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림트는 48세에 「죽음과 삶」을 그렸다. 삶의 시간이 8년밖에 남지 않았으니, 죽음의 흐릿한 윤곽이 짚이기 시작했을 법도 한 일이다. 금채로 화려하게 장식하던 그의 황홀한 ‘황금 시기’가 저물 즈음이다. 파스텔 색상으로 채색된 삶의 주변을 어두운 죽음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삶도 죽음도 모종의 흐름 속에 있어서 천천히 꿈틀거리는 듯하다. 해골 모습의 죽음은 공동묘지의 수많은 십자형 묘비들 위로 뭉실뭉실 피어오른다. 모든 것이 예외 없이 돌아가야 하는 죽음은 다수로 된 하나이지만 삶은 하나 속의 다수이다. 갓난아기로부터 할머니까지 다양한 세대가 얽혀서 삶은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삶의 구역 왼쪽 한 소녀만이 눈을 뜨고 있을 뿐, 모두가 눈을 감고 잠들어 있다. 삶이 한 편의 꿈임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소녀는?
과거에 매번 낙방한 선비 노생은 고향 한단에서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해서 입에 풀칠을 하였다. 그날도 사냥을 갔다가 주막집에 들러 기장밥을 시켰다. 옆 자리에 한 노인(여옹)이 있어 노인에게 신세 한탄을 하는데 졸음이 밀려왔다. 여옹이 자루에서 청자 베개를 하나 꺼내주었다. 노생이 잠시 베개를 베고 눕자 몸이 청자 베개의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 어느 집에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리고 입신양명과 몰락이 교체되는 파란만장한 80년의 삶을 살다가 문득 눈을 떠보니 그 주막집이었다. 시켜놓은 기장밥은 아직 익지도 않았다. 당나라 때 심제기가 쓴 『침중기』의 이야기다.
산다는 것은 꿈꾸는 일인가? 문득 삶이 한바탕 꿈이란 걸 알고 눈을 뜨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죽음과 삶」에서 홀로 눈을 뜬 소녀는 죽음을 본다. 그녀는 가슴에 두 손을 올리고 자신을 진정시키려는 것 같다. 삶이라는 꿈에서 깨어나 죽음과 마주친 이 소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죽음을 자각함으로써만이 자신의 실존적인 가능성 앞에 서게 된다며 하이데거처럼 실존적 포즈로 구라를 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지금은 그저 죽음의 갈퀴 같은 촉수가 부디 그녀에게로 뻗지 않기를. 차라리 좀 더 꿈꾸기를.
「죽음과 삶」에서 삶의 영역은 마치 하나의 꿈-인큐베이터인 것 같다. 사람들은 거기에 함께 접속해 있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의 꿈을 다수가 공유하는 경우에 대해서 잠시 언급한 적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것도 하나의 꿈에 다수가 함께 접속하여 만든 환영인 것일까? 우리는 모두 꿈이라는 시뮬레이션 속의 프로그램들일까? 그러나 이 골 때리는 문제는 고난이도 미로라서 한 번 들어가면 다시 헤어나기 힘들다. 들어가고자 한다면 아예 끝장 볼 작정을 해야 한다. 아직은 아니다. 다시 삶과 죽음 사이를 떠도는 꿈으로 돌아가자.
꿈이 삶이고, 깨어남이 죽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죽음은 두렵다. 죽음의 구속을 넘어선 자유야말로 인류의 오래된 꿈이 아니던가. 이 지독한 꿈, 불사(不死)의 존재에 대한 꿈은 모든 종교와 신화의 핵심 주제이다. 명나라 화가 당인(唐寅, 1470-1523)의 작품 「몽선초당도(夢仙草堂圖)」는 불사의 존재에 대한 꿈을 그렸다. 당인은 남송 시대 마원이 창안한 일각(一角)구도를 계승하여 가시적 풍경을 한쪽 모서리에 그리고 나머지에는 비가시적인 실루엣, 혹은 여백을 배치하였다. 유(有)와 무(無)의 극적인 대비이다. 유의 영역에 소나무와 초당이 있고, 그 안에 한 선비가 잠들어 있다. 그는 초당 밖의 풍경을 보며 몽상에 잠기다가 잠이 든 것이리라. 몽상은 잠 속으로 스며들어 꿈이 된다. 누군가 허공답보 신공을 시전하며 비가시적인 무의 영역으로 날아오른다. 아득히 허공을 날고 있는 그는 불사의 존재, 신선이다. 그런데 무의 영역에서 날고 있는 신선과 유의 영역에서 꿈꾸는 자는 둘이 아니다. 날아가는 신선이 고개들 돌려 꿈꾸는 자를 돌아보고 있지 않은가. 시선은 보이지 않는 끈이 되어 둘을 이어놓는다. 신선은 꿈꾸는 자의 꿈의 환영(幻影)인 것이다. 혹 그 반대일지도…
신선의 꿈은 날개의 꿈이요, 비행의 욕망이다. 소동파도 그의 황홀한 노래, 〈적벽부(赤壁賦)〉에서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날아오른다(羽化而登仙)”라고 하지 않던가. 모든 경계선은 늘 벼랑이다. 비행은 그 단절의 벼랑을 넘어선다. 17세기 명말청초의 혼란기를 살아간 화가 매청(梅淸, 1623-1697)이 그린 「황산천도봉도(黃山天都峯圖)」, 저 까마득한 벼랑을 보라. 시대와 불화하여 떠돌던 매청은 황산을 만나면서 비로소 화가가 된다. 그는 미친 듯이 황산을 그리고 또 그렸다. 하늘(신선)나라 도읍지란 뜻을 가진 천도봉은 황산의 주봉이다. 허공의 제화시가 천도봉 천길 벼랑의 비밀을 말해준다.
十年幽梦繫軒轅 십년 꿈이 헌원을 붙잡아
身歷層巖始識尊 몸소 층암 속에 지내니 비로소 존엄함을 알아서
天上雲都供吐納 하늘의 구름이 모두 토납(호흡)을 베풀고
江南山盡列兒孫 강남의 산들이 다 자손으로 열을 지었다.
峯抽千仞全無土 봉우리는 천 길을 솟아 흙이 하나도 없는데
路入重霄獨有猿 길은 겹겹의 하늘로 들어가 오직 원숭이만 있나니
誰道丹臺靈火息 누가 연단대의 신령한 불이 꺼졌다고 말하는가?
朱砂泉水至今溫 주사와 샘물이 지금까지도 따뜻하나니.
‘헌원’은 중국의 전설적 제왕 황제(黃帝)의 이름이다. 황제는 만년에 신선술에 빠졌다. 갈홍이 쓴 『신선전』에는 공동산의 광성자를 찾아가 불사의 도를 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양반 어지간히도 오래 살고 싶었던 모양이다. 도처에 신선 관련 전설을 남기고 있으니 말이다. 이 그림은 황제의 그 꿈을 그린 풍경이다. 그것은 화가 매청의 꿈이기도 했으리라. 비행의 욕망은 아찔한 수직 구도 속에 봉우리와 벼랑들이 격렬하게 솟아오르는 느낌을 주는 사선의 반복적 동세로 표현되었다. 화가는 하늘 끝까지 솟아오른 천도봉 아래 연단대가 있는 연단봉을 그려 넣었다. 황제가 불사약을 제조했던 곳, '십년 꿈'이 서린 곳이다.
연단대와 천도봉 사이에 놓인 까마득한 단절은 인간과 신선 사이에 놓인 절망적인 단절의 거리이다. 그러나 십년 꿈이 만들어 낼 불가사의한 비행의 높이이기도 하다. 우연이었을까? 화가의 꿈은 천도봉의 꼭대기를 날개의 형상으로 펼치고 있다. 아니 저것은 날개 가운데 가장 가벼운 날개, 하늘을 하늘거리며 나는 나비가 아닌가? 가장 무거운 암괴가 가장 가벼운 나비가 되는 이 놀라운 연금술적 변형을 보라. 날개와 비행의 꿈은 클림트가 그어놓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게 할 수 있을까? 신선의 꿈은 흥미로운 구라지만 왠지 안쓰럽다. 그 불가능에 대한 집요한 열망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불사에 관한 원형적인 두 신화가 있다. 인류 최초의 신화라고 하는 슈메르 신화 속의 길가메시와 중국 신화의 예(羿) 이야기다. 이 두 남자 영웅은 모두 천신만고 끝에 불사약을 구하게 된다. 그런데 바다 끝에서 불사초를 구해 뭍으로 올라온 길가메시가 피곤하여 깜박 조는 사이 뱀이 불사초를 물고 가버린다. 곤륜산의 서왕모와 담판을 지어 불사약을 구한 예도 마찬가지다. 길일을 택해 복용하고 승천하고자 했는데 아내 항하가 몰래 혼자만 먹고 달나라로 가버린다. 두 신화의 결말의 유사성은 의미심장하다. 영웅이 불사약을 얻은 순간, 뱀과 아내가 빼앗아 가버린다. 그리하여 길가메시와 예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고, 뱀과 항아(달)는 불멸을 얻는다. 그러나 뱀과 항아(달)가 획득한 불멸의 형태는 길가메시나 예가 추구한, 한 개체의 지속성을 추구하는 불사가 아니었다. 달은 찼다가 기울기를 반복한다. 뱀 역시 허물을 벗으면서 죽었다가 재생한다고 옛사람들은 믿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죽음과 재생을 반복하는 불멸이다. 개체의 이기적인 불사가 아니라, 개체의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이어지는 생명과 생명의 우주적 리듬이다. 신화는 안타깝지만 불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죽음과 삶」 속에서 꿈으로부터 깨어난 소녀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삶일까, 죽음일까, 불사일까? 혹시 깨어나서 보고 있는 것이 오히려 꿈이라고 생각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이제 미로의 입구에 섰다.
◇미학자 이성희는
▷1989년 《문예중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부산대(철학과 졸업)에서 노자·장자 연구로 석·박사 학위
▷시집 《겨울 산야에서 올리는 기도》 등
▷미학·미술 서적 『무의 미학』 『빈 중심의 아름다움-장자의 심미적 실재관』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 등
▷현재 인문고전마을 「시루」에서 시민 대상 장자와 미술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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