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물권색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저곳의 다섯 公理공리axiom>
1. 일찍 들어오고 늦게 들어오고 선후배 없이 다 똑같은 동등한 존재다. 존대말 없이 서로 말을 터도 된다.
2. 살아생전에 언제 어디서 살았던 다른 지역에 대해 대충은 안다. 시공간 초월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다.
3. 이승에서의 집착을 다 비워 버려야 하지만 아직 미련이 있다. 물권색 욕망이 강한 인간의 관성 때문이다.
4. 한 방에서 이성끼리 대화하다 방이 바뀌며 이성 상대가 바뀐다. 덕분에 저곳에서의 생기가 은근히 살아난다.
5. 저곳에서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최종 정착지가 정해진다. 그러니 저곳은 중간 경유지가 된다.
31. 갑철과 오미
나 죽고 2500년 가까이 흘렀지만 나 이전에도 나 이후에도 나처럼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다간 남자는 없을 걸. 내 자랑같지만 나는 그야말로 인류사 최고의 풍운아(風雲兒)야. 풍운(風雲)처럼 살다간 인생이었지. 나를 능가할 만한 남자는 아직 여지껏 없어. 앞으로도 없을 거야. 나는 비교불가야. 절대적 지존의 풍운아야. 아테네 사람인 나는 지중해를 누빈 건 물론 저 멀리 동쪽 페르시아까지 다녔지. 타고 다니는 말도 없고 그럴 때 어떻게 그렇게 널리 넓게 멀리 오가며 방방 뜨며 살았는지 몰라. 당대 최고의 미남으로 유명했던 나는 여자를 유혹하는데 있어서도 절대지존이야. 물론 얼굴 만으로 그리 된 건 아니지. 난 당대 최고지성이던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며 당대 최고권력이런 페리클레스의 조카야. 그러니 난 어디서나 당당했지. 말도 잘 하고 자신감이 넘쳤지. 오만할 거만할 교만할 정도로 많이 건방지긴 했어도 그런 건방진 태도가 오히려 여자들한테는 먹히더군. 스파르타로 도망갔을 때는 망명자 주제에 왕의 아내인 왕비까지도 나한테 홀딱 넘어왔어. 왕비와 통정하여 왕비가 임신하자 왕한테 들켜서 페르시아로 도망갔지. 내 인생은 파란만장(波瀾萬丈)했어. 곡절이 많고 시련과 변화가 많았지. 산전수전 공중전 지하전 다 겪으며 살다 46세에 암살 당했어.
듣자하니 갑철이 너 참 대단하구만. 나도 살아생전에 너를 만났다면 너한테 넘어갔을까? 아니야! 난 안그랬을 거같아. 나한테는 진정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으니까. 사람들은 내가 그 남자를 성적으로 하도 못살게 굴어 나랑 성행위를 하다 복상사해서 죽었다느니 어쩌느니 말들이 많은데 정말 인간세상 참 웃겨. 있지도 않은 일이 있었던 사실이 되며 온갖 해괴망측한 헛소문이 떠돌아 다니지. 나는 그래서 일찍 죽었어. 속이 상해 죽은 거야. 홧병으로! 지병이 홧병이었어. 한마디로 난 속상해서 죽은 거야. 그래도 한창 아름다울 33세 때야. 너는 46세에 죽었다지만 나보다는 10년 이상 오래 살았네. 너가 인류사 최대의 풍운아라고 자랑하던데 반면에 그런데 들리는 얘기로는 인류사 최대의 배반자라는 오명도 있던데 사실이야? 그 점에 대해 좀 알기 쉽게 설명해봐. 변명하기보다는 어디 해명해봐. 좀 알아듣기 쉽게.
앗! 너도 아는구나. 나에 대해서 좀… 내가 하도 유명하긴 한가 보네. 네 말대로 변명하진 않겠어. 그냥 내가 인류사 최대의 배반자 소리를 듣게 된 나의 처지를 변명하고 싶어. 사람이란 이기적인 존재야. 가끔 이타적이기도 하지만 그건 특수한 경우야. 그러니 이타적인 일을 하는 게 보기 드물기에 이타적 행위를 하면 사람들한테 미담으로 소문 나기도 하지. 하지만 이기적인 일을 하는 것은 그냥 일반적인 거야. 이기적인 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힘들어. 나는 그냥 이기적으로 행동했을 뿐이야. 권력이나 명예를 차지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단지 나의 생존을 위해 나는 이기적으로 행동했던 거야. 당시 정권을 잡은 권력자들이 눈부릅뜨고 어떻게든 나를 못잡아 죽이려고 하는데 내가 내 나라를 버리고 도망갈 수 밖에 없었지. 나는 나의 조국을 배반했다기보다 나의 조국을 떠나 망명할 수 밖에 없었어. 누구라도 내 처지가 되면 나처럼 할 걸. 배반이고 뭐고 떠나서. 그런데 나보고 최고의 배반자니 어쩌니 떠드는데 내가 듣기엔 참 가소로워. 지네들이 나라를 망쳐놓고 다 그 책임을 나한테 따돌리기 위해 나는 엄청난 배반자가 된 거지. 나 살아생전에 플라톤이라는 똑똑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나보다 스무살 정도 어려도 플라톤이 나를 좀 알지. 나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어. 거기서 플라톤은 나보고 배신자니 뭐니 한 적이 한 번도 없어. 내가 배신자가 된 건 나 죽고나서 내 조국 아테네가 멸망한 원인을 나한테 돌리려고 지어낸 말들이야. 가증스러운 놈들!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가 되네. 내가 여왕 때 아래 신하 놈들도 다 가증스러웠어. 내 앞에선 고분고분한 척했지만 은근히 날 여자라고 깔보는 듯했어. 지네들 권력을 좀 줄이려고 하면 아주 벌떼들처럼 나한테 달려들며 나를 겁박하듯이 했지. 대책없는 놈들이었어. 그래도 딱 한 명의 신하가 괜찮았지. 경주 최씨인 그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는 호를 가진 남자 신하야. 나보다 여덟 살 정도 많은 그는 저 멀리 당나라에서 유학하며 과거에 급제하며 거기서도 똑똑하기로 소문한 사람이었어. 황제도 그의 영특함을 인정했다지. 천재적 끼가 넘치는 사람이었어. 그러다 조국의 안녕을 위하여 17년 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였어. 그 때 우리나라는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나 혼란했어. 도적떼들도 활개를 쳤지. 이러다가 나라가 망할지 모른다는 음습한 기운이 피어났지. 그래서 나는 그에게 적당한 벼슬을 주며 그와 국사를 자주 논했어. 정말로 그가 하자는 대로 하면 나라가 잘 돌아갈 거같았어. 그가 나한테 올린 제안이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야. 우리나라의 사회개혁안이었지. 그 10가지 정확한 내용은 유실되었어. 그래도 핵심내용이 무엇인지는 내가 기억하지. 그는 당나라 유학파이기에 당나라에서 배우고 접한 유교를 우리나라에 펼치고자 했어. 유교적 정치이념을 구현하여 군자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했어. 이를 위해 유학적 소양을 가진 6두품 유학 지식인을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 왕실의 안정과 국가의 안보를 위해 부정부패 척결 및 반국가 세력에 대한 철저한 응징 방안도 담겨 있었지.
내가 자세한 내막을 잘 모르겠으나 그런 게 어디 먹히기나 하겠어. 오미, 너도 참 순진했네. 그런 새로운 개혁안은 최고권력자의 힘이 막강했을 때나 실행될 수 있는 거야. 너한테 덤비는 신하 놈들이 많았는데 그게 되겠어. 어림도 없어. 그런 건 무조건 되지 못해. 이후 너의 앞날이 보인다. 가엽네, 오미 너! 어쩌냐.
맞아. 이게 공표되자 저 드센 신하 놈들은 입에 거품을 물며 반대했어. 여왕이었지만 나는 꼼짝도 못했어. 이걸 올린 그 똑똑한 사람도 아무런 정치적 힘이 없었어. 그가 공격받자 나는 그를 지방 외직 태수로 보냈지. 그러더니 그냥 사라져 버렸어. 그리고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며 나중엔 신선이 되었다는데… 내 입장에서는 무책임한 사람이었어. 그럴 듯한 개혁안을 나한테 올리며 나의 신뢰와 환심을 사더니 그 개혁안이 기득권 세력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자마자 그냥 수그러 들었어. 나중에 상황이 좋아지면 내 가까이 들이려 했는데 돌연 잠수를 탄 거야. 참 똑똑하기에 그를 믿었던 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버린 거고. 이후 우울증까지 겹친 나의 홧병은 심해졌어. 특히 내가 남편처럼 대하던 삼촌마저 4년 전에 저 세상으로 가버렸으니 나는 기댈 데가 없었어. 외로웠지. 내 나이 29세 때야. 사실 나는 남편이 급사하자 우울증과 외로움으로 후궁 어린 남자들을 가까이 했는데 그게 또 나에 대한 공격의 빌미가 되었어. 벼라별 해괴한 소문들이 생기며 나를 음해하더군. 그래서 요즘 사람들마저 내가 음란한 여자이며 우리나라가 멸망하는데 결정적으로 크게 한몫한 여왕으로 낙인찍혔지.
뭐라고! 후궁 남자! 후궁은 여자인데 오미 네가 여왕이었으니 후궁 남자를 두는 게 맞네. 그런데 좀 어색하다. 후궁이 남자라니!
내 말 중에 후궁이란 말이 딱 갑철 네 귀에 꽃히나 보네. 사람들이란 참 그런 거에 민감해. 어쩌겠어. 나는 드센 신하 놈들의 등쌀에 못이겨 10년 여왕질을 마치며 스스로 하야했어. 왕위를 내 선대 왕이었던 큰 오빠의 아들한테 넘겼지.
권력에 찌든 드센 귀족들의 등쌀과 음해로 외롭게 고립되어 우울증에 걸려 젊은 나이에 죽은 순진한 여왕
여왕 권력을 스스로 넘겼다고 조카한테? 귀족들 등쌀에 밀려 물려 억지로 내려온 게 아니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권력을 넘기며 내려왔어. 권력이란 게 한 번 잡으면 스스로 내려오기가 쉽진 않은 거지만 난 그래도 스스로 내려왔어. 진골 귀족인 신하들한테 하도 진절머리가 나기도 했지만 내 몸과 맘, 그러니까 뫔의 상태가 여왕을 하기에는 너무 약해졌어. 덩치만 컸어. 그래서 스스로 권력을 넘겼던 거야. 그래도 그게 내가 한 일들 중에 가장 잘 한 거야. 56명의 왕으로 이어진 천년왕국 우리나라 역사에서 그렇게 권력을 스스로 넘기며 하야한 건 오로지 나 하나 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자진퇴위 권력이양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쓴 거지. 물론 그럴 수 밖에 없었긴 해도.
여왕으로서 권력이 약했다고 하지만 10년이나 지녀온 여왕 권력을 내어놓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오미, 네가 순수한 건지 순진한 건지 순박한 건지 몰라도 네가 순둥이 여왕인 건 맞겠네. 권력을 그리 스스로 내놓다니? 절대적 권력자들인 왕이나 황제의 세계에서 흔치 않은 일인데... 아무리 상황이 열악하다고 해도...
내가 그래도 썩은 권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나한테 최소한의 현명함이 있어서야. 내가 누구야? 우리 아버지는 대단한 분이셨지. 우리나라에선 예로부터 똑똑한 귀족 젊은 남자들은 거의 다 화랑이 되었는데 울 아버지는 화랑들 중에서도 최고 뛰어난 으뜸이셨지. 그 덕에 왕의 눈에 들어 왕의 사위가 되고 왕이 돌아가시자 왕이 될 신분은 아니었지만 곧바로 왕이 되셨지. 그런데 아버지는 귀가 크셨어. 귀 말단비대증에 걸리셨는지는 몰라도 귀가 자라서 감당할 수 없으셨지. 커지는 귀를 두건같은 걸로 가리셨지. 그래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우스개 소리에 등장하는 왕이셔. 동화같은 그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좀 멍청한 왕처럼 보여도 절대로 그렇지 않았어. 아버지는 백성들 삶을 안정시키는 통치에 능하셨어. 현명한 왕이셨지. 울 아버지가 왕이셨을 때는 우리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때였어. 장남이었던 울 첫째 오빠가 왕이었을 때도 역병이 돌기는 했어도 괜찮았어. 차남이었던 울 둘째 오빠가 왕이었을 때도 반란을 제압하고 그런 대로 문제가 없었지. 그런데 아버지와 두 오빠를 이어 내가 왕이 된 후부터 혼란해졌지. 여자가 왕이라서 저 드센 남자 돔들이 날 가볍게 우습게 깔본 이유도 한몫 작용했을 거야. 모르긴 몰라도. 견훤이라는 자가 왕이라고 칭하며 설치기 시작했자. 사실 나는 왕이 되지 말았어야 했어. 둘째 오빠가 나한테 왕위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했어도 난 거부해야 했지. 그 거부가 가능했었는지는 잘 몰라도. 아무튼 난 왕이 되면서 점점 불행해졌어. 10년 여왕하고 내 자식이 없었기에 큰 오빠의 아들일 법한 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여왕자리 내려온 후부터 병치례에 시달렸어. 그러다 1년도 못되서 나는 죽고 말아. 내 나이 33세 때야. 아무리 여왕이었으면 뭘해. 다 소용없어. 평범한 아낙으로 맘편하게 속편하게 사는 게 훨씬 좋지. 그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정말 그래. 나 죽고 나선 눈이 하나 없는 궁예라는 자가 자기 스스로 미륵이니 뭐니 관심법이니 뭐니 하면서 설치더니 나중에 왕건이라는 자가 떠오르기 시작했어. 그렇게 나 죽고 나서 40여년 동안 5명의 허울 뿐인 왕들이 있었지만 끝내 천년왕국이었던 우리나라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어. 박씨와 석씨와 김씨의 왕국은 멸망하고 왕씨의 왕국이 세워진 거지. 왕씨의 왕국을 세운 왕건이란 자는 나보다 열두 살 어리지만 나랑 같은 세대 사람이야. 내가 여왕이었을 때 나는 나한테 인사하러 온 그의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어. 그 때 아버지를 따라 온 열 살 꼬마가 왕이 되었지. 난 일찍 죽었지만 할 얘기가 너무나도 많아. 그런데 여기 밖애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거야. 갑철아. 좀 알아봐.
<전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