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트하우스(waterhouse, 1849~1917)! 참으로 묘한 이름이다. ‘물의 집’이라니. 이 로마 출생의 영국 화가는 이름처럼 평생 물과 그리고 여인을 그렸다. 물은 근원적으로 여성성이다. 독일의 낭만주의 작가 노발리스는 『푸른 꽃』에서 동굴 속 못물에 매혹적인 소녀들이 녹아 있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을 술회한 적이 있다. 워터하우스가 그린 <샬롯의 아가씨>에서 그녀는 저 운명의 물 위에 있다. 거울의 감옥을 깨뜨려버린 우리의 샬롯의 아가씨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샬롯의 아가씨는 거울상이 아니라 실제의 랜슬롯을 찾아 나선다. 그녀는 어둠의 저주와 맞서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탑에서 내려와 카멜롯으로 흘러가는 강에 이른다. 빈 배를 발견한 그녀는 뱃머리에 ‘샬롯의 아가씨’라고 적는다. 거울 세계에 살던 그녀는 현실 세계에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를 새긴 것이다. 그리고 랜슬롯이 있는 카멜롯으로 향한다.
워터하우스의 그림 속에서 그녀는 눈부신 흰옷을 입고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불길한 운명과 맞서려 하고 있다. 그녀의 오른손이 배를 묶고 있는 사슬을 막 들어내고 있지 않은가. 이 사슬은 그녀를 거울 세계에 묶었던 사슬이기도 하다. 배에 깐 아름다운 직물은 아마 그녀가 탑의 꼭대기에서 하염없이 짜던 것이리라. 거기에는 말을 탄 기사들과 성에 갇혀 있는 여인이 새겨져 있다. 자신에게 내린 저주를 말이다. 뱃머리에 매달린 붉은 불꽃의 등잔이 기울어지고 그녀의 운명처럼 세 개의 촛불 중 두 개는 벌써 꺼졌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그녀의 등을 떠민다. 그녀의 붉은 머리가 조금씩 날린다. 음산한 죽음의 냄새가 배여 있는, 그러나 잃어버렸던 삶을 향해 부는 바람. 곧 어둠이 오리라. 윌리엄 홀먼 헌트의 <샬롯의 아가씨>에서 그녀의 가상(거울) 세계를 침범하는 실재 세계의 전령 같은 비둘기(3회 그림에서 한번 찾아보세요!)들이 지금은 물총새가 되어 선미에서 그녀를 전송한다. 가상을 떠나 실재로 향하는 그녀의 오디세이가 시작되는 것이다. 테니슨은 이렇게 읊는다.
좌우로 느슨하게 나부끼는
눈처럼 흰 옷을 입고 누워
나뭇잎들이 그녀 위에 가볍게 내려앉았고
밤의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카멜롯으로 흘러갔다.
뱃머리가 흔들리면서
버드나무와 언덕들 사이로 구불구불 돌고
그들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샬롯의 아가씨의.
샬롯의 아가씨는 배가 랜슬롯의 곁에 도달하기 전에 영원히 잠들고 만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지만 진짜의 삶을 노래하고 살았다. 샬롯 아가씨의 노래와 배는 멈추지 않고 우리 상상계를 떠돈다. 그리하여 어디에 이를 것인가?
지중해 가운데 전설의 섬, 아이아이에(이 얼마나 부드러운 물결 같은 모음들인가)가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샬롯의 아가씨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한 여인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키르케이다. 워터하우스가 그린. <오디세우스에게 잔을 건네는 키르케>을 보라. 여기에서 워터하우스는 우리에게 다른 거울을 보여준다.
키르케는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딸이다. 그녀는 눈부신 미모를 지녔지만 인간을 동물로 바꾸는 마법을 부리는 심술궂은 마녀다.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이 이 섬에 들어섰다가 키르케가 준 마법의 술을 마시고 모두 돼지로 변해 버린다. 그림은 오디세우스가 부하들을 구하기 위해 키르케를 만나러 온 장면이다. 속이 비치는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오디세우스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마법의 술을 권하는 치명적인 매력의 여인, 그런데 워터하우스는 그녀의 뒤에 원형의 거울을 배치함으로써 키르케에 못지않은 마법을 부린다. 거울 이미지의 마법이다.
키르케의 거울은 두 가지 마법을 행한다. 우선 거울은 여자의 존재를 확장시킨다. 거울의 반영을 통해 그녀는 네 개의 팔을 가진 위력적인 여신이 된다. 더구나 거울이 마치 여신의 후광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 후광의 기운에 의해 그녀의 머리카락은 옆으로 뻗쳐오르고 있다. 둘째, 거울은 외부의 정보를 비춘다. 그녀의 신전 앞에 배가 정박해 있다. 그리고 그 배를 타고 왔을 오디세우스가 보인다. 말하자면 거울은 그녀의 눈이요 시선이다. 거울은 남자의 시선이며 여자는 그 시선에 보여지는 타자라는 도식은 여기서 전복된다. 3회에서 보았던 헤르만 알베르트의 <거울을 든 남자>와 비교해 보면, 남자-거울-여자의 구도가 거울-여자(-남자)로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여자는 시선의 주체이다. 오히려 남자는 (화면에) 부재하며 오직 키르케의 시선에 의해 포착된 거울상으로만 존재한다. 두려움으로 움츠린 채 말이다. 그녀의 살짝 벌어진 입술은 막 뭔가를 말하려는 듯이 보인다. 혹시 이렇게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너희들은 누구냐? 너희들의 정체는 욕망의 노예, 돼지가 아니더냐!”라고 말이다. 마침 그녀의 발 옆에는 돼지로 변한 남자가 보인다.
2009년, 미국의 부동자 중개업자인 말루프는 자신의 블로그 토론방에 몇 장의 사진을 올리고 “이 사진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물었다. 여기에 폭발적인 댓글이 달리면서 철저히 익명의 삶을 살았던 한 여성이, 그리고 그녀의 시선에 포착된 이미지의 세계가 극적으로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1926년 뉴욕 브롱크스에서 태어난 비비안 마이어는 보모, 관리인, 가정부 일을 하면서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2천 장의 인화된 사진과 1천여 통의 필름을 남기고 조용히 혼자 이 세상의 여행을 마쳤다. 그러나 이것을 구입한 부동산 중개업자에 의해 그녀는 세상의 떠들썩한 스캔들이 된다. 유행에 뒤처진 긴 치마와 모자, 소매가 부푼 블라우스를 입고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를 맨 여인은 뉴욕과 시카고의 구석구석을 파인더에 담았을 뿐만 아니라 거울, 상점 유리창, 자동차 크롬 도금 표면 등에 반영된 순간의 자신을 향해 집요하게 셔터를 눌러 댔다.
여기에 있는 사진은 한 공원 설치물의 볼록거울 같은 표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찍은 것이다. 그림자와 거울상의 기묘한 조합이다. 익명의 삶과 같은 그림자와 자신을 응시하며 자신의 정체를 찾는 거울상, 어느 것이 실재이고 어느 것이 가상인가? 그 둘은 하나의 이미지 속에 분리되면서 결합된다. 거울을 통해 자신을 찍은 그녀의 사진들은 익명의 삶을 견디면서 세상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한 여인의 조용하면서도 치열한 오디세이다. 비비안 마이어의 카메라는 키르케의 거울이며, 샬롯 아가씨의 배와 다르지 않다.
샬롯 아가씨의 배는 키르케의 섬에 이르러 거울 시선의 전복을 꿈꾸고 비비안 마이어의 거울 속에서 끊임없이 진정한 자신을 찾아 나선다. 남자들의 영웅적 오디세이와는 다른 내밀한 내면의 여행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들만의 여행이 아니다. 거울 앞에 서면 누구나 그 끝없는 여정의 나그네가 된다. 우리는 실상 모두 샬롯의 아가씨다. 거울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누구냐?”
◇미학자 이성희는
▷1989년 《문예중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부산대(철학과 졸업)에서 노자 연구로 석사, 장자 연구로 박사 학위
▷시집 《겨울 산야에서 올리는 기도》 등
▷미학·미술 서적 『무의 미학』 『빈 중심의 아름다움-장자의 심미적 실재관』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 등
▷현재 인문고전마을 「시루」에서 시민 대상 장자와 미술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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