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자 이성희의 미술 이야기 : 거울 - (5)나는 누군가?

이성희 승인 2020.09.23 11:28 | 최종 수정 2020.11.11 10:18 의견 0

어둠 속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눈부신 환영처럼, 이 덧없이 아름다운 청년을 보라. 두 팔을 집고 깊숙이 기울인 상체와 길게 뺀 목, 그리고 얼굴의 표정이 몹시도 간절해 보이지 않는가. 화면의 중심에서 빛을 받으며 마치 발광체 같이 불쑥 내밀어진 한쪽 무릎, 그 근육의 긴장된 굴곡은 절실함을 생생하게 촉감하게 한다. 풍운아 같은 이탈리아의 화가 카르바조(1571∼1610)가 그린 「나르시스」이다.

카라바조 「나르시스」
카라바조 - 「나르시스」

카라바조는 성격이 꽤나 거칠고 과격했던 모양이다. 그는 하루라도 싸움을 벌이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가 성년이 된 뒤 고소를 당하지 않았던 유일한 때는 싸움에서 심한 부상을 입어 침대에 누워서 지낼 수밖에 없었던 한 철의 겨울뿐이었고 한다. 바람 잘 날 없는 화가는 35세 때, 테니스 시합 중 일어난 싸움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자가 되어 수년을 떠돌다가 말라리아로 사망한다. 그가 죽고 난 3일 후에 교황의 사면장이 도착했다 한다. 이 운 없는 사나이는, 그러나 당시 회화의 고전적 규범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냈던 위대한 화가였다. 그는 종교적 주제조차도 하층민의 삶의 모습을 통해 재해석했으며, 무엇보다 강렬한 음영의 대비와 단순하면서도 동적인 구도를 통한 연극적 효과는 바로크 시대의 문을 열었다.

강의 신 체피수스와 강의 요정 리리오페 사이에 난 아이가 오래 살겠는가는 질문에 눈 먼 예언가 티레시아스는 이렇게 답했다. “그렇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면.” 황당한 예언의 수수께끼는 나중에 풀리게 된다. 나르시스는 깊은 숲 속 샘물(물-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게 되고, 자신의 거울상에 매혹되어 애태우다가 죽고 말았던 것이다. 많은 화가들의 나르시스가 있지만 카르바조처럼 압축된 구도를 통해 서사의 장면을 극적으로 연출한 나르시스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얼마나 도발적인가. 화면에는 오직 나르시스와 거울상이 서로의 두 팔로 이어지면서 원을 이루고 있으며 다른 모든 것들은 어둠 속에 사라진다. 폐쇄적 자기애의 극적인 구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두 손의 미묘한 차이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나르시스의 한 손은 땅에 놓여 있지만 다른 한 손은 반쯤 물에 잠겨 있음을. 그 손으로 그는 자신의 반영을 만지려 했을 것이다. 손이 닿자 수면은 흔들려 영상은 깨어지고 소년은 좌절하지만, 잠시 후면 다시 아름다운 얼굴이 비치고 소년은 또다시 간절한 갈망으로 샘물에 손을 넣었을 것이다. 이러기를 몇 번이나 거듭했을까? 거리를 두면 뚜렷하지만 닿으면 깨지는 이 기이한 환영이 소년의 심장을 까맣게 태워버렸으리라.

나르시스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했다기보다 ‘나’라는 실체의 환영과 같은 모호성에 절망하고, 그것을 포착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것은 아니었을까? 인간의 최초의 자기 발견은 이러한 물-거울, 발레리가 “평평한 깊은 물이여”(「나르시스 단장」)라고 한 모호하고 유동적인 질료의 심연에 잠겨 있다. 이것이 원초적인 ‘거울 단계’이리라. ‘나’는 손에 움켜쥘 수 없는 유동하는 이미지이다. 나르시스를 사랑하다 실체가 사라져 버린 요정 에코, 그 공허한 메아리처럼 말이다.

(그림2) 요하네스 검프 - 「자화상」
요하네스 검프 - 「자화상」

자신을 반영하는 거울의 이미지에는 언제나 ‘나는 누군가?’라는 질문이 스며들어 있다. 오스트리아의 화가 요하네스 검프(1626∼?)가 그린 「자화상」에 오면 그 질문은 사뭇 복잡해진다. 거울의 영상과 캔버스의 초상은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오/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오”(〈거울〉)라는 자아분열적인 이상의 시를 환기시킨다. 나르시스의 물-거울이 정감이 뒤섞이는 이미지의 몽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평면의 유리거울은 유동하는 표면이나 모호한 깊이 없이 명징하게 실재를 복사하기 때문에 오히려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되는 이미지의 분열을 낳는다.

검프의 「자화상」은 실제 화가의 얼굴이 감춰졌다가 거울상으로 드러나고, 다시 그림 속의 초상으로 바뀌는 일련의 사건(초상화의 제작 과정)을 보여준다. 캔버스에 그려지는 초상은 거울상의 거울상인 셈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거울상(복사)과 거울상-거울상(복사의 복사)의 눈동자 위치가 살짝 다르다. 이것이 기이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화가와 거울이 눈을 맞추는 수작을 캔버스의 초상이 훔쳐보고 있는 것만 같지 않은가. 닮으면서도 닮지 않은 얼굴들이 우리를 머뭇거리게 한다.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인 가상인지, 무엇이 원본이고 무엇이 복사본인지… 이러한 분열적인 망설임이 ‘환상성’을 불러일으킨다. 문학이론가 토도로프는 자연과 초자연, 실재와 가상 사이의 불확실성으로 우리가 머뭇거릴 때 ‘환상성’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유리거울의 이미지는 명징한 재현의 이미지다. 그러나 그것이 ‘나는 누군가?’를 묻기 시작할 때, 그러면서도 나의 “악수를 받을 줄” 모를 때. 거울 이미지는 재현을 흔드는 환상성의 시작이 된다. ‘나’의 존재도 환상성 속에 점멸하는 것이다.

망설임을 잠시 멈추게 하는 것이 있긴 있다. 화가의 손이다. 손은 거울상과 초상 어디에도 복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허무하게 물의 영상을 움켜쥔 카라바조(나르시스)의 손은 ‘나’를 지우고, 붓을 든 검프의 손은 ‘나’를 만든다. 그러나 그들 모두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나’에게 악수를 건네고 있다. 손은 실재와 가상(거울상) 사이에서 떠돈다.

(그림3) 베르메르 - 「음악 교습」
(그림3) 베르메르 - 「음악 교습」

거울상의 환상성은 평범한 일상의 ‘결정적 순간’을 충실하게 재현했던 베르메르의 그림 속에도 음험하게 숨어 있다. (베르메르의 결정적 순간은 ‘일상적 순간’과 ‘황금빛 영원’의 연금술적 융합이다.) 베르메르의 「음악 교습」은 실내에서 소녀가 음악 교습을 받는 평범한 한 장면이다. 실내는 꽤 깊은 심도를 가졌다. 전면 카펫이 덮여 있는 큰 탁자와 그 뒤의 빈 의자와 바닥의 악기를 지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시선은 버지널을 연주하고 있는 소녀에 닿게 된다. 소녀 옆에는 음악 선생이 무표정(엄격한 표정?)하게 서 있다.

버지널 위에는 거울이 걸려 있다. 이 정도 크기의 거울은 당시 매우 고가품이다. 17세기 네덜란드 장르화 속 서민 가정에 걸려 있는 거울들은 대부분 얼굴 크기 정도로 코딱지만 한 것들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고가의 큰 거울 때문에 우리는 사뭇 다른 시공을 볼 수 있게 된다. 우선 거울의 소녀는 거울 밖의 소녀보다 조금 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어 선생을 향한 소녀의 숨겨진 마음의 움직임을 거울이 훔쳐내고 있는 것만 같다. 거울 밖의 소녀가 선생의 얼굴을 온전히 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더 많이 오른쪽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거울 속 소녀는 이미 선생을 거의 정면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속임수이지만 묘한 거울 이미지의 마법이기도 하다.

(그림4) 베르메르 - 「음악 교습」(거울 부분)
베르메르 - 「음악 교습」(거울 부분)

깊은 심도의 실내도 거울의 작은 사각 안에 들어와 있다. 마치 오목거울의 왜상을 보는 것처럼. 이러한 거울의 마법은 사실 그림을 잘 살펴본다면 어렵지 않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거울은 앞으로 기울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오른쪽으로도 살짝 기울어져 있다. 이 기울기가 실내의 공간을 압축하고, 소녀의 고개가 좀 더 왼쪽으로 돌려진 것처럼 보이게 했을 것이다.

이러한 거울의 장난은 우연일까, 아니면 기획된 것일까? 네 눈에는 베르메르가 여러 차례 왔다갔다하며 거울의 기울기를 세심하게 조절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듯도 하지만, 이제 와서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런데 거울에서 그림의 공간 안에는 없는, 그림의 정경 앞에 놓여 있었을 이젤의 다리를 발견하게 되면 베르메르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어진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당신! 이젤 앞에 있어야 할 화가, ‘나’의 자리에 그러나 ‘나’는 없다. 얀 반 에이크가 저 유명한 <아르놀피니의 결혼>에서 작은 거울 속에 자신을 그려놓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 것과는 달리, 이 이젤 거울상은 화가의 존재 증명인가, 부재 증명인가? 어쩌란 말인가?

베르메르의 거울은 분명 실재를 재현하면서도 재현하지 않는다. 거울의 장난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연결하기도 하지만 더욱 혼란스럽게도 만든다. 그 혼란 속에서 거울이 ‘너는 누군가’라고 묻는다면 ‘나’와 익숙한 나의 ‘세계’가 문득 거품처럼 스르르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닌지, 머리털이 쭈뼛 선다, 샬롯의 아가씨처럼.

이성희

◇미학자 이성희는

▷1989년 《문예중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부산대(철학과 졸업)에서 노자 연구로 석사, 장자 연구로 박사 학위
▷시집 《겨울 산야에서 올리는 기도》 등
▷미학·미술 서적  『무의 미학』 『빈 중심의 아름다움-장자의 심미적 실재관』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 등
▷현재 인문고전마을 「시루」에서 시민 대상 장자와 미술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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