면… 대개 후세에 존경받는 권력자는 상대적으로 일찍 죽는 경우가 많아. 일찍 죽어야 후세에 좋은 평가를 받게 되지. 오래 살면 안그러기 쉬워. 권력자도 권력을 오래 가지고 있으면 부패하기 마련이야. 너희 부부는 그렇게 너네 대통령의 권력을 오래 가도록 하여 대통령에게도 안좋게 되고, 결국 너네 부부한테도 안좋게 될 거같은데…
아! 내 삶에서 그게 가장 바보같은 짓이었어. 남편의 건강도 많이 안 좋았는데 남편을 권력의 세계에서 내려오게 해야 했는데 나는 더 욕심을 부렸어. 그 욕심은 결국 내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야망이었어. 여자의 질긴 모진 못된 야망! 내 남편이 부통령 선거에서 낙선했을 때가 그 야망을 딱 끊어 버려 버려야 했는데 나는 부러지지 않았어. 더 악랄해지고 교활해졌지. 그다지도 감성적 센티멘털리스트이자 낭만적 로맨티스트였던 남편도 나를 따라 더욱 그렇게 되었어. 이번엔 떨어졌지만 다음에 꼭 붙겠다는 의지를 다졌지. 불이 활활 붙는 듯한 드센 의지였어. 잘 걷지도 못하며 허약했던 남편은 그 놈의 의욕인지 의지인지 모를 덕에 겉 보기엔 쌩쌩해졌어. 알고보면 내가 그렇게 부추긴 탓도 있고… 당신 절대로 나약해지지 말고 힘내라며 다그쳤지. 난 참 나쁜 아내였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 있는데… 우먼 파워의 대표적 존재였던 난 그 속담을 무지 싫어했지. 그런데 우리 부부한테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어. 수탉인 남편보다 암탉인 내가 너무 시끄럽게 울어 댓어. 그래서 정말 우리 부부는 폭싹 망했어. 우리 부부만 망하면 내가 이렇게 슬피 울지 않아. 이 얘기 하자면… 너무 목이 메어. 아! 미친 년 나쁜 년 어리석은 년 병신같은 년 죽어도 쌀 년! 바로 나야 나.
너무 자책하지마. 이제 살아생전에 벌인 벌어졌던 일들은 잊어버려. 사람이란 게 권력 맛을 보면 다 그래. 너 만 그런 게 아냐. 우리가 있는 여기에 다들 그런 사람들이 많은 거 같은데…
여기에 유독 그런 놈들이 그런 년들이 나도 들었는데 나 정도까지는 아닐 거야. 권력이야 누구든 가지고 싶은 것이니까 뭐라고 할 수 없는데 권력을 가져서 불운해지고 불쌍해지고 처참해지고 비참해진 사람들 중에서 우리 부부는 최상급일 거야. 아마도 2위와 한참 차이나는 1등일 거야. 그 어느 누구랑 비교해도 우리네 부부와는 비교불가야. 압도적인 최고일 거야. 참으로 불행한 거지. 우리 부부야 그래도 괜챦아. 권력을 누릴 거 다 누리고 살 만큰 살았으니까… 남편은 환갑을 넘기고 63세에 죽었고 나도 환갑을 조금 앞두고 54세에 죽었으니 그나마 괜찮다고 한 거야. 그런데 괜찮치 않은 건 자식들이야. 우리 부부한텐 딸 하나와 아들 둘이 있었는데 딸은 중학교 다닐 때 죽었어. 원래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했어. 어느 날 고열이었는데도 중간 시험이 있다고 학교에 가서 시험을 치르다가 영영 쓰러지고 말았지. 내 나이 43세 때 자식이 죽는 엄청난 슬픔을 겪었지. 우리 부부는 그 슬픔을 표현하며 요절한 딸의 비석에 이렇게 비문을 적었어.
“강희야 귀한 강희야 어두운 밤 무서워 말고 눈보라 비바람에 떨지 말고 천사, 너를 지키리니 여기 고이고이 잘 쉬어다오.요단강 건너가 다시 만나자. 1949년 11월 22일. 애닯은 아빠 엄마 씀.
부모를 여의면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다고 해서 천붕(天崩)이라고 하고 자식이 죽으면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다고 해서 단장(斷腸)이라고 하는데 정말로 우리 부부는 단장의 고통을 느꼈어.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니 세월이 약이라며 시간이 지나면 고통이 잊혀진다지만 어림도 없는 말이야. 그 고통은 사라지지 않더군. 그냥 그 슬픔과 아픔을 마음 속에 가슴 속에 지긋이 깔고 살아야 하더군. 그렇게 근근이 어렵사리 살다 남편이 최고권력자의 집사이자 비서실장이 되면서 우리 부부는 완전히 딴 판의 세상에서 살게 되면서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비극을 겪게 되지. 그 얘기하려니까 숨이 탁 막힌다. 더 이상 말을 못하겠어. 말이 안 나와. 억!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