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자 이성희의 미술 이야기 : 거울 - (1)깨어나는 거울 세계

에드워드 번-존스 「재앙의 머리」, 「비너스의 거울」
베르사유 궁 거울의 방
미셸 바르텔레미 올리비에 「템플 궁에서의 저녁 티타임」

이성희 승인 2020.08.26 10:25 | 최종 수정 2020.09.30 16:35 의견 0

라이나 마리아 릴케는 거울에 매혹되었다. 그는 자주 중얼거리곤 했다. “거울의 반사 속에는 무언가가 살고 있어.” 릴케는 무엇을 본 것일까? 거울 속 ‘무언가’를 찾아나서는 여정은 실은 우리들 상상력의 굽이굽이 고갯길과 이미지들의 운석이 쏟아지는 황홀한 들녘으로 나서는 길이다. 그곳은 위험하면서도 매혹적이다.

작가 보르헤스는 『상상동물 이야기』에서 중국에서 전해온 한 기이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황제(黃帝) 시대, 거울 속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지금처럼 단절되어 있지 않았다. 두 세계 사이에는 작은 통로들이 있었고 평화를 지키며 거울을 통해서 서로 왕래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거울 세계 사람들이 인간을 공격해 왔고, 황제는 힘겹게 침략자들을 몰아내어 거울 속에 가두었다. 이후 거울 세계는 힘을 잃고 인간과 사물에 종속된 반영이 되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들이 이 신비한 동면상태에서 깨어나게 될 것이라고 보르헤스는 전한다. 아마 그는 이 동면상태가 이미 오래 전에 깨어진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누구던가? 누구보다 거울의 신비에 매료되었던 작가가 아니던가. 그는 거울 속에 동면을 깬 그 ‘무언가’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림1 에드워드 번-존스 〈재앙의 머리〉
에드워드 번-존스 〈재앙의 머리〉

거울 세계로의 여정을 라파엘전파 화가 에드워드 번-존스(1833~1898)의 <재앙의 머리>에서부터 출발하자. 한 사내가 오른손으로는 연인의 손을 잡고 왼손으로는 끔찍하게 잘려진 머리를 들고 우물에 비춰보고 있다. 꼭대기까지 물이 가득 차 있는 수상한 우물은 거울이 되고 있다. 사내의 이름은 페르세우스이고 여인은 안드로메다이다. 머리카락이 뱀으로 되어 있는 잘려진 머리의 주인공은 메두사임이 틀림없다.

다나에를 차지하기 위해 그녀의 아들 페르세우스를 제거하고 싶었던 세리포스 섬의 왕은 그에게 메두사의 머리를 가져오라는 불가능한 임무를 맡긴다. 누구든지 쳐다보기만 하면 돌이 되어버린다는 괴물 메두사, 도대체 보지 않고 어떻게 메두사의 목을 자를 것인가? 이 난제의 해법이 거울이었다. 페르세우스는 아테나 여신이 준 청동 방패에 비친 거울상을 이용하여 메두사의 목을 친다. 메두사의 머리를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영웅은 바다괴물의 제물로 바쳐진 에티오피아 공주 안드로메다를 발견하게 되는데, 영웅이라면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더구나 그 여인이 황홀한 미인이라면 말이다. 그는 괴물을 퇴치하고 미녀를 구한다. 그리고 용감한 영웅은 당연히 미녀와 결혼하게 된다. 이 일련의 서사를 에드워드 번-존스는 12개의 이미지로 압축하려 했다. 미완성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번-존스는 <재앙의 머리>를 시리즈의 마지막 장면으로 그렸다.

아마 여자의 집요한 호기심이 마법의 보자기 키비시스 속에 든 위험한 메두사의 머리를 다시 꺼내게 했을 것이다. 메두사의 잘려진 머리는 여전히 보는 자를 돌로 만든다. 사랑하는 여인의 호기심을 위해 사내는 다시 거울을 이용하고자 한다. 그런데 사내는, 아니 화가 번-존스는 메두사의 목을 자를 때 사용했던 청동 방패가 아니라 왜 우물을 거울로 활용했을까?

(그림2 에드워드 번-존스 〈비너스의 거울〉)
에드워드 번-존스 〈비너스의 거울〉

고여 있는 물은 가장 원초적인 거울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이 원시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몽상의 철학자 바슐라르에 따르면, (유리나 청동) 거울은 인공적이고 기하학적 물건이기에 몽상의 도구가 되기엔 너무 명징하다. 반면 샘물이나 우물의 어슴푸레한 수면은 쉽사리 꿈과 몽상의 문을 연다. <재앙의 머리>에서 솟아오른 우물의 영상은 외부의 반영이지만 동시에 저 깊은 심연에서 솟아오른 것 같기도 하지 않은가? 우물이 환기시키는 몽상은 반영과 심연, 두 축의 뒤섞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우물물은 거울의 표면이면서 그 표면 너머 미지의 거울 속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머리를 모은 세 인물 시선의 흐름이 흥미롭다. 페르세우스의 시선은 안드로메다를 향하고 안드로메다의 시선은 물-거울 속의 메두사를 향한다. 그리고 메두사는 모든 시선을 거둔다. 메두사의 눈은 감겨져 있다. 감겨진 메두사의 시선은, 어쩌면 눈으로 보는 현실 세계와는 다른, 거울 속의 세계를 향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일까? 우물에서는 기이한 거울 세계가 동면상태에서 깨어나고 있다. 백랍처럼 창백한 메두사의 죽은 얼굴이 거울 속에서는 피가 도는 부드러운 살을 가진 여인의 얼굴이 되고 있지 않은가? 메두사는 거울 세계에서 온전히 살아 있다. 실상 메두사는 항상 거울의 몽상 속에만 있다. 살아 있는 자로서 누구도 그녀를 직접 본 사람이 없지 않겠는가. 페르세우스도 거울을 통해서만 보았을 뿐이다. 거울 속 ‘무언가’는 메두사처럼 위험하지만 위험이 때로는 유혹의 강도를 강화시키는 것일까? 인간은 끊임없이 거울에 매혹되었다. 때로는 거의 거울의 광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베르사유 궁 거울의 방)
베르사유 궁 거울의 방

1667년, 프랑스 왕립거울제조소에서 3주 동안 2명의 베네치아 장인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유리 연마사가 고열로, 다음은 유리를 부는 직공이 복통으로 사망한다. 이 죽음의 배후에 베네치아 공국이 있다고 의심되었다. 당시 유럽 귀족들의 사치품으로 인기를 끌었던 유리거울은 베네치아 공국이 독점 생산하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거울은 라파엘로의 그림보다 비쌌다. 루이14세는 유리거울을 프랑스에서 생산하기 위해 왕립거울제조소를 세우고 비밀리에 베네치아 장인들을 빼돌린다. 베네치아 공국도 비법의 유출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당대 최고의 첨단 산업이었던 유리거울을 둘러싼 온갖 음모와 술수 그리고 살인의 광기가 휩쓸고 지난 간 뒤, 프랑스가 드디어 유리거울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베르사유 궁전의 저 황홀한 거울의 방이 탄생하게 된다.

(그림3 미셸 바르텔레미 올리비에 〈템플 궁에서의 저녁 티타님〉)
미셸 바르텔레미 올리비에 〈템플 궁에서의 저녁 티타임〉

1682년 거울의 방이 공개되었을 때 경탄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흡사 마법에 걸린 듯 했다. “화려함과 빛에 싸여 눈이 부시다. 그것은 거울의 수만큼 늘어나서 타오르는 불보다 더 빛나는 광경을 만들어낸다.” “거울이 진짜 창문과 마주하고 마치 창문처럼 붙어 있어서 이 방이 수백만 배는 커 보인다. 한쪽 끝만 보고 있어도 회랑이 끝없이 펼쳐진 느낌이다.” 당시 사람들의 찬탄이다. 거울의 세계가 옛이야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세계로 다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미셸 바르텔레미 올리비에(1712~1784)가 그린 <템플 궁에서의 저녁 티타임>(1776)은 파리 템플 궁의 4개의 거대한 거울이 걸린 살롱의 모습(일부)을 보여준다. 뒤에 ‘살롱’을 테마로 한 이야기에서 나는 다시 이 그림의 거울 방 속으로 들어가 거기 있는 환영들과 대화를 해볼 작정이다. 다만 여기서는 저 경이로운 크기의 거울에 대한 감탄만을 허용하자. 이 거울들이 서로를 비추며 만들어 낼 환상적 반영을 떠올려 보라.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 부인』에서 시골 여인 엠마 보바리가 꿈꾸던 파리의 이미지는 이러한 거울로 장식된 살롱이었다.

<재앙의 머리>에서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가 잡은 손은 거울 속에서는 그 주인이 불확실해 보인다. 그것은 마치 메두사의 거울 세계와 현실 세계가 손을 맞잡은 것만 같다. 두 세계를 나누는 금기는 깨졌다. 배경은 온통 사과나무다. 사과는 신화에서 금기이거나 수많은 극적 전환을 일으키던 과일이 아니던가. 사과 몇 개는 이미 땅에 떨어져 있다. 이제 우리도 황제가 봉인한 금기를 넘어 거울 세계, 그 기이한 이미지의 세계로 떠나자.

이성희

◇미학자 이성희는

▷1989년 《문예중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부산대(철학과 졸업)에서 노자 연구로 석사, 장자 연구로 박사 학위
▷시집 《겨울 산야에서 올리는 기도》 등
▷미학·미술 서적  『무의 미학』 『빈 중심의 아름다움-장자의 심미적 실재관』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 등
▷현재 인문고전마을 「시루」에서 시민 대상 장자와 미술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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