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물권색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저곳의 다섯 공리公理 axiom>

1. 일찍 들어오고 늦게 들어오고 선후배 없이 다 똑같은 동등한 존재다. 존대말 없이 서로 말을 터도 된다.

2. 살아생전에 언제 어디서 살았던 다른 지역에 대해 대충은 안다. 시공간 초월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다.

3. 이승에서의 집착을 다 비워 버려야 하지만 아직 미련이 있다. 물권색 욕망이 강한 인간의 관성 때문이다.

4. 한 방에서 이성끼리 대화하다 방이 바뀌며 이성 상대가 바뀐다. 덕분에 저곳에서의 생기가 은근히 살아난다.

5. 저곳에서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최종 정착지가 정해진다. 그러니 저곳은 중간 경유지가 된다.



40. 계성과 묘심

나만큼 머리좋고 똑똑한 영민한 왕이 있었을까? 난

언어 역사 문학 의학 과학 군사학 천문학 등 박학다식했지.

나는 인류최초의 도서관을 지어 방대한 기록을 남겼지.
나 덕분에 인류문명 시원지인 수메르의 역사가 밝혀졌어.

난 한 번도 패배를 모르는 당당한 정복왕이었어.

우리 선조 대왕들이 이룩한 인류최초의 제국을 번성시켰지.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내가 죽고난 후 두 아들 놈들이 나라를 말아먹었지.

2천년이나 그토록 찬란했던 왕국은 붕괴되었어.

물론 우리가 잔인하고 참혹하고 포악했던 건 사실이야.

우리가 침략했던 곳에선 징기즈칸 군대보다 살벌했지.

그랬던 우리가 한 순간에 허무하게 무너졌어.

그래도 망나니같은 놈들한테 안 당한 게 다행이야.

우리를 멸망시킨 바빌로니아 놈들은 좀 세련되었어.

무너졌던 바벨탑도 다시 세우고 공중정원도 만들었지.

그랬던 금마들도 동쪽 옆 페르시아 놈들한테 먹혔지만...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나 여기서 갑갑(窮屈)한 답답(悶鬱)한 이유는 따로 있어.

내가 다스렸던 그 땅이 지금은 완전히 초토화되었어.

아랍문명의 출발지이자 중심지였던 그 곳은 황무지야.

도대체 나라를 어떻게 통치했기에 그 모양인지 모르겠어.

내 당장 내려가 내 실력발휘를 해보고 싶지만 해볼 수도 없고.

그냥 바보천치같은 내 땅의 후예들을 안타깝게 원망할 뿐이야.

남자랑 여자랑 누가 더 비겁한 것 같아?

질문이 좀 거칠지만 난 이 질문에 한번에 답해.

여자는 간사(奸詐)하다지만 남자는 비겁(卑怯)해.

남자들은 지들이 할 일을 잘못해서 잘못되었을 때

그 책임을 여자한테 넘기는 놈들이 아주 많아.

마남사냥이란 말은 없어도 마녀사냥이란 말이 그렇잖아.

뭐 잘못된 일이 생기면 애꿏은 여자한테 다 뒤집어 씌워.

나는 마녀사냥은 당하지 않았지만 나는 낙인찍혔어.

나라를 지키는 건 주로 누가 할 일이야?

나라를 못지킨 남자놈들이 그 책임을 나한테 뒤집어 씌웠어.

우리나라로 쳐들어온 얼굴 허연 사내들이 날 좋아했어.

정부(情婦)라지만 나로서는 당연히 내 남편들었지.

첫 번째 남편과는 아들을, 두 번째 남편과는 딸을 낳았어.

아무튼 나 때는 나 살던 곳에 애국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어.

권력자들은 포로로 잡힌 산 사람 심장을 꺼내 제사지냈을 때지.

그 당시에 얼굴 허연 남편들의 군대가 권력자들을 멸망시켰지.

얼굴 허연 놈들의 아내로 내가 거기 부역했다는데 참, 나!

나 살던 때 여자들이라면 다 나처럼 했을 거야. 100프로!

지들이 잘못해 얼굴 허연 군대한테 패망한 거지,

그런데 나한테 패망의 원인을 뒤집어 씌우니 어이없어.

내가 뭐 그리 잘못한 것도 난 배신자 매국녀가 되었어.

메스티조의 어머니라고 날 공경하진 않을지언정 뭔 일이래.

날 그렇게 몰아간 남자들은 비겁하고 비열한 쪼다들이야.

박기철 교수

<전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