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의 중국, 부유한 지주의 아들 푸구이―한자로 ‘복귀(福貴)’이니 이 얼마나 좋은 이름인가―는 도박으로 가산을 몽땅 탕진하고 ‘복’과 ‘귀’를 날려 버린다. 빈털터리가 된 그는 때때로 도박장에서 보곤 하던 그림자극의 도구를 얻게 되어 그것을 공연하며 겨우 연명해 가는데… 마침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참혹한 내전이 시작된다. 푸구이는 포연이 자욱한 전선으로 끌려 다니며 국민당 군인을 위해 그림자극을 공연한다. 어느 날, 겨울 혹한의 참호에서 깨어나 보니 아득히 눈 덮인 들판 위에는 국민당 군 시체들로 가득한 것이 아닌가. 잠시 후, 하얀 적막의 끝에서부터 새까맣게 공산당 군이 몰려온다. 공산당의 포로가 된 푸구이 일행은 다시 그들을 위해 그림자극을 공연하며 삶을 이어간다. 그 사이, 푸구이의 재산을 가로챘던 도박꾼은 공산당의 점령 하에 악질지주로 몰려 처형당한다. 세상만사 새옹지마던가. 장예모 감독의 영화 「인생(원제는 活着)」의 이야기다. 푸구이의 그림자극은 화와 복이 굽이치며 변전하는 인생이 하나의 그림자 극장이며, 그림자놀이임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전통 놀이인 그림자극을 중국에서는 ‘피영희(皮影戱)’라 부른다. 가죽(스크린)에 그림자를 비추는 놀이라는 뜻인데 그 연원은 사뭇 오래됐다. 기원전 140년 경 한나라 무제가 죽은 후궁 이씨를 잊지 못하여서 이씨 부인과 닮은 사람을 스크린 뒤에 두고 빛을 이용한 그림자극을 연출하여 그리움을 달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등영희(燈影戱; 등불 그림자놀이)’라 하였다. 그림자는 후궁 이씨를 감추면서 드러낸다. 후궁 이씨는 거기 없으면서 있다. 그림자는 감춤과 드러남, 현전과 부재의 사이에서 일렁거린다. 바로 그 ‘사이’가 그림자가 서식하는 영토이다. 단테는 지옥을 떠나 연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한 지인과 만나 세 번이나 껴안으려 했으나 그때마다 손이 허공을 갈랐다. 그 지인은 그림자였던 것이다.
아, 겉모습 말고는 공허한 영혼들이여,
그를 세 번이나 껴안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손은 내 가슴으로 되돌아왔다.
(『신곡』 연옥편 2곡)
그림자는 이곳(지옥)도 저곳(천국)도 아닌 연옥과 같이, ‘사이’를 떠도는 존재다. 보이지만 껴안을 수 없는 그림자는 있으면서도 없으며, 실재이면서도 환영(幻影)인 기이한 지대를 어슬렁거린다. 기실 그 기이한 지대가 또한 이미지의 영토가 아닐는지?
유대계 프랑스 작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Christian Boltanski; 1944∼ )의 설치미술 「그림자 극장」에 입장하는 것은 바로 이 기이한 지대로 들어서는 일이다. 볼탕스키는 인형들을 금속 구조물 위에 고정시키고 4개의 조명을 비추어 벽에 그림자를 투영시킨다. 그리고 송풍기를 설치하여 그림자들을 움직이게 한다. 인형의 형상은 단순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그 그림자는 음산하고 기괴하다. 이 일렁거리는 기괴한 그림자들의 춤에서 어떤 사람들은 홀로코스트의 어둠을 읽어내고, 어떤 사람들은 생(生)을 유희하는 ‘죽음의 충동’(thanatos)을, 혹은 ‘죽음의 춤’(dance macabre)을 읽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심오한 듯 수다를 떠는 해석들을 따라가기보다 이러한 곳이 그림자 극장임을, 그리고 우리가 문득 그림자 극장에 입장해 있음을 환기해 두는 정도가 유익할 듯하다. 자, 당신은 이제 실재와 환영 사이를 배회하는 기이한 지대에 들어섰습니다. 길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시압!
그림자 극장의 스크린을 스쳐가는 수많은 이야기들 몇 가지를 살짝 훔쳐보자. 일본 간토 지방의 설화에 ‘그림자를 잡아가는 못(影取の池)’의 전설이 있다. 자식이 살해된 것에 원망을 품은 여인이 못에 투신하여 원귀가 되었는데, 이후 지나는 사람의 그림자가 못에 비치기만 하면 잡아 죽였다고 한다. 다른 버전으로는 이 연못에 거대한 뱀이 못에 비치는 그림자를 먹고 주린 배를 채운다고도 한다. 아, 그림자를 먹힌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스페인의 작가 호세 미야스(Juan José Millás)의 소설 『그림자를 훔친 남자』(원제 『라우라와 훌리오 Lauray Julio』)에는 훌리오가 아만다의 어린 딸 훌리아에게 들려주는 그림자 나라에 대한 짧은 동화가 몇 편 나온다. 그 가운데 ‘그림자 세탁소’ 이야기가 경이롭다. 옷처럼 자신의 그림자를 세탁소에 맡기는 나라의 이야기다. 그림자 세탁소에서 일하는 소년은 맡겨 놓은 채 오래도록 찾아가지 않는 그림자들을 모아놓은 창고에 우연히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서 소년은 한 소녀의 그림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림자의 주인이 궁금해진 소년은 등록된 주소로 찾아간다. 그런데 소녀는 이미 병에 걸려 죽었다는 것이 아닌가. 소름, 섬뜩하지 않은가? 소년은 무덤에 함께 묻어줄 생각으로 소녀의 그림자를 데리고 묘지로 향한다. 묘지가 가까워지자 소년의 그림자와 소녀의 그림자가 서로 포옹을 하고 열렬히 키스를 나누며 점차 하나로 합쳐진다. 그림자 극장에서 상영될 만한 놀라운 판타지다. 몸에 붙어있어야 할 그림자가 독자적인 생명체인 양 스스로 움직일 뿐만 아니라 몸보다 더 깊이, 더 격렬하게 정서적 반응을 한다.
그림자는 몸에 종속되어 있지만 거울상보다 훨씬 쉽게 변형되고 왜곡된다. 우리는 이미 볼탕스키의 극장에 입장해 보지 않았던가. 그림자는 광원의 크기, 거리, 각도에 따라 다양하게 변전한다. 그림자란 놈은 자칫 한 눈이라도 팔라치면 어느 순간 몸을 떠나 스스로 이미지를 생성하려고 음모하는 것만 같다. 그것은 ‘나’이면서 또한 ‘타자’이다. 이미지의 세계에서 그림자는 내 속에 있는,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면서 나를 벗어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타자이다. 당신은 어느 허전하고 적막한 오후, 길모퉁이를 무심코 돌아서다가 자신의 그림자에 흠칫 놀란 적이 없었는가? 나와 닿아 있는 이 이상한 낯섦! 앤디 워홀의 석판화 「그림자」(1981)는 이 이상한 이미지의 놀이를 잘 보여준다. 「그림자」는 거울을 보고 그린 자화상이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는 거울상으로서의 자화상은 화면의 오른쪽 1/3지점에 물러나 있고,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어둡고 낯선 그림자이다. 거울상은 자화상을 그리는 자신을 보고 있지만 그림자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한다. 그림자는 다른 곳을 보고 있으며 다른 작업에 골몰하고 있다. 이것은 내 속에 있는 서늘한 타자, 분열의 체험이다. 분열은 더 많은 연쇄적 분열을 품는다. 「그림자」를 자세히 보면 그림자 끝에 옅은 그림자가 겹으로 어리고 있다. 저 옛적에 장자(莊子)는 이미 그림자[景]와 그림자의 그림자[罔兩]를 나누어서 자신의 무대에 등장시킨 적이 있다.
우리는 그림자 극장에 들어섰다. ‘영(景)’과 ‘망량(罔兩)’ 같은, 그림자가 만드는 분열의 겹들은 그림자에 의해 환기되는 무수한 비유와 삶에 관한 오래되고 비밀스런 통찰과 음험한 질문들의 겹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동굴의 우화에서 그림자를 통해 우리 세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칼 융은 우리 속에 있는 검은 그림자의 비밀을 훔쳐보았다. 폴리니우스는 왜 회화의 기원을 그림자에서 찾았으며, 서양의 회화에서 그림자는 언제 어떻게 등장하고, 동아시아 전통 그림에는 왜 그림자가 없는가? 등등, 많은 의미와 질문들이 내부가 보이지 않는 그림자 속에 등나무 줄기처럼 얽혀 있다. 자, 이 저녁 어스름 같은 이미지의 지대 속으로 떠나보자.
◇미학자 이성희는
▷1989년 《문예중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부산대(철학과 졸업)에서 노자 연구로 석사, 장자 연구로 박사 학위
▷시집 《겨울 산야에서 올리는 기도》 등
▷미학·미술 서적 『무의 미학』 『빈 중심의 아름다움-장자의 심미적 실재관』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 등
▷현재 인문고전마을 「시루」에서 시민 대상 장자와 미술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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