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장편소설】 저곳 - 12. 을식과 해아(1)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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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5 08:33 | 최종 수정 2024.06.05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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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권력세계로 들어선 해아
넌 또 누구야? 이름이 해아네. 내가 여기서 전에 얘기 나누던 여자는 백인이었는데 넌 황인이네. 백인이랑 이야기하려니 좀 어색했는데 나도 황인이니 너랑은 좀 더 편하게 대화할 수 있겠다. 아무리 여기가 저승이라지만 넌 얼굴이 왜 그리 죽상이야. 세상에서 가장 슬픈 불쌍한 여자로 보인다. 뭔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무지하게 안 좋은…
내가 그렇게 안 좋게 보여? 아! 내가 그럴 만도 하지. 나란 년은 정말로 인류 역사상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년일 거야. 그 처참한 말로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도 않아. 그냥 나 좀 여기 조용히 있게 내버려 둬. 제발!
미안해? 내가 괜히 말 건넸구만. 그런데 심심하지 않아. 가만히 있으면 맘이 편안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심란해져. 살아생전의 기억들 때문에. 털어놓고 얘기하는 게 그 기억들을 털어 버리는 방법이기도 해. 뭐 강요하진 않을게. 해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너 참 말도 잘 한다. 털어놓고 얘기하는 게 그 기억들을 털어 버리는 방법이라고? 그럴 듯한 말이네.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어. 좋아. 내가 살아생전에 겪었던 사연들을 이야기하고 싶어졌어.
그래. 바로 그거야. 너 참 말을 잘 알아 듣네. 똑똑해.
맞아. 난 똑똑한 여자였어. 똑똑해서 잘 나가는 여자였지. 나 만큼 똑똑한 여자는 내 살던 시대에 아주 드물었어. 난 그리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어.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는 나 어릴 때 일찍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지. 엄마는 감리교 목사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다 개신교에 입문하여 전도사가 되었어. 엄마가 일하던 교회의 목사님은 내 인생의 첫 걸음을 좋게 놓아주신 은인이셨어. 덕분에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고 나중에 대학교에도 진학할 수 있었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어. 졸업 후에는 교사로도 일했어. 그러다 나한테 엄청난 행운이 와. 미국에서 오신 선교사님의 주선으로 미국에 유학간 거야. 미국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지. 그러는 와중에 우리나라에서 유학온 운명적 남자를 만나게 되었어. 그 남자도 나랑 비슷한 처지였어. 몰락한 왕족 가문 출신이라지만 나처럼 집안은 별 볼일 없었어. 그런데 생존과 신분상승 의지가 있는 사람이었지. 우리는 대학 동아리 연극반 활동을 같이 하면서 같은 연극에 출연하면서 사랑하는 연인 사이가 되었어. 아무튼 우리나라가 아주 가난한 나라일 때, 그리고 우리 집안도 가난한 집안이었는데 고등학교 → 대학교 → 미국 유학을 마친 여자는 아주 희귀한 존재였어. 만(萬)에 하나(一)보다 고귀한 존재였지. 그렇게 귀국하게 되었을 때 나는 이미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에서 평민과는 다른 나름 높은 신분의 사람이었어. 그리고 모교에서 윤리학을 가르쳤어. 또한 기독교청년연합회 총무로 10여년간 근무했어. 계몽적 사회운동을 펼치기도 했지. 이 때 미국 유학에서 만나 사귄 남자와 마침내 결혼을 하고 애를 셋이나 낳았어. 맨 위로 딸 하나, 아들 둘! 그러다 남편이 엄청난 운명의 길을 들어서게 되는데… 부부는 일심동체이기에 그 운명의 길은 곧 내 운명의 길이기도 했어. 남편이 미국에서 독립운동 하는 사람을 만나면서부터야. 우리나라가 식민지배에서 벗어났을 때 그 사람이 우리나라로 귀국할 때 내 남편은 그의 집사가 되었어. 그 직전에 우리 부부는 반찬가게를 하면서 어렵지만 부지런히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렇게 된 거야. 운명적 길이었어. 원래 성품이 자상하며 성실한 사람이었던 남편은 그 일을 아주 잘 했어. 자기가 모시는 분의 맘에 딱 들게 한 거지. 모시는 사람 입 안의 혀처럼 움직였어. 그 분은 결국 대통령이 되었어. 영부인이 미국인이었는데 영어를 잘 하며 말이 잘 통하는 나를 좋아하게 되었지. 이제 나는 영부인을 통해 대통령을 움직일 수 있는 여자가 되었어. 그렇게 하면서 우리 부부는 출세와 명예, 그리고 엄청난 권력의 셰계에 첫 발을 들이게 되었어. 내 남편은 사실 그런 과에 속하는 사람은 아니었어. 몰락한 가난한 집안에서 미국 유학을 갈 정도로 의지는 굳은 사람이었지만 좀 허약한 사람이었어. 바이올린을 잘 연주하는 낭만적인 사람이기도 했어. 서정적이며 감상적인 사람이기도 했지. 수줍음도 많은 사람이었어. 한마디로 센티멘탈리스트였어. 약한 듯 강하며 강한 듯 약한 사람이었어. 부드럽고 자상한 면도 많았어. 오만하지도 않고 서민적인 사람이었어. 남편이 고급 요정에서 일한 적도 있었는데 당시에 이쁘게 생긴 기생들이 남편을 유혹하려고 했는데 남편은 끔쩍도 안했다더군. 그만큼 남편은 여색에도 무심한 남자였어. 그런데 나는 남편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어. 나는 남편마저도 조종하여 내 욕심을 달성하려고 적극 설치며 나대기 시작했지. 내가 마음 먹으면 안되는 게 없었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의 맛을 보기 시작한 거지.
해아가 그런 여자였구먼. 그런데 여기서 죽상으로 있는 걸 보니 뭔가 안될 것같다. 불길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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