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출처: 위키미디어
흰 모시 적삼에 눈썹 곱게 그리고서
마음속 정 둔 얘기 재잘재잘 얘기하네.
임이여 내 나이 묻지를 말아주오
50년 전에는 스물 셋이었다오.
담소아미백저삼(澹掃蛾眉白苧衫)
소충정화연니남(訴忠情話燕呢喃)
가인막문랑연세(佳人莫問郞年歲)
오십년전이십삼(五十年前二十三)
10여 년 전, 그러니까 40대 끝자락일 때의 일이다.
고향 하동에 간다손 치면 종종 화개장터에 들른다. 같은 하동군이라도 내가 나고 자란 횡천면과는 30여km의 상거이다. 땅이 아니라 사람이 고향이라 했던가. 내 동네에는 어울릴 만한 마땅한 친구가 없다. 그러나 화개장터에 가면 그 친구가 있다.
하동특산물을 파는 가게를 한다. 한 달만이든 일 년만이든 가면, 우린 치렛말 없이 파전에 막걸리를 마시러 간다. 나를 만나는 날이면 가게일은 온전히 친구 아내 몫으로 남는다. 그래도 아내는 눈흘김 한 번 한 적이 없다. 그래서 내가 안면에 철판을 까는 지도 모른다. 그도 나도 참게탕이나 메기탕은 좋아하지 않는다. 어쩜 막걸리와 궁합이 맞지 않는 안주여서일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막걸리집을 지나 한참이나 발품을 팔아서 찻집으로 안내했다. 웬일인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건강은 나빠 보이지 않는데, 속셈을 하면서 친구의 변명을 기다렸다. 무던히도 뜸을 들이다 친구가 한 말은 ‘술을 끊었다’는 것이다. 왜 끊었냐 하면 말이다, 하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저간의 사정을 풀어놓았다.
때는 오뉴월, 해가 중천에 이르니 무덥기만 하고 바람도 없다. 손님도 없다. 하여 이웃 가게 사람들과 막걸리 몇 사발로 점심 땜을 하고 가게로 돌아와 하릴없이 부채질만 했다. 서늘해지면 손님이 들겠지, 이참에 낮잠이라도 한 잠 때리자, 며 장터 복판에 있는 팔각정으로 갔다. 목침을 베고 막 잠이 들락 말락 했다. 한데 꼬맹이 둘이서 바로 옆에 붙어 장난질 치며 시끄럽게 떠든다. 짜증이 나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애들은 울면서 엄마에게 달려가 고자질을 했다. 좀 걱정이 되었다. 어찌됐건 애들을 울렸으니까.
“경수야, 수진아. 너희들이 잘못했어. 할아버지가 주무시는데 옆에서 떠들면 되겠니?”
확 잠이 달아났다. 뒤통수를 쇠망치를 얻어맞은 듯 띵했다. 할아버지라니, 내가? 온몸의 솜털이 쭈삣 돋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게로 왔다. 거울을 보았다. 제 나잇값인 얼굴 위로 하얗게 서리가 덮고 있다. 아뿔싸, 백발白髮! 아버지도 쉰이 못 돼 머리칼이 세었다. 하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머리가 일찍 센 것도 술타령 때문이라며 마누라가 더러 지청구를 먹이는 것도 흘려들었다. 한데 바로 아래 동생 또래의 아줌마가 나를 할아버지로 보다니! 역시 술을 끊어야겠구나.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다.”
물론 사우엘 울만은 <청춘>이란 시에서 ‘마음가짐’이라 노래했지만, ‘마음의 상태’가 더 적확한 것 같아 외람되이 의역했다.
내 나이가 몇이뇨? 흔히들 말하는 ‘58년 개띠’이니까, 60살도 며칠 남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우린 기껏 30살, 인생의 꼭 반을 살았다고 말한다. 억지라고 그런다. 아니다. 나는 정확히 근거를 가지고 말한다며 억지다짐을 한다.
시대는 바야흐로 20-20-20에서 30-30-30으로 변했다고들 한다. 30년 공부하고 30년 돈벌이생활하고 30년 노후를 보낸다는 말이다. 나는 달리 해석한다. 인생에 온전히 자신으로 설 수 있기 위해 30년이 필요하다. 학교를 다녀야 하고 세상 물정을 익히는 데 30년은 필요하다. 이 기간은 부모와 사회가 주문하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하여 진정한 자신의 나이에 포함할 수 없는 세월이다.
이 기간을 빼면 나는 서른 살이다. 앞으로 30년은 더 살 것이다. 하여 꼭 인생의 절반을 산 셈이 아닌가! 아직 ‘청춘’, 그것도 무르익은 청춘인 것이다.
내 고향 역 ‘횡천역’은 무인역無人驛이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난 후 차장이 와서 기차표를 끊는다. 한데 표를 끊을 때마다 내 또래쯤으로 보이는 차장은 꼭 묻는다. ‘할인할 게 있습니까?’ 아마 경로우대권을 말하는 것이리라. 한두 번이 아니라 자주 듣다보니 비로소, 나는 저를 내 또래쯤으로 보는데 저는 나를 아저씨쯤으로 본다고 알아챘다.
확인을 해야겠다. 거울을 본다. 아하, 내가 거울 보지 않고 살아온 지가 몇 십 년인가! 낯은 익으나 생각보다 훨씬 더 나배기가 거울 안에 들어있다. 목 언저리도 쭈글쭈글하다. 그렇구나! 음전한 아줌마들이 나를 보고 ‘어르신’이라고 한 말이 꼭 빈말은 아니었구나. 새로운 사실을 깨치면 항상 즐거움이 따르는 법인데 즐겁지 않은 깨침도 있는 법이구나!
앞의 시는 신위申緯(1769~1845)가 자신의 소실로 들어오려는 변승애卞僧愛란 기생에게 애틋한 사양의 뜻을 담아 주었다는 시이다. 노추老醜만큼 안타까운 일도 없다. 그렇지만 곱게 늙어감 만한 아름다움도 또한 없으리라. 젊은이가 미리 애늙은이가 되는 것도 문제지만, 나이 든 이의 젊은이 행세도 나잇값 못하는 것이려니!
그래, 한 번씩은 거울을 보면서 살 일이다.
※참고문헌. 정민, 『한시미학산책』, 휴머니스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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