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자 이성희의 미술 이야기 : 거울 - (3)거울나라의 여인들

이성희 승인 2020.09.09 09:55 | 최종 수정 2020.09.30 16:29 의견 0

그녀들은 매일 묻는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윌리엄 홀먼 헌트(1827∼1910)가 그린 「샬롯의 아가씨」는 바로 그녀들의 이야기다. 영국의 계관시인 테니슨은 아서 왕의 전설 중에서 한 에피소드를 각색하여 서사시 〈샬롯의 아가씨〉를 지었는데, 헌트의 그림은 그 결정적인 한 순간을 포착한다.

(그림1) 윌리엄 홀먼 헌트 「샬롯의 아가씨」
윌리엄 홀먼 헌트 - 「샬롯의 아가씨」

색색의 실들로 이어진 미완성의 직물이 베틀에 놓여 있다. 그녀는 옷감을 짜다가 무엇엔가 놀란 듯 갑자기 몸을 일으킨 모양이다. 실들이 헝클어지며 춤춘다. 그녀의 머리 위로 검붉은 화염처럼 보이는 것은 곤두서며 솟구치는 그녀의 풍성한 머리채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놀라게 한 것일까? 그녀의 뒤로 보이는 거울에는 예리하게 한 줄 금이 가 있고, 넓은 들과 들을 가로지르는 강, 그녀의 운명이 될 비극의 강이 보인다. 그리고 말을 탄 한 기사의 뒷모습이 비치고 있다. 이 거울에 그녀의 무섭고도 슬픈 이야기가 담겨 있다.

샬롯의 아가씨는 그녀가 밤낮으로 옷감을 짜야하며 옷감 짜는 일을 멈추고 밖을 보는 순간 죽음의 저주가 내릴 것이라는 어둠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높은 탑에서 오직 거울을 통해서만 세상의 모습을 보아야 했고 거울에 비치는 세상의 모습을 하염없이 옷감에 짜 넣었다. 체념이 작은 행복이 되어갈 즈음의 어느 날, 카멜롯을 향하던 기사 랜슬롯이 거울에 나타났다. 하늘같은 투구를 쓰고 빛 같은 이마를 가진 랜슬롯을 본 순간, 그녀는 운명처럼 밖을 향해 세 걸음을 걷게 된다. 단 세 걸음이었다. 그 앞에 진짜 세상을 볼 수 있는 창이 있었다. 시는 이 순간을 이렇게 읊는다.

그녀는 옷감을 놓고 베틀도 내버려두고
세 걸음 만에 방을 가로질렀다.
그녀는 수련 꽃을 보았고
그녀는 투구와 깃털을 보았다.
그녀는 카멜롯을 내려다보았다.
옷감이 날아가 넓게 펼쳐져 떠올랐다.
거울은 한쪽에 다른 쪽까지 금이 갔다.
“나에게 저주가 내렸구나.” 소리쳤다,
샬롯의 아가씨가.

샬롯 아가씨의 기구한 운명을 추적하기 위해 우리는 여자와 거울의 관계를 좀 더 탐색해 보아야 할 듯하다. 백설공주의 계모는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쁜가를 매일 거울에게 물었다. 계모는 자신의 눈보다 거울의 눈을 더 신뢰한 것이다. 그녀도 샬롯의 아가씨처럼 거울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도록 저주받았던 셈인가? 실상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화장하는 여인들은 끊임없이 백설공주의 계모와 같은 질문을 거울에 던지고 있는 것일까? 춘추전국 시대, 주군의 복수를 하려다 실패하고 자결했던 자객 예양은 저 유명한 말을 남긴다. “사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 이 말에는 남자의 목숨과 여자의 화장이 등가를 이루고 있다. 화장은 거울 앞에서, 아니 거울 속에서 이루어지는, 여자들의 비장하고도 치열한 자객열전인지도 모른다.

히에르니무스 보스 -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부분)

거울은 여자들의 전도된 영혼이며, 또한 마르지 않는 허영의 샘으로 여겨졌다. 서양 중세에는 ‘거울은 악마의 진짜 엉덩이’라는 속담이 있었다. 그것은 마녀의 도구였다. 중세 마녀 재판에서는 늘 이런 질문이 던져졌다. “거울, 검, 손톱, 상아로 된 구나 자루를 사용한 적이 있는가?” 15세기의 초현실주의자 히에로니무스 보스(1450∼1516)가 그린 기괴한 그림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에서 지옥 쪽의 하단을 보면 악마의 엉덩이에 달린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있는 한 여자가 있다. 여자에게 거울은 허영과 쾌락과 죄악의 통로인 악마의 엉덩이다. 이러한 생각은 거울 속에 남자를 유혹하는 관능적인 여자가 살고 있다는 상상으로도 이어지기도 한다.

『홍루몽』에 나오는 이상한 거울 이야기다. 희봉을 연모하는 가서는 상사병에 결려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한 절름발이 도사가 와서 풍월보감(風月寶監)이란 거울을 주면서 사흘 동안 거울의 뒷면을 비춰보고 있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가서가 거울 뒷면을 보니 섬뜩한 해골이 비쳤다. 놀란 그는 얼른 거울을 돌려 앞면을 보았다. 거기에는 희봉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손짓하고 있지 않은가. 가서는 거울 속으로 들어가 희봉과 황홀한 사랑을 나누고 나왔다. 만족을 못한 가서는 다시 앞면을 보았고 희봉이 손짓하는 거울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러기를 몇 차례나 거듭했을까, 거울을 나오려는데 갑자기 두 사내가 나타나 그를 거울 속으로 끌고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시중드는 사람이 방에 들어가 보니 가서는 죽어 있었다. 거울은 타락한 쾌락의 동산으로 유혹하는 악마의 엉덩이인가?

(그림3) 민제급 「서상기 삽화」
민제급 - 「서상기 삽화」

중국의 춘향가라 할 수 있는 원대 잡극 「서상기」는 앵앵과 장군서의 숨바꼭질 같은 사랑의 드라마다. 청대 판본 민제급의 삽화는 실로 절묘하다. 러브레터를 읽는 여인(앵앵)을 병풍은 감추고 거울은 드러내고 있다. 감추면서도 드러내고 싶은 여인의 미묘한 이중 심리는 현실의 날 것이 아니라 거울 이미지를 통해서야 비로소 온전히 드러난다.

실제로 거울은 여자에게 이중적이다. 거울은 여자의 가장 내밀한 방이면서 동시에 남자의 시선으로 열린 발코니다. 여성학자 이리가라이는 자신의 한 책에 『타자인 여성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거울 앞에서 여성은 주체가 아니라 거울 시선의 타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 거울의 시선은 사회의 시선이며, 그 사회를 지배하는 남성의 시선일 것이다. 독일 화가 헤르만 알베르트(1937∼ )의 「거울을 든 남자」(1982)를 보면, 머리를 단장하는 여인을 위해 한 남자가 거울을 들고 있다. 일견 남자가 여자의 몸종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오히려 우리는 여기서 거울이 남자의 시선과 이어져 있음을 보아야 한다. 여자를 보는 남자는 거울 뒤에 은폐된 채 성장을 하고 있지만 보이는 여자는 거울 앞에 발가벗겨져 있다. 거울을 통한 남자의 시선은 여자를 발가벗긴다.

헤르만 알베르트 - 「거울을 든 남자」 

샬롯의 아가씨처럼 여자들은 모두 거울 세계에 살고 있는가? 그 어둠 속 (남자의) 목소리와 시선은 여자들을 음험하고 은밀한 거울 세계 속에 유폐시킨다.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거울 이미지 속에 그녀들을 살게 한다. 이것이 샬롯 아가씨에게 걸린 진짜 저주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남성 중심적 사회에 절망하고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 시인 실비어 플라스도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내 안에 그녀는 한 아가씨를 익사시켰고, 내 안에서 나날이/ 한 노파가 그녀를 향해 솟아오른다. 한 마리의 흉측한 물고기처럼.”(〈거울〉) ‘노파’는 남자의 시선이 요구하는 여성상을 파괴해버린 자신의 모습이다.

가상의 아가씨를 익사시킨 흉측한 물고기처럼, 샬롯의 아가씨는 세 걸음을 걸었다. 진정한 세상은 불과 세 걸음 밖에 있었다. 하지만 어쩌랴, 거울은 금이 갔고 검은 예언은 그 마각을 드러내려 한다. 원형의 난간이 그녀를 가로막고 마법의 실들이 사납게 그녀를 휘어 감는다. 가련한 샬롯의 아가씨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궁금하면 다음 회를 기대하시라.

이성희

◇미학자 이성희는

▷1989년 《문예중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부산대(철학과 졸업)에서 노자 연구로 석사, 장자 연구로 박사 학위
▷시집 《겨울 산야에서 올리는 기도》 등
▷미학·미술 서적  『무의 미학』 『빈 중심의 아름다움-장자의 심미적 실재관』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 등
▷현재 인문고전마을 「시루」에서 시민 대상 장자와 미술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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