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은 말 없는 주인이다. 그들은 관찰자를 침묵으로 때린다.”(괴테, 『잠언과 성찰』) 그러나 침묵 속에서 돌은 가끔 말을 하기도 한다. 침묵의 메아리 같은 말은 정답이 없는 질문이거나 난제의 수수께끼이기 일쑤다. 돌은 수억 년 거대한 지각 운동의 산물이면서 또한 한 인간의 생애보다 장구한 인간사 숱한 삶의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무정물이면서 유정하다. 더러 돌에 아예 인간의 그림이나 문자들이 새겨지기도 한다. 『홍루몽』의 다른 이름은 『석두기(石頭記)』이다. 돌에 새긴 기록이란 뜻이다. 여와가 쓰다가 청경봉에 버린 높이 열두 장, 사방 스물네 장이나 되던 돌 한 개는 신세를 한탄하다가 부채에 매다는 장식품만큼 졸아들어 있었다. 한 중과 도사가 지나가다가 거기에 인간의 파란만장한 애정사를 기록하게 된다. 돌이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역사가이자 문필가인 쥘 미슐레는 그의 한 저서에서 이렇게 썼다. “길 위에 서 있는 돌 자체가 우리에게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내건다.” 중세 한 편력기사 앞에 돌이 길을 막고 말을 한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내는 것이다. 러시아의 화가 빅토르 바스네초프(1856-1933)가 그린 「교차로의 기사」이다. 바스네초프는 러시아사와 민화를 테마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교차로의 기사」는 중세 러시아의 전설적인 편력기사를 노래한 서사시 「일리야 무로메츠와 강도」에서 영감을 받은 그림이다.
문자가 새겨진 돌 앞에서 백마를 탄 기사가 멈춰섰다. 광활한 들녘 저 끝에서 황혼이 물든다. 황혼을 비껴가며 바람이 허공에 불길한 까마귀를 띄우고 말의 갈기를 쓰다듬는다. 비문을 읽기 위해 고개를 기우는 편력기사의 어깨 위에 적막 같은 고독이 흐른다. “똑바로 가면 생명이 없다. 지나가거나 지나가거나 지나가거나 길이 없다.” 돌이 건네는 수수께끼다. 우리는 이 수수께끼의 정답을 모른다. 힌트는 있다. 돌 앞에서 기사를 응시하는 듯한 해골들, 그를 향해 날아오는 까마귀, 바위에 앉아 우는 까마귀, 멀리 앞을 가로막는 늪지와 저무는 해. 뭔가 알 수 없는 죽음의 향기와 그것에 맞서는 외로운 여정의 운명, 그 운명의 우울한 무게를 기사는 직감하고 있는 듯하다. 「교차로의 기사」에서 수수께끼를 던지는 돌은 인간의 선택과 운명에 개입한다. 돌이 말을 하는 것이다. 멀리 흩어진 여러 개의 거석들이 기사가 가질 선택지를 이정표처럼 표시하고 있다. 자 그대 돌이 안내하는 운명의 길로 들어오라.
「교차로의 기사」를 보다가 살바도르 달리의 「욕망의 수수께끼―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를 문득 연상하게 된 것에는 딱히 꼬집어 말할 이유가 별로 없지만, 아마 「교차로의 기사」에서 돌이 내는 수수께끼가 이 그림의 제목을 떠올리게 했는지 모를 일이다. 이 그림은 달리가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한 초기의 작품이며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팔린 작품이었다. 심리학자들은 내 마음의 흐름을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신화나 전설의 영웅담이 실은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심리적 과정의 투사이며, 교차로에 선 편력기사의 이야기를 내면 심리의 풍경으로 변환시키면 달리의 이 그림이 된다고.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노란색 바위는 왼쪽 바닥에 놓인 잠자는 얼굴처럼 생긴 바위에서 부풀어 오르고 있다. 그 얼굴은 달리 자신의 얼굴이다. 부푼 바위는 꿈을 꾸는 달리의 뇌 같기도 하고 어머니의 자궁 형상이기도 하다. 달리의 꿈꾸는 뇌가 만든 어머니 자궁의 환영인가. 이 그림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표현하였다. 큰 바위의 구멍 안에 다시 구멍 난 바위가 있다. 두 개 돌의 구멍을 지나면 욕망의 대상인 여자(어머니)의 몸이 있어 관음증처럼 훔쳐보게 한다. 왼쪽에는 어머니의 몸을 금하는 아버지의 공포스러운 사자 머리와 거세의 공포를 주는 칼을 쥔 손이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에 하나씩 끼워 맞추는 구구한 해석의 미로에서 한 걸음만 살짝 벗어나서 다시 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자궁의 형상을 한 돌이 우리에게 내는 수수께끼 말이다.
「교차로의 기사」의 외로운 편력기사는 심리 속에서 초록색 물(무의식의 흐름인지?)에 살짝 잠긴 작고 흰 조약돌이 되어 거대한 바위의 수수께끼 앞에 섰다. 이 돌이 내는 수수께끼는 ‘어머니’이다. 80여 개로 눌러진 바위의 홈에는 반쯤 ‘ma mere(나의 어머니)’라고 새겨져 있고 반쯤은 비어 있다. 그 빈칸을 우리가 메워야 할지 모르겠다. 돌이 내는 문제는 두 개의 구멍으로 제시된다. 한 구멍에는 현실적 욕망의 대상이 있고, 한 구멍은 마치 홈의 빈칸들에 상응하는 것처럼 아득한 지평선만 펼쳐진 채 텅 비어 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일까? 아니면 어머니의 자궁이, 자궁의 형상을 한 돌이 이 둘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뜻일까? 이 돌은 프로이트식의 성적 욕망의 수수께끼보다 더 심원한 생명의 수수께끼를 품고 있는지 모른다. 달리 얼굴에는 부패와 죽음을 상징하는 개미 떼들이 몰려들고 있지 않은가.
생명의 수수께끼를 품은 돌은 신성을 품는다. 신성한 돌은 모든 종교의 문제인 생명과 죽음 그리고 불멸에 대해서 속삭이기 시작한다.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0)가 그린 「황혼의 산책」, 그 고즈넉한 황혼의 질료 속으로 우리도 산책해 보자. 사물들이 형상의 빛을 거둬들이고 자신만의 내밀함으로 침잠하면서 질료 속에 잠들어 있던 신화를 속삭이기 시작하는 시간, 내면의 고독으로 고요히 잠긴 사내가 겨울 숲의 빈터에 이르고 있다. 거기에는 작은 돌들 위에 큰 돌이 올려져 있다. 이것은 분명 고대의 무덤이며 제단과 사당이기도 했던 고인돌이다. 왜 옛사람들은 무덤을 거대한 돌로 장식했을까? 그리고 거기에서 제사를 지냈을까? 그들은 돌에 있는 무언가를 보았다. 아니 믿었다. 시간과 죽음을 견뎌내는 모종의 힘 같은 것 말이다. 고인돌, 피라미드, 델포이의 옴팔로스, 메카의 검은 돌, 스톤헨지가 그러하다. 영국의 소설가 D. H. 로렌스는 말한다. “인간들이 왜 돌을 사랑하는지 아주 잘 안다. 그것은 돌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 이전 시대의 강력한 대지의 신비로운 힘의 구현이다.” 그 신비로운 힘이 묵묵히 인간의 삶을 지켜본다. 박두진 시인은 작은 수석(水石)에서 대지의 힘이 변전하는 파란만장한 인간사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도 얼려 응결시켜, 숱한 순간들을 그대로, 그대로 영원으로.
날새도 바람결도 얼어서 박히고
눈물도 옛날도 얼어서 박히고
꿈도 사랑도
달반도 그 아침해도 얼어서 박히고
만남과 그 헤어짐
남과 죽음
영화와 몰락
아우성도 환호도 얼어서 박히고
비수와, 꽃
그 깃발도 그 개선도 얼어서 박히고
얼어서 박히고……
―박두진 <빙벽무한> 부분
「황혼의 산책」에서 사내가 서 있는 위치를 보면 우연히 스쳐 지나가려던 것이 아니다. 발길 닿는 대로 거닐다가 여기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오래 사색에 잠긴 채 이 고인돌 주변을 맴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마치 탑돌이를 하듯이 고인돌의 주변을 돌다가 잠시 멈춘 듯하다. 소멸과 재생의 변화를 품고 있는 그믐달 아래 불멸을 꿈꾸는 돌은 순간 속에 영원의 문을 연다. 그것은 풀 수 없는, 그러나 끝없이 끝없이 풀어야 할 수수께끼를 내고 있다. 사내는 황량한 겨울날 빛도 어둠도 아닌 시간 속에서 돌무덤의 주위를 돌고 또 돌며 수수께끼를 풀고 있는 것일까? 삶과 죽음, 변화와 영원,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미학자 이성희는
▷1989년 《문예중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부산대(철학과 졸업)에서 노자 연구로 석사, 장자 연구로 박사 학위
▷시집 《겨울 산야에서 올리는 기도》 등
▷미학·미술 서적 『무의 미학』 『빈 중심의 아름다움-장자의 심미적 실재관』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 등
▷현재 인문고전마을 「시루」에서 시민 대상 장자와 미술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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