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장편소설】 저곳 - 15. 무식과 인정㊤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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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2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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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무식과 인정
넌 또 누구냐? 전에 나랑 어느 방에 같이 있었던 여자는 나 같은 흑인이었는데 넌 얼굴이 허였네. 아주 농염한 여인일세. 내가 살았을 때는 너한테 확 끌리겠는데… 후궁으로 삼고 싶었을 텐데…
난 여기 들어온 지 너보다 오래 돼. 아무리 여기선 선후배가 없다지만 좀 버릇이 없네. 어이가 없어. 나 살았을 때는 너같이 얼굴 검은 애들은 사람 취급을 안 했어. 그냥 노예였는데 어떻게 네가 여기 들어 왔지? 내가 알기론 여기 있는 애들은 살아생전에 다들 엄청난 인간들이라고 들었는데…
나도 엄청났어. 내가 생각해도 난 대단했지. 만행(萬行)이 아니라 만행(蠻行), 기행(奇行)이 아니라 기행(奇行), 학행(學行)이 아니라 학행(虐行)의 대명사가 나야. 물론 내가 살던 땅에 그런 무식한 권력자들이 많았지만 나는 그들 중에서도 가장 무식했어. 내가 했던 말 한 번 들어 볼래. 놀랠 걸, 놀라지마!
"나는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지만 어느 곳에도 없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지만 모든 것 을 본다. 나는 아무것도 듣지 않지만 모든 것을 듣는다.“
저기 동방의 어느 나라에서 승려 출신의 어떤 권력자가 사람들 속마음을 보는 관심법(觀心法)을 한다며 지 맘대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재단하고 그랬다고 들었는데...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치 사람 속을 모르는 인간인 주제에 지가 사람 마음을 어떻게 다 들여다 보겠어. 그냥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이지. 그런데 그게 권력자의 말이니 밑에 사람들은 그 말도 안되는 관심법에 당할까봐 그냥 꿈쩍도 못하는 것이고. 그런데 그 정도는 약과야. 내가 한 말이지만 말은 정말 멋있었어. 그런데 이게 말이 되? 내가 무슨 신도 아니고… 신처럼 군림하려고 그런 말을 지껄였겠지. 난 나를 우상화 신격화 숭배화하는데 신경썼어. 나는 국부, 최고의 인간을 넘어서 신이 되고 싶었던 거야. 그런데 힘이 센 내가 그런 말을 하니까 밑에 사람들은 꿈쩍도 못했어. 강한 자한테 강하고 약한 자한테 약하라고 하는데… 그건 그냥 윤리 교과서에서나 나올 말이야. 사람들은 원래 본성적으로 약한 자한테 강하고 강한 자한테 강해. 나는 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그런 걸 알게 되었어. 내 주변엔 아첨꾼들이 득실댔어. 그래서 더욱 나를 강하게 하려고 했지. 그러려니까 나는 엄청났어. 내가 생각해도 난 대단했지. 만행(萬行)이 아니라 만행(蠻行), 기행(紀行)이 아니라 기행(奇行), 학행(學行)이 아니라 학행(虐行)을 마구 저질렀지. 겁도 없고 법도 없었어.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어. 20세기에 지구상 어느 권력자도 나처럼 한 놈들은 없었어. 난 그런 점에서 짱이야. 내가 저지른 짓들은 찾아보면 다 공개되어 있어. 하도 많아서 자세히 열거하기도 힘들어. 독재자라는 걸로 나를 순진하게 평가할 수 없어. 똑똑한 사람이 독재를 하면 철인(哲人) 정치가 될 수 있지. 그런데 욕심만 많은 사람이 독재를 했으니 난 광인 정치를 한 거야. 미친 놈이 나라를 다스렸던 거지. 게다가 난 물욕도 심했어. 나부터 뇌물을 받았으니 부하 놈들은 오죽했겠어. 부정부패가 판을 쳤지. 경제는 파탄이 나고 나라 꼴이 개판이었어. 그런데도 나는 사치를 즐겼지. 세련된 사치가 아니라 볼꼴 사나운 엽기적 사치였어. 내가 사람을 먹는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래도 그건 아니야. 그건 과장되었어. 내가 살던 궁전에 먹을 게 얼마나 많은데 내가 사람을 먹었겠어. 그건 아니야. 그럼에도 자아도취 나르시시즘에 빠지고 과대망상에 욕심만 많은 내가 독재를 했으니 난 광인 정치를 한 거야. 미친 놈이 나라를 다스린 거야. 내가 나를 미쳤다고 하다니 나도 참!
아무튼 너 미친 놈 맞고, 아주아주 나쁜 놈이었구나. 처음 볼 때 생긴 거부터 욕심많게 생겼구나 했더니 생각보다 심각하네. 그래도 네가 처음에는 선정을 베풀려고 했는데 왜 그렇게 악정을 저지르게 된 거지. 도대채 그 동기가 뭐야? 원래 사람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었던 거야, 아니면 나쁜 사람이 된 거야? 내 질문이 좀 이상하기는 하다고 생각되지만 알고 싶네. 너의 정체를…
내가 욕심이 많은 건 사실이야. 그런데 세상에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있어. 다만 난 욕심이 아주 많았고 또 그 욕심대로 성취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했고 또 그 의지대로 하는 실행력이 무척 능동적인 사람이었지. 그 점이 일반 사람들과 좀 달랐던 거겠지.
조금 다르다니! 아주 매우 무척 다른 거라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 널 너무 과소평가하지마.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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