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장편소설】 저곳 - 12. 을식과 해아(5)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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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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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벼락 출세를 하는 을식
지금까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서 그럴 수도 있어. 마음을 가다듬고 좀 쉬어. 내 이야기를 할 게. 얼자 출신으로 세상을 마냥 한탄 만하다가 최하급 병졸 시험에 합격하여 왕궁 문을 지키던 나는 야망이 컸어. 어떻게 하면 내가 지키는 왕궁 안으로 들어가 왕을 만날 수 있는지 늘 살폈어. 하지만 얼자 천민 노비 출신의 최하급 쫄따구 병사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 그러다 저기 북쪽 변방에서 난이 일어났다고 들었어. 왕에게 향하는 반란이었지. 나는 이때가 기회다 싶었어. 왕궁 문을 지키는 쫄따구 병졸 주제에 나는 상소문을 올렸어. 내가 난을 진압하고 역적 놈의 머리를 바치겠다고 했지. 행운의 여신이 내 편이었는지 그 상소문이 어떻게 왕한테까지 갔나봐. 왕은 상소문에 적힌 나의 호방함과 용기에 감탄했다고 해. 결국 난은 진압되었어. 내가 지휘한 게 아니니까 진압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렇게 진압하겠다고 용기있게 적극 나선 덕분에 왕의 관심을 받았어. 특히 내 상소문에 적힌 나의 글솜씨가 대단하다고 여기셨나봐. 그래서 나는 왕의 명령으로 낮은 벼슬을 얻게 되었어. 이때 얼자 출신이라 벼슬은 안 된다며 반대하는 대신들이 많았다고 하지만 왕권이 매우 강력했던 왕은 반대를 무릅쓰고 나한테 벼슬을 내렸어. 나한텐 내 삶을 전환시키며 도약시킨 최고영광의 순간이었지. 나중엔 특별한 과거시험에 응시하기도 했어. 처음엔 탈락했어. 그런데 왕은 내가 떨어진 것을 아쉬워 하며 내가 쓴 시험지를 다시 가져오게 하여 1등인 장원으로 올렸어. 정말이지 왕으로부터 받은 은총이 엄청났던 거지. 내가 상상할 수도 없던 벼락출세를 한 거지. 그야말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가 내 마음속에 머리속에 입속에서 나왔어. 이렇게 왕으로부터 사랑받는 나를 대신들은 탐탁치 않게 여겼어. “얼자 주제에…” 나한테 대놓고 말하진 않아도 이렇게 말하는 게 들리는 듯했어. 이때 나는 어떻게 처세해야 살아 남을 수 있는지 내 마음 속 의지를 갈고 닦았어.
을식, 너 참 대단한 남자구나. 개천에서 용났다는데 그냥 운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네 능력으로 용이 되었구나. 난 사실 너 같은 남자를 좋아해. 비리비리한 남자들은 싫어. 단호하면서도 야망이 큰 남자가 좋아. 나랑 맞는 남자네. 내 ‘꽈’야. 생긴 것도 훤칠하고 몸도 탄탄하네. 게다가 왕을 감동시킬 만한 문장력도 있다니… 맘에 들어. 그런데 여기서 로맨스가 되나 모르겠네.
헐! 농담하지마. 여긴 살아생전의 세상과 다른 곳이야. 그래도 해아, 네가 나 좋다고 하니 기분은 좋네. 아무튼 나는 왕의 신임을 받으며 잘 나갔어. 왕한테 꼼짝 못했던 대신들은 날 싫어해도 날 무시할 수 없었어. 그런데 위기가 생겼어. 날 그리도 총애하던 왕이 아들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며 상왕으로 지낸 지 1년 만에 51세의 나이로 승하(昇遐)하셨어. 내 나이 29살 때야. 든든한 버팀목이 없어진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질문에 나는 평소에 내 나름대로 깊이 숙고해 오던 게 있기에 그리 당황하지는 않았어. 궁전의 권력세계에 이미 닳고닳은 나는 어떻게 해야 내가 권력세계에서 죽지 않고 살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어. 그 비결은 아주 간단해. 최고권력자로부터 신임과 총애를 받는 것이야. 돌아가신 왕의 아들은 나보다 11살 어렸는데 18세에 왕에 올랐어. 당시에 권력은 돌아가신 왕이 정난(靖難)을 일으켰을 때 공을 세운 훈구(勳舊) 대신들한테 있었어. 어린 왕은 몸도 약했고 아버지와 같은 힘이 없었어. 그래도 나는 그 어린 왕에게도 잘 보이려고 노력했어. 내가 살 길은 바로 그 거밖에 없다고 생각한 거지. 그러다 기회가 왔어. 왕의 신임을 살 만한 절호의 기회!
아무래도 넌 살아남는 생존의 천재다. 대단한 을식이야. 그런데 생존을 위한 방법이 좀 야비할 거 같은 직감이 드네. 왠지… 어머나! 밖이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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