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장편소설】 저곳 - 11. 갑철과 술녀(3)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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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4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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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죽어서도 저주하는 술녀
나는 죽기 전에 다시 내가 살던 섬으로 오게 되었어. 이제 우리 원주민 종족들이 거의 다 죽었으니 우리를 격리시킬 필요가 없어진 거겠지. 그러면서 우리를 희귀한 사람이나 신기한 동물 같은 걸로 여기며 보존할 필요성을 느낀 것 같아. 그러면서 나는 저 허연 놈들의 실체를 보다 잘 알 수 있게 되었지. 일단 저들은 우리를 애보리진이라 불렀어. 애보리진(aborigine)이란 근원(origine)으로부터(ab)란 뜻이겠지. 그러니까 자기네들이 오기 전 원래 근원적으로 살던 사람이란 뜻이겠지. 나는 애보리진 중에서 호주 대륙 남쪽에 위치한 태즈매니아에 살던 원주민이었지. 우리는 애보리진이란 어려운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어. 말 뜻은 고상할지 몰라도 애보리진이란 말이 주는 청각적 느낌이나 이미지가 왠지 싫었지. 그냥 우린 우리가 살던 곳에 당당히 살던 토착민이었어. 영국식으로는 인디전(indigen)이나, 미국식으로는 네이티브(native)란 말이 더 좋아. 허연 놈들이 오스트레일리아에 쳐들어 오기 전부터 우린 인디저니어스 오스트레일리언이었지. 허연 놈들이 북쪽과 남쪽 아메리카에 쳐들어 가기 전부터 거기 살던 원주민은 인디언이나 인디오가 아니라 네이티브 어메리칸이었던 거고. 사실 오스트레일리아고 아메리카고 다 허연 놈들이 지네들 관점에서 지어댄 알량한 말들이긴 해도… 아무튼 내가 살던 섬 바로 위의 호주 대륙에는 내가 살던 섬에서보다 훨씬 많은 토착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지. 그들이 당한 비참함은 우리 섬에 살던 원주민의 비참함과 다르지 않았어. 허연 놈들은 거기서도 똑같은 학살과 만행을 거기서도 저질렀지. 내가 아는 우리 원주민 친구들 중 몇몇은 허연 놈들이 수행하던 인류사 연구 대상으로 호주 대륙에 있는 멜번이란 도시를 다녀오기도 했어. 친구들 말 들어보니 비참한 사정이 똑같다더군.
술녀! 너 말하는 거 보니 풀죽은 생김새와 달리 똑똑하네. 똑똑해서 허연 놈들이 살려 둔 거 아냐?
내가 좀 똘똘한 편이기는 했어. 그렇다고 아주 영특한 건 아니고. 우리 종족 자체가 아주 똑똑한 쪽으로 진화한 인간들이 아니었어. 그냥 편하게 살던 종족들이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그 비참함을 겪으며 살아 남으면서 많이 똑똑해지기도 했어. 특히 나는 내가 끌려간 유배지 섬으로부터 원래 살던 섬으로 돌아 오면서 여유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면서 저 놈들의 속셈과 하는 행태를 보면서 내 머리가 좋아지게 되었어. 하여튼 그 허연 놈들은 지긋지긋한 놈들이었어. 개과천선할 생각도 없고 개과천선 되지도 못할 자들이었어. 몇몇 남지 않은 우리 친구들이 죽을 때마다 그 놈들은 친구들을 지들 무슨 연구용으로 해부했어. 내가 죽고나니 정말로 날 해부하더군. 내가 아까 말한 나의 죽기 전 유언 들었지? 첫 마디가 뭐였어? “제발 내 시체를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주시오!” 그 어떤 죽을 사람의 유언이 이렇게 시작할 수 있겠어. 가장 늦게 죽은 나는 친구들이 해부당하는 걸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던 거야. 유언의 마지막 말이 뭐였어? “제발 내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세요. 그냥 바다에 화장하여 뿌려주십시요. 제발!” 오죽하면 유언의 처음과 마지막에 이렇게 호소하고 애원했겠어. 그런데 그 놈들은 내 유언도 지키지 않고 무시했어. 난 해부당하고 더 나아가서 박제까지 당했어. 나는 죽어서도 저 놈들한테 이용당하고 살았어. 나는 저들로부터 우리 섬에서 생존했던 마지막 애보리진이란 타이틀을 달게 되었지. 이는 상처뿐인 영광보다 더 아픈 비참뿐인 타이틀이야.
네 유언을 다시 보니 그 시작과 마지막이 다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달라는 거네. 그 거 하나 들어주지 못하는 놈들이 야속(野俗)하기보다 개탄(慨嘆)스럽겠다. 나도 얼굴 허연 놈으로서 내가 대신 사죄해도 될까?
그럴 필요 없어. 나는 허연 놈들을 아예 믿지 않아. 그 놈들은 자기네가 믿는 종교를 나한테 믿도록 강요해서 저들이 다니는 교회에 따라 가기도 했었는데 다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짓이었어. 내 유언 중간에 뭐라고 했어. “나는 여태껏 교회에 나가 억지로 기도하며 당신들의 신에 기도했지만 그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우릴 죽인 당신들의 그 십자가에 매달린 악마를 저는 영원히 증오합니다.” 이렇게 그들이 절대적으로 믿는 신마저도 증오하게 된 게 나의 속 마음이었어. 우린 너무나도 비참하게 그 놈들로부터 당했으니까… 난 여기 와서도 그 놈들을 저주하는 마음으로 가득해.
술녀야! 비통한 이야기 하느라 힘들겠다. 나도 다 눈물이 나려고 한다. 이제 좀 쉬어. 이 얼굴 허연 내가 얘기할게. 너에 비하면 나는 잘 살았네. 우선 내 얼굴 허옇다고 밉게 보지는 말아줘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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