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자 이성희의 미술 이야기 : 그림자 - (2)회화의 발명

이성희 승인 2020.10.21 15:32 | 최종 수정 2020.10.21 15:54 의견 0
(그림1) 스페인 무용단 auMents Dansa-Teatre - 「그림자 도둑」(페터 슐레밀의 이상한 이야기를 각색한 무용)
스페인 무용단 auMents Dansa-Teatre - 「그림자 도둑」(페터 슐레밀의 이상한 이야기를 각색한 무용)

샤미소가 1831년에 발표한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원제; 페터 슐레밀의 이상한 이야기)는 황금이 무진장 나오는 마법의 주머니에 현혹되어 자기 그림자를 판 사나이 슐레밀의 이야기이다. 세상을 황금으로 가득 채울 수도 있지만 그림자가 없는 슐레밀은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도 자신이 이 세상의 존재임을 증명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게 된다. 그는 존재의 근거를 잃어버린 것이다. 작가 샤미소는 프랑스 혁명으로 재산을 몰수당한 귀족 집안 출신이다. 고향에서의 존재 근거를 잃고 독일로 망명을 떠나야 했던 개인사의 체험이 슐레밀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림자의 상실은 존재 상실의 위기감이 도처에서 음험하게 서멀거리는 오늘날 더 강렬한 상징의 힘을 가진다. 우리도, 우리의 고단한 삶도 어디론가 하염없이 떠돈다. 그림자를 잃어버린 슐레밀처럼, 혹은 주인을 잃어버린 그림자처럼.

그림자가 과연 존재의 증명서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조세프-브누아 쉬베가 1791년 살롱전에 출품했던 「디뷰타드 혹은 그림의 기원」는 폴리비우스의 『박물지』에서 회화의 기원으로 전한 설화를 형상화한 것이다. 코린트에 살았던 한 도공의 딸이 사랑하는 남자가 외국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연인의 형상을 간직하기 위해 램프 불빛을 비추어 벽에 생긴 연인의 그림자 윤곽선을 그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회화의 기원이라고 하니, 무슨 ‘기원’ 이야기치고는 좀 싱겁지만 초상화가 그림자 그림이라는 점은 묘하게도 우리 언어 용법과도 닮았다. 우리도 초상화에 ‘영(影; 그림자)’ 자를 붙인다. ‘영정(影幀)’, ‘존영(尊影)’ ‘진영(眞影)’ 등이 그러하다. 그림자가 사람을 그대로 반영하고 그 존재를 증명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고대 그리스의 사유와 상상력은 시각 은유에 바탕을 두고 있다. 플라톤 철학의 최고 개념인 ‘이데아’(idea)는 ‘본다’는 것에서 연원한다. 시각 이미지는 빛과 그림자에서 출발하기 마련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에 따르면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계는 ‘실제 세계(이데아)’의 그림자이다. 그렇다면 이데아를 본 떠 이 세계를 창조한 데미우르고스(플라톤 『티마이오스』에 나오는 조물주)는 그림자를 창조한 셈이다. 데미우르고스는 그림자 극장 주인이다. 세계의 발명은 회화의 발명으로 이어진다. 물론 비유일 테지만, 다 그림자놀이다.

(그림2) 조세프-브누아 쉬베 - 「디뷰타드 혹은 그림의 기원」
조세프-브누아 쉬베 - 「디뷰타드 혹은 그림의 기원」

프랑스 해체주의 철학자 데리다는 쉬베의 그림에서 회화의 기원을 이루는 그림자 그리기가 지각보다는 기억에 더 의존하고 있으며, 회화가 가시성과 비가시성, 현전과 부재의 놀이임을 읽는다. 코린트의 여인이 그림자의 선을 그리면서 동시에 그녀의 연인을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선을 그을 때는 모델을 보지 못하고, 모델을 볼 때는 선을 보지 못한다. 어느 하나에는 장님이 되어 기억에 의존해야 한다! 참내, 뭐 이런 걸 가지고 무슨 거창한 것인 양 미학적 구라를 현란하게 만들어내는 저 동네 논객들의 능력이 대단하다 싶다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각설, 그림자가 사람을 대신하고 증명할 수 있다는 발상에는 그림자가 그 사람이 가진 모종의 중요한 무엇인가를 담고 있다는 오래된 상상이 담겨 있다. 그림자에 혼이 담겨 있어서 그림자를 함부로 밟으면 안 된다는 옛 풍습은 동서양 어디서나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으스스한 조선의 달밤, 옛이야기의 고갯길에서 만난 창백한 미녀가 사람인지 귀신인지 알아보려면 그림자를 보면 안다. 귀신과 도깨비는 그림자가 없다. 그림자는 이 세계의 주민등록증이자 영혼증이다. 그림자가 없는 것들은 이 세계의 정당한 거주자가 아니다. 그들은 슐레밀처럼 떠돌아야 하는 것들이다.

(그림3) 데이비드 앨런 - 「회화의 기원」, 1775,
데이비드 앨런 - 「회화의 기원」, 1775,

폴리비우스가 전한 설화를 모티프로 그려진 그림들은 꽤 많다. 그런데 하나 같이 두 남녀의 자세가 몹시 불편해 보인다. 그것은 한 대상의 그림자를 그리는 것이 쉽지 않거나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 대상의 그림자를 그리려는 순간 그리는 자신의 그림자와 대상의 그림자가 겹쳐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자연스러운 자세를 보이는 쉬베의 그림에는 두 그림자가 겹쳐지고 있다. 불편하고 어색한 자세는 그림자가 겹쳐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림자는 디테일의 충돌 없이 서로서로 쉽게 융합한다. 그리하여 나만의 고유성을 상실하고 다른 형태가 되기 십상이다. 두 손을 결합하여 벽에 백조나 늑대 등의 다양한 형상의 그림자를 만들어 내곤 했던 유년의 그림자놀이를 생각해 보라. 그래서 그림자는 존재 증명이지만 그 증명은 언제나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그림4) 니콜라이 푸생 - 「자화상」
니콜라이 푸생 - 「자화상」

17세기 프랑스 화단을 대표하는 화가는 누가 뭐래도 니콜라이 푸생이다. 푸생은 요란하고 역동적인 바로크의 시대를 살았지만 그의 그림은 차라리 명상적일 때가 많다. 그의 「자화상」은 일견 평범해 보이지만 반전이 숨겨져 있다. 캔버스 액자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화실인 듯하다. 왼쪽 캔버스에는 뮤즈의 모습이 드러나 있는 반면에 자화상 바로 뒤의 캔버스(뒷면?)는 비어 있다. 이 빈 화면에 서명이 있고 그 위에 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곳을 그냥 스쳐가서는 안 된다. 이 언저리에 좀 귀찮지만 묘한 아이러니가 어른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빈 화폭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그림이 일종의 그림자라는 것을 암시하며 폴리비우스의 그림자 기원론을 잘 계승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그림자는 폴리비우스의 반전일지도 모른다.

그림자는 그 앞의 초상을 실재가 되게 하지 않는가? 적어도 그 초상은 그림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푸생의 자화상은 이를 주장한다. 그림자(그림)를 가득 담은 액자들 겹겹의 가로선을 뚫고 그의 머리가 당당하게 솟아오른 것을 보라. 푸생은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존재 증명과 자기 초상의 실재성을 선언한다. 마치 동시대를 살았던 데카르트의, 이 세상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도 “나는 존재한다”라는 저 음험한 근대적 주체의 선언처럼. 그렇지 않다면 그가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에 서명을 이렇게까지 이례적으로 상세하게 적을 필요가 있었을까?

“레잔드리의 화가, 니콜라 푸생의 초상, 56세, 로마 대사년 1650년”

그렇지만 앞에서 우리가 입장했던 볼탕스키의 「그림자 극장」은 유감스럽게도 푸생의 선언을 비웃는다. 다 그림자놀일 뿐이야, 짜샤. 그림자의 속성, 그림자의 모호성과 이중성은 흑마술 같은 반전을 품고 있어서 그림자의 존재 증명은 늘 불확실하다. 우리는 누구나 언제든지 슐레밀이 될 수 있다.

그림 속의 형상을 실체화시켜주려는 그림자가 그림 속에 언제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을까? 그림자를 찾아서 우리도 슐레밀처럼 떠돌아 보아야 한다. 독자 여러분, 설마 애초부터 모든 그림에는 당연히 그림자가 그려져 있었다고 순진하게 믿고 계신 것은 아니겠지요? 그림자 기원론을 주장한 폴리비우스 시절의 그림에는 그림자가 없었답니다. 단언컨대, 그림자는 회화사에서 어느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서 특정한 의미를 품고서 등장하게 됩니다.

이성희

◇미학자 이성희는

▷1989년 《문예중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부산대(철학과 졸업)에서 노자 연구로 석사, 장자 연구로 박사 학위
▷시집 《겨울 산야에서 올리는 기도》 등
▷미학·미술 서적  『무의 미학』 『빈 중심의 아름다움-장자의 심미적 실재관』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 등
▷현재 인문고전마을 「시루」에서 시민 대상 장자와 미술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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