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가 사는 곳은 어딘가? 신비로운 작가 애드거 앨런 포는 『그림자―한 편의 동화』에서 그림자의 주소를 우리에게 은밀하게 전해준다. 역병의 검은 날개가 세상을 뒤덮던 때, 프톨레마이스(이집트의 고대 도시)의 폐쇄된 홀에 모인 사람들 앞에 수상한 그림자가 나타난다. 그 그림자는 홀에 안치되어 있는 친구 조일러스 시신의 발치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림자가 말한다. “나는 그림자이며, 사는 곳은 프톨레마이스 지하묘지에 가까우며, 저 썩은 카론의 수로의 경계가 되는 어둑한 헬루전 평야 바로 옆이오.” 헬루전 평야가 어딘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곳이 카론이 망자를 태우고 건너는 스틱스강 근처, 죽음의 언저리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림자에는 자주 죽음의 냄새가 배여 있는 것일까?
「델라웨어를 건너는 워싱턴」 등 미국 역사화로 유명한 에마누엘 루츠(1816-1868)가 보낸 소환장을 펼쳐 보자. 작품 「소환」은 가운데 큰 기둥을 사이로 빛의 부분과 어둠의 부분이 나뉘고 있다. 빛이 가득한 오른쪽의 풍경은 18세기쯤이나 될까, 유럽 귀족 집안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아이들과 아기를 안고 있는 안주인, 그리고 그 앞의 기둥에 기대선 사람은 만돌린 연주자 같다. 작은 가족행사가 있었던 것일까? 빛의 방에 아름다운 선율을 선사했을 만돌린은 의자 위에 놓여 있다. 이 행복한 노랑의 세계에서 물러나와 큰 기둥을 돌아서 왼쪽으로 가면 분위기는 순식간에 일변한다. 이 집의 주인으로 보이는 귀족이 검은 복장에 흰 가면을 쓴 음산한 손님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다. 이 손님의 정체는 죽음이다.
전면 방바닥의 동일한 선상에 세 가지 물건이 놓여 있다. 흩어진 종이서류(계약서), 배드민턴 라켓과 셔틀콕, 그리고 칼이다. 혹시 이런 서사를 말하는 걸까, 귀족은 어느 땐가 전쟁 혹은 결투(칼)를 앞두고 죽음과 목숨을 건 거래(셔틀콕과 배드민턴 라켓)를 했다. 그리고 계약서(종이서류)에 서명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단란한 바로 이 순간이 그 계약의 기한이 끝나는 순간이다. 죽음은 손에 반지를 보여준다. 반지는 서약이나 계약을 상징한다. 죽음의 검은 의상은 프톨레마이스의 홀에 나타난 그림자를 떠올린다. 귀족의 그림자와 죽음은 병풍에 의해 하나로 접혀진다. 그래서 이 작품의 다른 이름은 「빛과 그림자」이다.
음산한 실내를 벗어나 저 넓은 들녘으로 나가보자. 푸생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에는 목동들이 나무 아래에 있는 석관을 발견하고 거기에 적힌 비문을 읽고 있다. 그 옆에는 고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여신 같은 여인이 서 있다.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Et in Arcadia ego.(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아르카디아’는 춤과 노래에 탐닉하는 건달인 목신 판의 고향이며, 고대 그리스의 목가적 이상향이다. 이상향 아르카디아에도 있다는 ‘나’는 누구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무릎 꿇고 앉아 석관의 비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목동의 그림자에 있다. 석관에 반영된 그림자는 무릎과 팔의 간격이 목동의 자세와 사뭇 다르다. 그림자는 원본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윽고 그의 팔의 그림자는 교묘하게 변형되며 낫 모양을 이룬다. 낫은 시간의 신이면서 죽음의 신인 크로노스의 상징물이다. 그림자 낫은 비문의 ‘ego’를 덮으면서 ‘Arcadia’에 닿는다. 그림자가 말하는 ‘나’는 ‘죽음’인 것이다. 죽음은 어디에나 있다, 심지어 아르카디아에도.
그림자의 발은 '카론의 수로'에 적셔져 있다. 그런데 그 카론의 수로는 지하의 무저갱이나 안드로메다 성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속에 있다. 인간의 아득한 심층을 들여다보았던 심리학자 칼 융은 우리 마음의 밑바닥에 서식하고 있는 그림자(Schatten)를 보았다. 그림자는 우리들이 의식으로부터 거절되고 억압받고, 그리고 충분히 살지 못한 심리 속 어두운 면이다. 그리하여 어둔 내면의 '헬루전 평야'를 방황하다가 삶 속으로 불쑥 올라오곤 하는 그림자는 그것이 설사 죽음이 아닐지라도 아벨이기보다는 더 자주 카인이며, 하이드씨이고 메피스토텔레스이기 십상이다.
그림자는 우리 발끝에, 아니 우리 안에 늘 함께 있다. 「페르시아 왕자」에서 왕자 앞에 나타난 그림자는 왕자 내면의 어둠이다. 그래서 그림자를 찔러도 왕자가 죽고 왕자가 찔려도 왕자가 죽는 것이다. 이 미션 임파서블의 해법은 실은 지극히 단순하다. 그림자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유일한 단 하나의 방법은, 반전, 싸우지 않는 것이다. 칼을 집어넣으면 된다. 칼을 집어넣는 순간, 놀랍게도 그림자는 사라진다. 그림자는 적이 아니라 왕자와 다시 통합되는 것이다. 자신의 감춰진 어둠(혹은 죽음)을 용납하고 통합한 자만이 아니마(anima; 여성성)인 공주를 얻으리라(아니마는 또 다른 하나의 테마이다.). 진정한 ‘자기’를 얻는 것이다. 이 마지막 부분에서 「페르시아 왕자」는 심층 심리학 교과서이면서 탁월한 서사의 문학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위대한 화가 렘브란트(1606-1669), 그의 마지막 얼굴을 만나야 한다. 렘브란트만큼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도 드물다. 자화상을 그리는 것에 표현 기법의 실험을 위해서 등등 수많은 회화적 이유를 달 수 있겠지만 그 어떤 그럴싸한 이유에도 그 심층엔 집요한 자기 정체성의 탐구가 깔려 있다. 17세기는 극한까지 자아의 문제를 탐색했던 데카르트의 시대가 아니던가.
렘브란트 그림에는 깊은 심연의 어둠과 신비한 빛이 교차한다. 모순적이고 대립하는 두 힘의 역동적 이원성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연상시킨다. 1막의 첫 장면 강아지로 변신해 따라 들어온 악마 메피스토텔레스에게 파우스트가 묻는다.
파우스트 : 그럼 좋다. 도대체 자넨 누군가?
메피스토텔레스 :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오히려 늘 선을 창조하는 저 힘의 일부분입니다.
파우스트 :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은 무슨 뜻인가?
메피스토텔레스 : 저는 언제나 부정하는 정신입니다. 또 그것은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겨나는 모든 것은 멸망하기 마련이니까요. (중략) 저는 처음엔 모든 것이었던 부분의 일부분, 빛을 낳는 어둠의 일부분입니다.
악을 원하는 어둠이 선을 창조하고 빛을 낳을 수 있게 되는 기이한 변용은 빛과 어둠의 대극을 연금술적으로 통합했을 때 일어난다. 그것이 렘브란트의 「웃는 자화상」이다. 젊은 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성과 재물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첫 번째 부인과 사별 이후 여생을 의지했던 부인 헨드리케마저 카론의 손님이 되던 그해, 그리하여 삶이 완전히 파산하고 죽음과 같은 그림자로 뒤덮였을 때 렘브란트는 이 자화상을 그린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의 자화상 가운데 유일하게 웃고 있는 것이다.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 거울을 보았을 때, 그는 어쩌면 한때는 그의 얼굴이었던 숱한 가면들(자화상들)을 파노라마처럼 떠올렸을 지도 모르겠다. 저 웃음은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무상감이나 허무의 표시인가? 아니 오히려 그 무상에 대한 깨달음이요, 무상의 끝에서 얻은 대긍정이 아닐까. 그는 자신에게 다가왔던 모든 빛과 어둠의 그림자를 용납하기로 한 것이리라. 그리하여 「웃는 자화상」에서 렘브란트는 지금까지의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립을 넘어서 어둠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서 빛으로 피어나는 발광체의 웃음이 된다. '빛을 낳는 어둠'의 연금술이다. 그는 칼을 집어넣은 것이다. 푸생의 목동들 옆에서 미소 짓고 있는 여신(아니마)이여, 렘브란트의 웃음을 허락하소서.
◇미학자 이성희는
▷1989년 《문예중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부산대(철학과 졸업)에서 노자 연구로 석사, 장자 연구로 박사 학위
▷시집 《겨울 산야에서 올리는 기도》 등
▷미학·미술 서적 『무의 미학』 『빈 중심의 아름다움-장자의 심미적 실재관』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 등
▷현재 인문고전마을 「시루」에서 시민 대상 장자와 미술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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